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2부
윤예진은 자신에게 안겨있는 한설화를 쳐다봤다.
한설화의 정신이 약한 것은 진작 알고 있었다.
그와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설화야, 진정됐어?”
윤예진은 방금까지 미소 짓던 것을 멈추고,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한설화에게 물었다.
눈에는 눈물이 찔끔 맺혀있었고, 동공이 흔들리며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마저 잘 어울렸다.
윤예진은 주머니에서 과자를 하나 꺼냈다.
늘 한설화에게 먹이던 동그란 모양의 과자.
이번에는 포장을 까 한설화의 입에 집어넣었다.
한설화는 안 먹을 것처럼 입을 벌리지 않았지만, 몇 주 동안 먹었던 과자의 냄새에 입을 벌려 과자를 받아먹었다.
오물오물 씹더니 금방 눈을 감았다.
“괜찮은 겁니까?”
윤예진의 옆에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고 말고요.”
그녀는 눈을 감은 한설화를 껴안은 상태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스치는 느낌이 중독될 것만 같았다.
처음에는 깜짝 놀라며 거부했었는데, 요즘은 깨어있을 때 쓰다듬어도 별 거부반응이 없었다.
“그러면 다음은…”
“내일도 여기로 걸어오게 해주세요. 그리고, 저한테 조금 더 의지하도록 해주시고.”
처음에는 약이라고 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한설화에게 먹이는 것이었기에 거부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나를 먹이자 머리를 아파하는 걸 보고 멈출까 걱정되었지만, 그다음 암시로 걱정은 모두 풀렸다.
‘그가 먹은 것 중에 과자가 제일 맛있어진다.’
이 암시 하나만으로 한설화가 과자에 대한 경계심을 아예 풀었다. 오히려 그가 자신이 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티가 날 정도였다.
자신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시선이 그쪽으로 아예 쏠렸으니까.
과자에는 정신을 마모시키는 약과 수면제가 들어있었다.
정신을 마모 시켜 암시가 더욱 잘 들게 도와줬고, 수면제는 암시를거는 동안 깨지 않게 방지하는 역할이다.
“됐습니다.”
“네. 그럼 가보세요.”
“저기… 돈은…”
“곧 보내드릴 테니까. 일단 가세요. 제가 안 지키는 거 보셨어요?”
당연히 사람의 정신을 건드릴 수 있는 능력은 국가적으로 통제를 받는다.
지금 앞에 서 있는 여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큰 빚만 아니었으면 자신의 제의를 받아들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에서 보낸 감시자가 있을 때만 능력을 사용할 수 있고,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큰 제재를 받는다.
돈이 부족해서 불법적으로 뛰는 것뿐이지, 이런 능력을 갖춘 각성자들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국가가 제공하는 직업으로 충분히 밥은 벌어 먹고살 수 있으니까.
“설화야…”
윤예진은 조심스럽게 한설화를 불렀다.
자신은 나쁜 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설화를 도우려는 쪽에 속했다.
지금 이 암시를 걸면서 정신을 조금씩 회복시키고 있었다.
“설화야.”
“으…응?”
굳게 닫혀있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고 윤예진과 눈이 마주쳤다.
“아… 긋… 미안.”
한설화는 볼을 붉히며 급하게 일어섰다.
“괜찮아졌어?”
“응…”
“그러면 갈까?”
윤예진은 한설화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제 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전과 달리 스킨쉽을 하는 것에 대해 경계심이 옅어졌다.
한설화도 이제는 손을 잡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는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이다.
부드러운 손을 부여잡고, 기숙사까지 한설화를 배웅한 다음 윤예진은 다른 사람을만나러 갔다.
“저기… 괜찮은 거 맞지?”
“그럼.”
한설화를 욕한 사람들을 모아놓고,윤예진은 한마디를 더했다.
“내일도 부탁해.”
“내일도…?”
그들도 엄연히 각성자였다. 주위 누가 있는지 정도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먼 거리도 아니었고, 몇걸음 떨어지지 않는 위치에서 누가 엿듣고 있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지 살짝 얼굴이 찌푸려졌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단 몇 마디를 하는 것만으로 상상할 수 없는 돈이 통장으로꽂혔으니까.
윤예진은 내일 한설화가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찾을까 기대되기 시작했다.
휴교가 끝나기까지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 김세연과 유은설, 두 명이 오기 전에 모든 일을 끝내놓아야 했다.
**
오늘도 한설화는 자신이 왔던 길을 걷고 있었다.
윤예진은 오늘도 같이 가지 못할 것 같다고 전했기에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설화는 전처럼 천천히 걸어오지 않고, 불안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윤예진은 그런 한설화의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미어캣처럼 고개를 빼꼼 들어 주위를 살피는 것까지.
한설화는 곧 몸을 어둠 속으로 숨겼다. 누가 봐도 티가 났지만, 한설화 혼자만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어제와 똑같은 두사람이 등장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한설화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홀린 듯 두 사람을 따라갔다.
윤예진은 그런 한설화가 들을 내용을 뻔히 알고 있었다.
한설화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도. 그리고 자신에게 달려올 것까지도.
기숙사 앞에서 만나자고 했으니 아마 달려올 것이다.
두 사람에게는 어제보다 심한 말을 마구 내뱉으라고 했으니까, 지금쯤이면 한설화가 전부 듣고 있을 것이다.
윤예진은 미리 기숙사 앞에 가서 한설화를 기다렸다.
전처럼 길바닥에 주저앉는다면 오지 않겠지만, 이번에는 한설화를 믿고 있었다.
저 멀리서 한설화가 천천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웃음기도 없었고, 손으로 귀를 막은 채 걷고 있었지만, 곧 자신을 보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윤예진은 자신의 다리를 꼬집으며 웃음을필사적으로 참았다.
한설화는 자신의 머리를 숙여 윤예진의 어깨에 박고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
‘참아야 하는데…’
입꼬리가 자동적으로 올라갔다.
이미 한설화는 자신의 것이었다.
다른 년들이 자리를 비운 틈에 자신이 취했다.
아니 어쩌면 한설화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은 이상 이렇게 쉽게 마음을 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를 꽉 껴안고 자신의 가슴과 그의 가슴이 맞닿았다.
그런 감촉이 너무 좋았다. 한설화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자신은 몸을 살살 움직이며 그의 가슴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한설화와 눈이 마주치자, 윤예진은 주머니에 과자를 꺼내 그의 입에 집어넣었다.
습관이 무섭다고 했던가, 한설화는 이제 거부도 안 하고 윤예진의 손으로 과자를 받아먹었다.
전처럼 눈이 서서히 감기고, 불이 꺼진 곳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이제는…?”
“제가 혀를 내밀면 사랑에 빠진 감정을 느끼게 해주세요.”
확실하게 해야지.
자신은 누구처럼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건… 시간이 조금 걸리는데…”
“상관없어요.”
어차피 해가 뜨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한설화는 시간을 잘 안 보는 성격이기도 했고.
‘처음 암시를 걸었을 때도 지금 같았는데.’
이 암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상태창이었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장치.
그 상태창을 열지 않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암시였다.
원래 밤새 암시를 걸어야 먹힐 수준이었지만, 한설화는 그 암시가 몇 분 만에 걸렸다.
지금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도, 윤예진도 그때 서로 놀라서쳐다본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 뒤로는 일이 술술 풀렸다. 한설화가 과자를 먹고, 점점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것부터.
평소에 두통을 오게 만들고, 자신과 함께 있으면 두통이 오지 않게 만든 것까지.
그렇게 하자, 한설화의 표정이 점차 자연스러워졌다.
약 한 시간이 넘게 지나갔을 때쯤에 여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됐습니다.”
윤예진은 미소지으며 가보라고 했다.
지금까지 모아놓은 돈이전부 사라지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앞에 있는 한설화가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앙다물고 있는 입술부터, 굳게 닫혀있는 눈까지.
“설화야!”
“어? 응.”
크게 부르자 눈을 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까지.
윤예진은많이 힘든 것 같다면서 한설화를 기숙사에 들여보냈다.
다음 날 약속을 잡는 것까지 까먹지 않았다.
**
뭔가 이상하다.
오늘도 똑같이 윤예진과 밥을 먹으러 가는 것뿐인데.
최근 생도들에게 나에 대한 말을 들은 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렇게 달리고 달려 만난 사람이 윤예진이었다.
나답지 않게 너무 응석을 부린 것인가 싶어 부끄러웠다.
윤예진을 다시는 똑바로 바라보지 못할 줄 알았다. 그녀가 나를 싫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윤예진은 친절하게 나를 받아줬고, 오늘도 똑같이 밥을 먹자고 권유했다.
근데 오늘 기분이 무언가 이상했다.
“설화야 뭐해?”
윤예진은 나한테 다가온 뒤 혀로 입을 쓸었다.
그렇다. 저 행동.
저 행동만 보면 미치겠다.
내 속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대체 뭐야.’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눈을 마주치지 못하겠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신경 쓰였다.
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심했다.
손을 잡는 것 하나마저 나를 좋아하는지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럴 리 없는데.
그리고 윤예진은 나를 보고 다시 그 행동을 했다.
온갖 이상한 상상이 막 떠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그녀와 껴안고 싶었고, 손도 잡고 싶었다.
손을 잡고, 같이 여행도 하고, 모든 것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녀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졌고, 주위에 함께 있고 싶어졌다.
그녀와 같이 있는 이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나를 싫어하는 생도들과 달리 그녀는 나를 진심으로 대했다.
언제나 따뜻하게.
김세연도, 유은설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 이 감정은 그 둘을 바라볼 때와 사뭇 달랐다.
둘은 친구가 되어가는 느낌이었고, 친구가 되고 싶은 감정이었다면.
지금 감정은…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