〈 71화 〉엘프
처음 프로젝트에 간다음 날 한설화는 생도복이 아닌 목을 가리는 폴라티를 입고 왔다.
하랑의 교칙에는 생도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그 교칙을 지키는 사람은 별로 없었지만, 한설화는 그 교칙을 잘 지키는 편이었다.
그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생도복을 입는 것을 선호했다.
유은설이 봐온 한설화는 늘 그랬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한설화가 교실에 들어올 때 모든 사람이 그를 쳐다봤다.
일순간 떠들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고,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시선이 한설화에게로 향했다.
생도복은 다른 옷보다 예쁘지 않았고, 정복의 인상이 강했기에 좋아하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유은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팔과 몸의 핏을 드러내 주는 폴라티가 그녀의 마음에 들었다.
한설화는 시선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자리에 앉아있는 생도 모두가 그에게 누군가가 물어주기를 바랬다.
‘오늘은 왜 이걸 입고 왔어?’
그렇지만 그 누구도 한설화의 옆에 다가가지 않았다.
한설화는 A반의 천연기념물 같은 느낌이었다. 누구도 다가가지 않고, 멀리서만 지켜보는 그런 존재.
가만히 앉아있는 한설화에게 김세연이 다가갔다.
“설화야, 오늘은 좀 다른 걸 입고 왔네?”
학기 초반이면 몰라도, 지금에 와서 교관들은 생도복을 입지 않아도 크게 단속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끝나자마자 단련실로 가는 사람도 있었고, 동아리를 하러 가는 사람도 있기에 생도복만 입기는 불편한 점이많았다.
그런 점에서 현재 교실에는 개성 있게 입은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평소에 수수하게 차려입는 사람이 특별하게 입고 오면 무언가 달라 보였다.
그 사람이 바로 한설화였다.
“응? 아… 생도복이 물에 젖어서.”
“너 여러 벌 들고 다니지 않아?”
“그걸 어떻게…”
“…그냥 계속 입고 오길래… 찍어봤지.”
유은설은 어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각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그녀와 밖에 나갔다 온 일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아니면 정말로 물에 젖어서?’
밖에 나갔다 올 때까지 한설화의 생도복은 멀쩡했다.
“기분전환 용으로 입고 온 거야?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으응... 아무 일도 없었어.”
아무 일도 없다는 말에 김세연은 다른 화제로 주제를 돌렸고, 다른 생도들도 몸을 슬쩍 쳐다보고 관심을 껐다.
유은설은 오늘 있을 프로젝트에 대해서 생각했다.
유은설이 프로젝트에서 배운 것은 많았다.
처음에는 배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었지만, 공교롭게도 그 프로젝트에서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계획된 것인지.
무엇이든 좋았다. 유은설은 저번에 얻은 성과가 점점 막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거기 서 있는 사람의 입에서 마법이란 소리가 나왔을 때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 다음에 바로 수업을 시작했고, 자신이 막혀있던 부분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유은설이 고민하던 부분은 바로 마법의 위력.
책에서 얻은 내용은 한정적이었고, 기초적인 마법 말고는 뭔가 막혀있는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막힌 부분을 풀려고 노력해봐도 풀리지 않았다.
포기하려던 찰나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많이 실패했지만,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실패할 수 있다는 건 도전할 것이 있다는 거니까.
벌써부터 연습장에 가게 되는 것이 기다려졌다.
**
유은설과 한설화는 하랑의 밖으로 나와 연습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은설은 어제 한설화만 남아서 훈련했던 것이 생각나 이야기했다.
“설화야 어제 안에서 무슨훈련했어? 계속 실패하던 것 성공은 했어?”
“어제? 아… 응.”
“이번에는 같이 나갈 수 있도록 하자.”
저번에 던전을 같이 들어갔다가 나온 이후로 한설화와 더욱 친해진 느낌이었다.
전에는 뭔가거리를 두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돌아간 느낌이었다.
한설화도 전과는 달리 밝아진 느낌이었고.
그저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전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기에 평화로움이 고맙게만 느껴졌다.
‘앞으로도 이런 평화로운 나날만 있으면 좋을 텐데…’
연습장으로 들어서자 거기 서 있는 사람이 우리를 반겼다.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외모는 어색하기만 했다.
연예인이 풀메이크업을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유은설은 그렇게 생각하고 옆을 돌아 한설화를 쳐다봤다.
한설화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할까 쳐다봤지만,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더라고. 사라하라고 해.”
가벼운 어투였지만, 그녀의 외모를 보고지적할 생각은 진작에 접었다.
노랑색의 머리카락과 이국적인 외모.
이것만으로 그녀가 외국에서 온 사람임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이름도 들으니 외국인임을 확신할수 있었다.
“자 그럼 빠르게 다음 배울 것에 대해 얘기해줄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금세 마법진을 그려냈다.
중앙에 물방울 모양이 그려진 마법진이었다.
“저번에는 여기서빈 공간에 똑같은 마법진을 만들었잖아. 그러면 여기에 다른 마법진을 불어넣으면 어떻게될까.”
의문형으로 끝났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사라하는 그렇게 말하고, 저번과는 달리 똑같은 마법진이 아닌, 불 마법을 만들고 있었다.
유은설의 목에서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완성된 마법진은 물방울을 쏘아냈다.
‘근데 뭔가 위력이 약한 느낌?’
자신이 쓰는 것보다 약한 느낌이었다.
“무슨 문제인지 알겠니?”
사라하는 유은설을 쳐다보며 물었고, 유은설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위력이 약해지지 않았나요?”
“정확해! 그러면 왜 약해질까.”
“어…”
유은설은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불과 물. 딱 봐도 상성이 좋지 않아 보이잖아. 그러면 잘 봐.”
사라하는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물 마법 속 전기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쏘아진 물방울은 아까와 달랐다.
물방울에 전기가 서려 있다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고, 전보다 마력의 흐름이 더욱 빨라졌다.
“와…”
유은설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직접 해보면 돼.”
말은 쉽게 하지만, 유은설은 저번에 배운 것도 아직 체득하지 못했다.
열심히 연습해도 딱 한 번 성공했을 뿐.
배우는 속도에 비해 가르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유은설은 투덜대면서도 방금 알아낸 것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마법진을 두 개 그리는 것보다 더욱 어려웠다.
똑같은 마법이라면 양손으로 원을 그리는 느낌이라면, 두 가지 마법을 사용하는 것은 왼손으로는 네모, 오른손으로는 세모를 그리는 것같았다.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다른 하나도 유지해야 했기에, 집중이 풀려버리면 어느새 모양이 똑같아지거나 한쪽의 마력이 공중으로 사라졌다.
뒤를 돌아 확인해보니 저번과 달리 한설화도 정상적으로 마법을 구현하고 있었다.
기초적인 마법진도 사용하지 못했던 것이 어제였는데… 한설화가 성장한 것을 보니 유은설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유리한 것에는 지면 안 되지.’
**
수업이 끝날 시간이 다가왔고, 유은설은 하던 것을멈추고 중앙으로 모였다.
“설화는 오늘도 끝나고 수업하기로 했어.”
마치 통보하듯 전해오는 사라하의 말에 유은설은 머리가 멍했다.
오늘 한설화는 열심히 했고, 어느 정도 따라오는 기미가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옆을 돌려 한설화를 쳐다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얘기가 된 것처럼 보였다. 오늘도 유은설은 한설화를 연습장에 남겨두고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가 할 것이 없어 바닥에 돌을 차던 도중 자판기가 눈에 보였다.
“으음… 음료수라도 사둘까.”
마력을 쓰는 일은 체력소모가 없지만,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시면좋지 않을까.
유은설은 그렇게 생각해 음료수 캔 세 개를 산 뒤다시 연습장으로 돌아왔다.
“하나는 사라하 주면 되겠지?”
‘생각해보니 사라하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그냥 이름? 교관? 선생님?’
무엇이든 단정 짓기 어려웠다.
유은설은 연습장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제는 밖에 있었지만, 오늘은 특별한 말도 없기에 들어가도 상관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들어가서 유은설이 본 것은 텅 빈 연습장이었다.
불은 켜져 있었지만, 주위에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고, 그녀의 입은 쩍 벌어졌다.
“어?”
‘어디 간 거지?’
‘내가 음료수를 사 오는 동안 끝난 건가?’
유은설이 음료수를 사 오는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않았다.
그리고 끝났다고 하더라도 한설화가 자신을 내버려 두고 혼자 갈 애는 아니었다.
그렇게 유은설은 연습장 안으로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연습장에는 왜 존재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문이 여러 개 있었다.
‘혹시’라는 마음 때문에 그 문으로 향했고, 그녀는 천천히 가장 왼쪽의 문으로 다가가 열었다.
─끼이익.
오래되었는지 이상한 소리가 나며 열렸지만, 그 안에는 한설화나 사라하가 아닌 물품들이 놓여있었다.
“으음…”
여기서 끝이 아닌 오른쪽 문으로 향해 문을 열었다.
─끼이익.
“애초에 아닌가?”
그러면서도 유은설의 의심은 끝나지 않았다.
뭔가 발끝부터 올라오는 서늘함이 그녀의 몸에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직감은 이런 곳에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늘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직감은 경고를 해줬다.
세 번째. 네 번째.
하나하나 열어젖히며, 안을 확인해봐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내 착각인가.”
그리고 그녀가 맨 오른쪽 문에 도착할 때, 그 속에서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이 있다는 증거였다.
유은설이 문을 열려는 찰나, 안에서 문을 열렸다.
“응? 여긴 웬일이야?”
“아… 연습장에 없길래.”
유은설은 빼꼼 나와 있는 한설화의 얼굴을 봤다.
전부 다 문이 열린 게 아니라 살짝만 열려 그의 목까지만 보였다.
“여긴 무슨 일이야?”
그리고 그의 뒤에 사라하가 들러붙었다.
유은설은 살짝 이상함을 느꼈다.
문 틈사이로 보이는 방의 풍경은 지금까지 열어왔던 방과는 달랐다.
물건들이 놓인 것이 아니라, 마치 꾸며놓은방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설화를 쳐다봤다.
목울대에는 땀이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운동을 했나?’
마법을 훈련하는데 운동할 일이 있나?
유은설은 그렇게 생각하며 사라하를 쳐다봤다.
그녀도 똑같이 땀방울이 얼굴 곳곳에 맺혀있었다.
“하아아… 저기 그, 금방 나갈 거니까. 밖에서 기다렷! 으… 줄래?”
한설화는 중간중간 신음을 내뱉었고, 발음 하나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마치 누가 뒤에서 그를 만지는 것처럼.
유은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이상하게 여기자 그녀의 눈에 이상한 점을하나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오늘 설화는 목폴라티를 입고 왔는데?’
가려져 있던 목이 훤히 드러나 있었고, 그 목에는 빨간색의 자국이 남아있었다.
마치 누가 물어뜯은 것처럼.
입고 왔던 티를 벗어놓고 여자와 한 방에 있다면 누구라도 의심할 것이다.
유은설은 전에 봤던 상황이 똑같이 재현되는 것 같았다.
교관 앞에서 한설화가 강간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치욕적인 상황.
그 순간을 생각하며, 지금 앞을 바라봤다.
지금은 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맞으면 지금 당장 들어가야 했다.
‘애초에 마법밖에 사용을 못 하니 들어가자마자 검으로 제압한다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아…”
그러면서도 한설화는 자꾸만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뜨거운 숨결이 닿고 있었고, 그 숨결은 어딘가 야해 보였다.
유은설은 그 순간 몸으로 문을 밀었고, 문이 열려 방 안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