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2부. 마법학교
싫어.
─기기기긱
손톱으로 문을 긁어도 문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열어줘. 미안해.”
손톱이 떨어져 나갔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문을 긁었다.
이제는 철판을 긁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살갗에 문이 쓸렸다.
미안해.
거짓말해서. 열어줘. 이제는 거짓말 안 할게.
“응?”
문에 대고 간절하게 말해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 미안.”
문에 묻어있는 피를 옷으로 닦기 시작했다.
피 묻으면 예진이가 안 좋아할 테니까.
핏자국이 남지 않게 박박 다 닦고 나서 예진이를 불렀다.
“다 닦았어. 미안해. 응? 그러니까 열어주면 안 돼?”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예진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새벽 1시. 2시.
점점 어두워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앉아있었다.
계속 기다리면 언젠가는 앞에 있는 문이 열릴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가도문은 열리지 않았다.
밖에 해가 뜨기 시작하고, 내 얼굴을 비출 때마저도.
‘내가 싫어진 걸까.’
옷을 꺼내서 손 위에 얹어봐도 착용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지금 그녀의 방으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강간범? 아니면 성추행범?
모르겠다.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지금이라도 들어갈까 싶어도. 너무 두려웠다.
옷의 능력을 이용해 강제로 방에 들어간다면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오히려 더 싫어하면 어떡하지.
그렇기에 옷을 손 위에 얹어놓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해가 완전히 뜨고 수업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 문이 열렸다.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문이 열리고, 고개를 올려 문에서 나오는 사람을 쳐다봤다.
“예진아…!”
“하아…”
그녀의 한숨 소리 하나에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여기서 기다린 내 정성을 알아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예진이를 응시했다.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응?”
“잠시 시간을 가지자고 했잖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그러지 말아줘.”
“정말 정떨어진다. 내 말을 똑바로 들었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녀는 나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옷을 붙잡고 싶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맞아. 이랬으면 안 됐는데.
내가 왜 그랬지.
차라리 그녀의 말을 잘 들었으면. 그랬으면 달라졌을 텐데.
“미안해.”
그녀가 없는 곳에서 열심히 외쳐봤자 들어줄사람 한 명 없었다.
**
미안해.
이제 교실에 앉아있어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멍하니 교실 천장을 쳐다봐도 내 이마를 때려줄 사람도 없었고.
나에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줄 사람도 없었다.
예진이가 없는 삶은 진부했다.
“야.”
“야!”
“너 내말 무시하냐!”
옆에 들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밝은 얼굴로 돌아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를 돌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왜?”
미소를 지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지어지지 않았다.
“섬뜩하게 웃지 말고, 너 대련 상대 아직 없지? 나랑 하자.”
어제 만났던 에바가 나랑 대련하자고 다가왔다.
거절하려고 했지만, 좋은 생각이 났다.
“그래. 하자.”
알고 보면 에바의 잘못 아닐까?
그녀랑 얘기해서 예진이가 화냈으니까.
그녀를 죽도록 패면 용서해주지 않을까?
“그러면 교관한테 말한다?”
“응.”
그녀는 살짝 웃으며 교관을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예진이를 쳐다봤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예진이도 나를 쳐다보고 있어서 눈이 마주쳤을 텐데.
이제는 나한테 관심도 주지 않았다. 당장 달려가 대화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싫어하니까.
그렇지만, 그녀 옆에서 웃으며 떠들고 있는 사람에 대해 증오감이 피어났다.
‘어차피 죽을 것인데 신경 써서 뭐 하려는 거지.’
예진이는 내가 없다는 사실이 즐거운 건지 밝게웃고 있었다.
내가없는 것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던 걸까.
예진이의 표정을 보자니 그녀와 사귀면서 나 혼자만 즐겁게 살아갔던 것 같았다.
섹스도 나 혼자서만 좋아하던 게 아니었을까.
여자가 가짜 신음을 내면서 남자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는 소리도 들어본 적 있었다.
사실 예진이도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미안했다.
내가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내가 그녀에게 들었던 걱정은 망상이 아니었고, 현실이었다.
단지 내가 그 기회를 놓쳤을 뿐.
**
카야는 오늘도 칼을 갈러 에바의 방으로 놀러 왔다.
당연히 에바는 문을 열어 카야를 반겼고, 그녀는 늘앉던 자리를 찾아갔다.
“너 대련 상대는 정해졌어?”
“응.”
“진짜?”
카야는그녀의 대련 상대가 누굴지 궁금했다.
사교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에바가 누구랑 벌써 짝을 지었을까.
당연히 남는 사람이랑 하겠구나 싶었는데, 짝이 정해졌다니 다행이었다.
“그래서 누군데?”
“있어. 몰라도 돼.”
카야는적당히 무시하려다가 에바의 입가에 맺힌 미소를 보고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미소가 맺힐 때면 그녀는 늘 이상한 짓을 하곤 했다.
당연히 몇달 동안 봐왔기에 카야는 집요하게 물어봤다.
“응? 누군데?”
“됐어. 나중에 보게 될 거잖아.”
에바가 계속해서 말을 돌리자, 카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에바는 자신이 한 생각을 절대 꺾지 않으니까. 그래서 카야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생각해보니 저번에 말했던 일은 어떻게 됐어? 만들던 것도 다 만들었잖아.”
“응? 뭐가?”
“여기 주위에 펼쳐진 마법에 대해 알아본다며.”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만들었다고 자신한테 말하던 것이 생생했다.
이제 취약한 곳만 찾으면 된다면서 밖으로 나가는 것까지 기억에 남아있었다.
오늘은 그 일에 대해 말할줄 알았지만, 그녀가 말을 얼버무렸다.
카야는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마치 실험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으…응?”
그리고 당황한 것까지 이상했다.
성공했다면 이미 신나서 떠들었을 것이고, 실패했으면 그 실패한 원인을 분석하며 한참 열의를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너…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놀라는 것 보니까 분명히 있었네. 무슨 일이야?”
에바는 조금 조용히 있다가 말을 속사포로 뽑아냈다.
카야는 말을 들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가 실험하려는 도중 어떤 남자애가 다가와서 실험을 방해했고, 교관한테 신고한다고 협박해서 더 이상 실험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대충 이런 내용인가.’
“어이없지 않아? 지가 뭔데.”
“근데, 혹시 너 걔한테 대련 신청한 건 아니지?”
카야는실험을 방해했다는 남자애와 대련을 잡은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원한 관계를 대련에서 풀어내려는 것이 아닌지.
“어…?”
그리고 에바의 표정을 보니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맞구나?”
“어… 맞아. 아니 근데 걔가 먼저…”
“아… 아… 알겠어.”
뒤에 욕이 튀어나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대충 흘려들었다.
에바가 방에만 박혀 실험하는 것같이 보여도 상위권에 속했다.
카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남자애의 이름은 들어보기만 했다.
늘수업에서도 하위권에 박혀있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대련의 결과가 이미눈에 보였다.
실력 성장을 위한 대련이 아니라 누구 하나가 다칠 수도 있었다.
특히, 에바의 말을 보니 어딘가 한 곳 부러트려야직성이 풀릴 것처럼 보였다.
‘괜찮겠지…?’
교관도 있을 텐데, 누구 하나 다치기 전에 교관이 제지하지 않을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남자애도 시험을 통과해서 왔기에 자신도 따로 알리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
“헤헤…”
며칠째 잠을 자지 않았다.
첫날에는 정신이 조금 피폐해졌지만, 둘째 날부터는 정신이 오히려 맑아졌다.
예진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당장 에바의 순위가 어디인지 알기에 그녀를 이기면 다시 나를 바라봐줄 것이라 믿었다.
며칠간 두통이 계속되었다. 환각은 물론이고, 환청까지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예진이가 나를 다시 돌아보면 이 정신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으니까.
예진이는 나에게 시간을 달라했고, 아직까지 나한테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아마 나한테 실망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외쳐도 들리지 않을 테고.
당연히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었고.
“서로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대련합니다.”
““네.””
“죽여버려.”
에바와 나 동시에 대답했고, 나는 그녀를 보고 싱긋 웃었다.
전에 이상하게 웃던 것은 고쳤고, 다시 웃음을되찾았다.
오히려 지금 일이 풀리면 다시 예진이가 나를 되돌아볼 것이라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잘 부탁해.”
“응. 나도.”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예진이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때를 제외하고 인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착한 척을 해야 했다.
그래야지 죽도록 만들었을 때 실수라고 말할 수 있지.
관객을 두리번거리면 예진이를 찾자 그녀의 눈이 나를 향해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진이도 이 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마법을 제외하고 나머지 무기를 금합니다. 그러면 신호와 함께 시작하겠습니다.”
“죽여.”
─삐이익!
그 신호가 울리자마자 나는 준비했던 마법을 꺼냈다.
‘소설대로 하니까 되긴 하네.’
내 뒤에 수십 개의 마법이 그려졌고, 그녀의 뒤에는 고작 하나가 그려졌다.
“죽어.”
너만 없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