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엘프
엘프, 아니 사라하가 처음이라고말한 후 정적이 맴돌았다.
내가 어버버하는 사이 그녀가 나를 밀쳐 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감을 잡았는지 허리를 흔들며 ‘좋아’라고 외치는 그녀에게 분위기를 깰 말은 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에 내 목에 자국을남기면서 말했다.
‘내일 또 보자.’
하루 종일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사라하의 말만이 생각났다.
그녀 때문에 평소에 입지도 않은 옷을 급하게 구해 사 입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생각에 들어오지 않았다.
처음 교실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었지 자리에 앉으니 힘듦은 싹 날아갔다.
원래 같으면 옷을 바꿔입은 것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머릿속이 사라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생각해보니 내가 사라하를 싫어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왜 그녀를 경멸했을까.
다짜고짜 섹스를 하자고 해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큰 이유도 되지 않았다. 나에게는 무덤덤한 이야기일 뿐 큰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사라하가 나를 싫어할 이유만 있었지.
첫 만남부터 마지막 헤어질 때까지 그녀를 물건 다루듯이 대했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나쁘게 대한 것밖에 생각나지 않네.’
사실 만나자마자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어떤 이유로 나를 원하는 걸까.
그녀의 행동은 마치 애정을 갈구하는 것 같았다.
내가 잘해준 게 무엇이 있다고.
그리고 연습장에 들어가자 보이는 사라하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얼굴을 쳐다보면 어제 일이 생각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싶었다.
‘왜 나를 원하는 거야?’
환청이 들리고 있지만, 무시했다.
이제는 평상시에 들리는 환청은 무시할만했다.
애초에 정상적인 상태라면 환청과 정상적인 소리를 분간할 수 있으니까.
하늘이 뒤틀리거나, 사람의 얼굴이 흐려 보이는 환각은 이제 일상이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상태는 지속되니 무시하며 살고 있었다.
사라하의 수업이 끝나고, 어제와 같이 유은설을 제쳐두고 나한테 다가왔다.
“어제 많이 힘들었어?”
사라하는 뒤가 아닌 앞에서 말했고, 나는 깜짝 놀라 유은설을 쳐다봤다.
유은설은 다행히도 듣지 못한 것인지 눈을 감고 집중 중이었다.
“쟤 한 번 집중하면 듣지 못하던데. 어제도 봤잖아.”
사라하는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뒤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이따가 봐.”
불안감에 계속 뒤를 힐끔거렸지만, 그녀가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어제와는 달리 말끔히 마법을 구현해내자 해맑게 웃는 유은설도 볼 수 있었다.
유은설은 몇 번을 실패하더니 마법에 성공할 수 있었다.
“서… 설화야.”
자기도 놀란 건지 내 이름을 더듬으며 부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딱 봐도 기본 마법보다는 화려한 마법진이 파랗게 빛나 그녀의 옷을 밝히고 있었다.
한 번 더 파랗게 빛나더니 그녀의 앞에서 물방울이 광속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쳤다.
“우와…”
유은설의 성장은 눈에 띄게 빨랐다.
정말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부신 성장이었다.
그녀에게 엄지를 세워 칭찬을 날렸고, 유은설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훈련에 임했다.
끝날 시간이 다가오고, 유은설이 하던 것을 멈추고 중앙으로 모였다.
사라하는 우리를 모으고 얘기했다.
“설화는 오늘도 끝나고 수업하기로 했어.”
유은설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해 나를 쳐다봤지만, 진작에 합의가 되어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유은설이 밖으로 나가고, 나와 사라하는 어제 들어갔던 방으로 들어갔다.
“어제는 괜찮았어?”
나를 걱정해주는 사라하에게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괜찮냐고 묻는 것은 내가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녀는 처음이었고, 나는 아니었는데.
여자가 처음을 겪으면 매우 아프다고 들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불러야 하지?’
지금까지는 반말을 썼고, 호칭도 막 불러댔다.
엘프라는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나보다 나이를 더 먹었을 것이다.
“저기… 뭐라고 불러야 하죠?”
어제는 그녀의 말대로 존댓말을 썼지만, 오늘은 자연스럽게 존댓말을 써야할 것 같았다.
“선생님…? 교관님? 음… 너무 딱딱한데… 누나?”
원래 연상의 여자를 부르는 말은 누나밖에 없었기에 마지막 말을 뱉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 어… 좋은 것 같아. 그렇게 불러.”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냥 싫은데 억지로 부르라는 느낌?
말을 더듬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다른 호칭을 찾았다.
“사라하님? 엘프님?”
말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얼굴이 구겨진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이건 아니었나.
“그냥 누나라고 불러.”
“아… 그럴까요.”
내가 부른 것 중에 그나마 나은 것이 누나였던 것 같다.
“근데 갑자기 왜 이렇게 순해졌어?”
“음… 죄송해요. 생각해보니 제가 잘못한 것밖에 생각이 안 나서…”
하루 종일 생각해도 내가그녀를 기절시킨 일.
배게 속에 담아 운반한 일.
마지막에 그녀의 의사도 묻지 않고 넘겨준 일.
그런 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정작 화내야 될 것은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그… 그래? 그러면 이제부터 내 말 들을거지? 다가와서 옷 벗고 빨아봐.”
그녀는 바지를 벗으며, 나에게 명령했다.
어차피 거래였고, 이제는 그렇게 거부감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희열감에 가득 차있는지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가있었다.
나의 행동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멈추었다.
─끼이이익.
“혹시 누구 들어올 사람 있어요?”
내가 묻자 사라하는 부정하듯 고개를 양옆으로 돌렸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말소리가 들리고, 서로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저기 저 혹시 도와주실래요?”
“그냥 들키자. 내 말 들어준다며, 응?”
사라하는 들키자고 말했고, 나는 들키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방 꼴을 보더라도 유은설이 오해하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은설과의 관계는 끝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나와 친해진 사람과 이렇게 허무하게절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라하에게 한 번 더 부탁했다.
“저기… 누나…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전보다 훨씬 정중해진 부탁이었다.
마지막 부탁이었다. 이러는 순간에도 유은설은 점점 우리가 있는 방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그렇게 부탁하니까, 한 번 들어주는 거야.”
주위를 둘러보며 가장 문제인 것부터 찾았다.
“침대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근데 침대는 어떡하지?
저렇게 큰 게 지금 나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침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사라하의 말이 들리고, 구원받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라는 말은 잠시 접어두고 그녀를 믿기로 했다.
사라하는 침대 밑에 마법을 그리고 있었고, 그사이에 주위에 물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구석에는 다행히 포대를 찾을 수 있었고, 있는 물건들을 모두 거기 안으로 밀어 넣었다.
“왜 이렇게 덥지.”
정말로 방 온도는 더운 것 같았다.
어제도 덥다고 느꼈지만, 오늘은 더욱 더운 것 같았다.
“그… 할 때는 온도 높은게 좋다고 해서. 저기 보일러 있어.”
보일러를 확인하니 난방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땀이 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난방이 켜진 줄은 몰랐다.
난방을 꺼놓고, 다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너무 더워 옷을 벗어 구석에 던져놓고, 사라하를 쳐다봤다.
그녀도 힘을 내고 있는지 침대 밑에 그려놓고 있는 마법진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딱 봐도 무슨 용도인지 알것 같았다.
‘순간이동 마법?’
능력도있는 마당에 마법이라고 없을 리가 없었다.
단지 그 어려운 마법을 지금 침대를 옮기는 데 쓰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끼이이익
당장 옆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서 먼저 문을 열려고 했다.
아직 침대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방안을 보이면 안 됐다.
난방을 껐지만, 아직 방의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가쁜 숨을 정리하려고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내 얼굴만 보이도록 살짝 문을 열었다.
“응? 여긴 웬일이야?”
“아… 연습장에 없길래.”
유은설의 말이 끝나고, 내 뒤에 사라하가 붙었다.
침대는 정리가 된 건지, 그녀도 한마디를 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유은설이 들어오지 않고, 그냥 나가줬으면 좋겠다.
그녀를 빨리 내보내려고 말을 하려고 했다.
“하아아…”
참고 있던 가쁜 숨이 나왔지만,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했다.
“저기 그, 금방 나갈 거니까. 밖에서.”
말하는 도중 내 생식기에 촉감이 느껴졌다.
범인을 찾을 것도 없었다. 당장 내 뒤에 사라하가 가까이 붙었으니까.
“기다렷!”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리고 앞을 바라보니 애매한 표정의 유은설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알 수있었다. 좆됐다는 것을.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올 것만 같은 그녀를 보고, 사라하의 손을 쳐냈고, 허벅지를 살짝 때렸다.
“하아…”
작은 움직임에 또 꾹 참고 있던 숨이 나왔고, 이제는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은설이 몸을 밀어 문이 열렸고, 문에 기대어 서 있던 사라하와 나는 동시에 넘어질 수 있었다.
“어?”
유은설을 들어오고, 주위를 살피더니 자신이 상상하던 것과는 다른 풍경에 놀란 것 같았다.
나도 정리한 풍경을 이제야 볼 수 있었다.
벽지는 방의 분위기와맞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방의 풍경은 그녀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침대는 정말 깔끔하게 사라졌고, 주위에 물건들을 모아놓은 포대들은 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딱 저것만 열지 않으면 좋을 텐데.
“저기 우리 훈련 중인데 무슨 일이니?”
어느새 일어난 사라하가 평온하게 말했고, 유은설은 쪽팔린 지 고개를 푹숙였다.
다행이다.
“저… 그러면 여기서훈련하는 거 같이 지켜봐도 되나요?”
유은설이 뒤이어 말한 말은 나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뒤를 돌아 사라하를 쳐다보니 그녀도당황한 것 같았다.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