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2부
“가서 무슨 이야기했어?”
예진이가 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안에서 했던 이야기에 대해서 말했다.
외국에 있는 학교에 가는 것이확정된것부터, 이유까지 천천히 다 이야기하자 그녀는 듣다가 질문을 했다.
“프로젝트?”
“예전에 하랑에서 나갔을 때 했던 거야.”
“아…”
내가 그때 뭐라고 말했었지?
그녀한테 제대로 말한 적이 있던가.
근데, 예진이도 내가 나간 사실을 알고 있으니 잘 생각하면서 끄덕인 것 같다.
“그러면 너는 무조건 가는 거야?”
“아니… 뭐 거절해도 되겠지. 예진이 네가 싫으면 난 안 갈게.”
“아니… 좋은 기회인데, 가야지. 애초에 나도 가려고 했었어.”
“정말?”
예진이도 간다는 소리에 기분이 들떴다.
예진이가 가기 싫다고 했으면 나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그녀의 말은 반가웠다.
특히, 이번에 제의받은 학교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녀에게도 큰 손실이 일어날 것이다.
인맥 면에서나 실력 면에서 성장할 기회니까.
“그렇지. 나도 너한테 말하려고 했었는데.”
“다행이다.”
아이들이 있는 반 밖으로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반으로 들어갔다.
“끝나고 숲에서같이 연습하자.”
“응.”
**
“우리 얘기 좀 해.”
“응?”
매일 알바하는 치료실로 가던 중 김세연이 나타나 나한테 말을 걸었다.
그녀를 몇 주 동안 못 봤기에 나도 반가웠던 참이라 이야기하는 시간이 반가웠다.
이야기 나누는 것이 시간을 잡아먹는 것도 아니었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휴교 동안 있었던 일이 아니라 다른 말이었다.
“둘이… 사귀는거야?”
“응.”
“왜?”
“그거야…”
‘사랑해서.’
내 입으로 말하기는 약간 부끄러워 말을 흐리자 김세연이 먼저 말했다.
“그… 그럼 나는?”
“너는 여전히 친구지.”
“…그래 친구지. 싫어하지는 않지?”
“응? 내가 널 왜 싫어해.”
그래도 예진이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김세연과 유은설 뿐인데, 내가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저번에는?”
“저번? 아…”
내가 저번에 피했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건가 보다.
“예진이가 누가 내 몸을 만지려는 건 피하라고 해서.”
“그렇…구나.”
예진이가 남자라면 몸을 소중히 여기라면서 함부로 껴안기거나 하지 말라고 했다.
그녀에게 미움 사는 일은 싫었기에 그때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지금까지 말을 따르고 있었다.
애초에 남과의 접촉을 싫어했지만, 유은설과 김세연에게는 안긴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윤예진의 말이 더 중요했기에 그녀들의 손을 피하고 다녔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진이니까.
그녀가 나를 떠난다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부모님이 떠났을 때와 똑같은 기분일까.
무엇이든 그녀가 나를 떠나려고 한다면 목을 매달고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다.
인생을 살면서 첫사랑이었다.
마음이 이렇게 뛰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그녀도 나를 다 이해하겠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맞혀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맞혀줘야 했다.
예진이가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김세연은 말하면서 뒤를 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왜 저러지?’
그녀는 많이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려던 도중 나를 쳐다보고 있는 예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예진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갔지만, 그녀의 얼굴이 환히 보이자 평소랑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
“응? 자기 싫어하냐고 묻던데?”
“설화야…”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예진이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야. 설화야,너는 나밖에 없는 거 알고 있지?”
“응. 나는 너 없으면 안 돼…”
“그것만 알고 있어. 나는 먼저 훈련하고 있을게. 천천히 와.”
“응.”
예진이가 말하고 나서, 먼저 훈련하겠다 말하고 나갔다.
그녀의 뒤를 붙잡고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런 자신감은 나한테 없었다.
예진이가 왜 저러는지 알고 싶었다.
기분이 안 좋다면, 내가 무슨 일이라도 해서 기분을 좋게 만들고 싶었다.
예진이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될까.
“없네?”
그녀는 내 예상보다 가지고있는 것이 훨씬 많았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치료실에 앉아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오늘도 치료실에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는 찻집이라고 부를수 있을만큼 차의 종류는 다양해졌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하나씩 사왔더니 어느새 종류가 다양해졌다.
“따뜻하다…”
예진이가 없음에도 두통이 한결 가라앉는 느낌이 났다.
**
숲으로 들어가기 전 평소랑 다른 점이 보였다.
원래라면 아무도 없어야 하지만, 안에는 마력의 농도가 진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마력이 넓게퍼져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발을 뻗었다.
이 마력이 누구 것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왔어?”
예진이는 중앙에 앉아 마력을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일어서서 손을 내밀고 정신을 집중하더니 꽃을 만들어냈다.
“선물.”
“무슨 꽃이야?”
“메리골드.”
메리골드란 꽃이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모르겠지만, 지금 나한테 건네진 꽃은 예뻤다.
마력의 형상화 하나 제대로 하지 못했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마력을 보니 세월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예진이가 섬세하게 꽃을 만들었는지 잎 하나하나 너무 예뻤다.
마인의 습격은 유은설의 성장만이 아닌 다른 생도들의 성장을 도왔다.
당장 앞에서 마력을 내뿜고 있는 예진이도 성장 속도가 소설과 달랐으니까.
습격에서 대부분의 생도는 죽음에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역경 끝에 다들 하나씩은 무언가를 얻었을 것이다.
내 손에 쥐어진 메리골드는 금방 하늘로 파란 가루가 흩날리며 날아갔다.
아쉽다는 감정은 들지 않고,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이 예쁘다는 감상만이 남았다.
예진이는 주위에 마력을 넓게 퍼트리는 것이 힘든지 주위의 마력을 천천히 갈무리했다.
“설화야, 너는 옷 좀 잘 입고 다녀.”
다가와서 내 어깨에 흘러내린 옷을 집어 올렸다..
“응? 아… 내려가 있었네.”
예진이를 보기 위해 달려왔기에 옷이 내려가 있는 줄도 몰랐다.
사실, 누군가 훈련을 보는 것은 싫었지만, 이제는 예진이가 있어야 더 기분이 편했다.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오히려 더 불안했다.
훈련에 집중이 안 되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예진이가 주위에 있으니 그런 현상은 없었지만, 별개로 훈련에 집중되지는 않았다.
‘뭘 좋아할까.’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을 생각하는 것에온 정신이 팔려 훈련은 대충하고 있었다.
‘나도 꽃을 줄까?’
근데 여기 여자는 꽃을싫어하지 않나?
전의 세계에서나 여자에게 꽃을 주면 좋아했지, 여기서는 싫어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다른 생각을 품으며 활시위를 당기고 놓는 것을 반복하는 도중 어느새 예진이가 나를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너 왜 그렇게 입고 오는 거야?”
“응? 무슨 소리야?”
“옷 말이야.”
예진이의 말을 듣고 내려다보아도 옷에 무언가 묻은 것이 없었다.
어디 구멍 뚫린 것도 아니고.
평범한 면티에 체육복 바지였다.
“그래… 지금까지 혼자서 훈련했으니까.”
“무슨 문제야?”
그녀의 옷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옷이 막 올라가고, 속살이 보이잖아. 조금 신경 써서 입고 와봐.”
“그게 문제야?”
말을 해놓고 보니 알 수 있었다.
“다른 여자들 앞에서도 그래?”
“응?”
“그러냐고.”
예진이는 나한테 다가와서 옷 밖이 아니라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지만, 뒤에 나무가 등에 닿아 멀리 가지 못했다.
“설화야, 너는 가만히 있어도 여자를 홀리는 매력이 있어.”
“그런 게 어딨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그래. 뭐 그렇다 하자. 네가 방심하면 금방 이렇게 된다고.”
그녀의 손은 점점 올라가 내옆구리를 한 번 찔렀다.
“힉!”
간지러웠고, 갑작스러운 찌름에 놀라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내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다른 여자들 앞에서 이렇게 하면 개처럼 따먹힐 수도 있어.”
“……”
“그러면 내가 싫어하겠지?”
“그건… 싫어.”
예진이가 지금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보고 나를 떠나는 상황이 상상되어버렸다.
‘싫어.’
이미 그녀는 내게 있어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어버렸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
“예진아… 할래?”
“뭐?”
“……섹스.”
생각해보니 이곳의 여자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이 쓸모없는 몸덩이 아닐까.
“싫어?”
그녀도 나를 싫어하는 걸까.
나에게 매력이라는 것이 없는 걸까.
사실 나만이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예진이는 내가 불쌍해서 받아준 것이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아닐까.
예진이를 계속 쳐다봤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싫구나…”
“너… 이 말 또 누구한테 했어?”
예진이는 다시 나한테 다가와서 물었다.
“네가… 처음인데.”
“너 변태야?”
“아니…?”
“그러면 왜 그렇게 말해?”
“…예진이 너가 좋아할까 봐… 싫어?”
“하아…”
고개를 숙여 한숨을 쉬더니 나한테 다가왔다.
“설화야 앉아.”
그녀는 나를 앞에 앉혀두고 천천히 다가왔다.
나를 앞에 앉혀두고 성교육이 시작되었다.
남자가 이렇게 속살을 보이는 것은 여자를 유혹하기에 충분하다고.
자신한테만 하는 것이면 상관없는데, 다른 사람한테 한다면 자신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고.
“네가 싫어하는 건 싫은데…”
“그렇지?”
“근데, 정말 싫어? 하는거?”
“좋지. 좋아. 근데 이런 곳에서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거야?”
“응.”
다행이었다. 차라리 내 몸을 내주며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오늘 하루동안 그녀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던 것이 맴돌았었는데, 한 번에 싹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