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2부. 설화(雪花)
“돼…됐다.”
“잠시만… 방금 뭘 한 거야.”
“끝이야. 이제 됐다고. 설화야!”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당장 유은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 갔다.
머릿속에 무언가가 풀어진 느낌이었고, 해방된 느낌이었다.
윤예진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를 끌어 안았고, 유은설은 내 이름을 크게 불렀다.
유은설은 잠을 자지 않았는지 눈 밑이 퀭해져 있었다.
“정신 차렸어? 이제 조금 기억이 나?”
“너… 무슨 짓을.”
“시끄러워.”
모든 일이 머릿속에서 정리되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유은설의 모습도 보였다.
검은 형상으로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아닌, 그녀의 온전한 모습.
유은설은 윤예진을 밀치고 나를 품었다.
내 말을 듣고 자기 생각대로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저리 가.”
유은설의 손길을 거부하고, 다시 예진이에게로 향했다.
“그래. 설화야 너는 나 없으면 안 되잖아.”
“왜…?”
“왜냐니, 설화도 나를 좋아하는 거지.”
예진이의 말도 맞았다.
“그래도… 내가 힘들 때 도와준 건 예진이니까. 상황이 어떻게 되었던…”
“그럴 리가 없잖아!”
유은설은 부정했지만,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예진이밖에 없었다.
이미 내 인간관계는 되돌릴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유은설한테도 심한 말을 했는데.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없는 셈 치자.’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나의 행동을 부정하는 말이었고, 제정신이 아닐 때 했던일도 내가 책임져야 했다.
제정신이 된 지금 사과하러 다녀야 했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언행들에 대해서 모두 사과해야 했다.
그렇게 된다면 내 주위에 남는 사람은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그녀마저 내친다면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겠지.
‘그건 싫으니까.’
그리고 내가 그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애초에 지금 감정은 분명히 ‘좋아함.’이었다.
내가 힘들 때 도와준 것도 그녀였고, 같이 지내면서 분명히 좋았으니까.
싫어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는데?”
“아니… 잠시만 설화야 기다려줘.”
“됐어. 내가 심한 말 한 건 미안해. 예진이랑 얘기 좀 하고 따로 찾아갈게.”
예진이는 기분이 좋은지실실 웃으며 대답했고, 유은설은 잠시 나보고 기다려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따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과할 일은 남아있을지라도.
그리고 우리 셋의 대화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설화야…”
“김세연?”
김세연은 어디서 등장한 건지 나한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이건…’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본 기억이 있었다. 그녀가 나한테 줬던 걸 내가 던졌던 기억이 있었다.
김세연이 준 종이를 천천히 넘겼다. 그 종이에는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녀가 나한테 이상한 암시를 건 것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짓을 해온 것들이.
끝까지 다 보고 나서 웃을 수 있었다.
“이게 뭐야?”
“하랑에 있는 애들한테서 들은 거야. 너 속고 있었어. 그러니까…”
“그런 거였어?”
미친 것처럼 웃자 다들 이상하게 나를 쳐다봤다.
당장 주위에 누가 없었지만, 무릎 꿇고 웃는 나를 보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거다.
“그런 거였어?”
“아니야…설화야 내 말 못 믿어?”
윤예진은 말하며 나한테 다가왔다.
“하하… 하하하하…”
다 윤예진이 짜놓은 것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윤예진의 말에 미세한 떨림이 나에게 불안감을 심어줬다.
맑아진 머리로 생각을 하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작위적인 상황도 여러 번 연출됐었고.
불안은 곧 의심이 되었고,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뒷담화를 한 것도 그녀가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확실했다.
윤예진의 눈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기 시작했고, 그것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나는 믿었는데. 그냥 내 정신 정도면 괜찮았어.”
“아니야… 설화야.”
“내 마음속에는 이제 너밖에 없거든.”
이미 내 마음속의 벽은 전보다 단단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지금이 훨씬 두꺼웠다.
윤예진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나를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내가 있는 곳보다 더 깊은 심연 속으로 나를 이끌었고, 그곳에 나를 가뒀다.
그 누구랑도 만나지 못하게.
제정신이 아닌 나는 그 제안에 응했고, 내 마음은 굳게 닫혔다. 이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한다.
윤예진이랑 평생을 함께 지낼 것 같았지만, 그녀는 허상의 존재였다. 내 마음속에 있는 윤예진은 이미 가루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거짓으로 내 마음속에 들어온 허상의 존재에게 눈이 팔려 실실 웃고 있었겠지.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
“그래? 그러면…”
“근데, 이제는 아니야.”
거짓말뿐인 답변에 너무 지쳤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했다면.
“죽이고 싶어?”
“푸흐흐…”
이제 이런 환청도 들리는구나.
“도와줄게.”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정신이 무너졌다고 해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니.
그냥 약이나 먹고 푹 자면 좋을 텐데. 오늘따라 수면제가 더 그리운 날이었다.
“설화야, 괜찮아?”
나한테 다가오는 유은설의 팔을 쳐냈다.
왜 자꾸 친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말을 해놓고 나를 좋게 봐줄 리 없는데.
“왜?”
그리고 나한테 다가오는 김세연도 쳐냈다.
이제는 그 누구도 믿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 똑같았다. 추악한 내면을 숨기고 나한테 접근할 뿐.
윤예진도. 김세연도. 유은설도.
다 똑같았다.
“손을 잡아. 도와줄게.”
“도와줄 거야?”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던.”
“그러면 나를 평생 재워줘.누구도 건들 수 없게.”
“해줄게. 대신.”
대신?
“사람 100명만 죽여.”
“응.”
“설화야, 진정해. 갑자기 왜 혼자 중얼거려. 네 잘못 아니야.”
부질없는 짓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보고 말하고 있었다.
“맞아. 내 잘못 아니야. 그러니까 이제 좀 자게.”
“잔다고?”
하늘에서는 눈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 분명히 올 날씨가 아닌데.”
흰색의 눈이 내려와 그녀의 손에 닿았고, 내 머리 위에도 내려앉았다.
검은색의 머리카락은 점점 흰색으로 물들어갔다.
“설화야, 나는 다 이해해. 저런 애랑은다르게. 아마 유은설도 똑같을 거야.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한테로 와. 우리가 보듬어 줄게.”
김세연은 나한테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도 별로 잠은 자지 못했는지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 이해해?”
“응.”
“네가 뭔데? 나에 대해 잘 알아?”
자꾸 이해한다고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너희가 대체 나한테 뭘 해줬는데?”
“그거야…”
“뭐기껏해야 몇 번 말이나 섞고, 실실 웃으며 돌아다닌 것뿐이겠지.”
“내 첫 기억은 남이 나에 대해 이야기 한 거야. 물론 좋은 쪽으로 말고.”
그 전의 행복한 기억들은 그 장면 하나로 모두 잊혀졌다. 몇십 년을 살아온 내 인생의 첫 기억은 그랬다.
“차라리 그랬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런 세상인 줄 알고 있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태어나자마자 죽는게 편했을 텐데.
“너희가 원하는 미소 한 번 지어줄까?”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쭉 내려갔고, 입꼬리는 쭉 올라갔다.
“좋아? 이런 미소 보니까? 근데 이제는 이것도 안할래.”
남한테 잘 보이는 것도 지쳤다. 그냥 편히 쉬고 싶었다.
부자연스러운 미소가 역겨워졌다. 그래서 버리기로 결정했다.
입꼬리와 눈꼬리를 다시 원상태로 되돌렸다.
나 자신이 너무 역겨웠다.
“힘들어… 이제 너무.”
다 놓아버리고 싶어.
남한테 입은 상처를 하나하나 꿰매는 것도 지쳤다. 상처로 인해 뻥 뚫린 구멍을 막는 것도 지쳤다.
그런 상처와 구멍을 치료하고 살았지만, 늘 불안함을 간직하고 다녔다. 불안함 때문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신경 썼다.
“잘 모르겠어. 이제 앞으로 벌어날 일도 다 기쁘지 않을 것 같아. 힘들어.”
“그렇지 않아. 미래는 아직모르잖아. 같이 행복하게…”
“아직도 그런 꿈에갇혀있는 거야?”
유은설의 말에는 확실성이 없었다.
이 세계는 어차피 멸망할 텐데. 애초에 내 개입으로 이미 이야기가 너무 많이 틀어졌다.
이것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 따위가 개입한다고 뭐가 변하긴 할까?
내가 지금까지 어떤 일을 해서 변한게 있긴 한가?
예지에 내가 나타난 거?
내가 몸을 사리면 마지막까지 살아있을 수는 있겠지. 그 모습이 예지에 비친 것 뿐이고.
“그러면 너는 뭘 했는데?”
“그거야…!”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녀가 한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교관한테 강간당할 때도.”
내가 가면을 쓴 상태로 너를 구할 때도.
“엘프한테 강간당할 뻔했을 때도.”
미로형 던전 때 너를 구할 때도.
“누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퍼트릴 때도.”
빌런에게 붙잡혀서 강간당했을 때도.
“넌 뭘 했는데?”
“나는… 나는…”
“응? 대답 좀 해봐.”
유은설은 대답하지 못하고 계속 말 끝을 흘렸다.
“맞다. 우리한테 마법을 가르쳐준 사람한테 몸을 팔기도 했어.”
“어…?”
“너한테 마법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가면을 쓴 상태로 너 때문에 칼에 찔리기도 했고.
“근데 너는 그때마다 뭘 했어?”
“……”
“윤예진이 나한테 그런 짓을 한 사이에 너는 뭘 하고 있었는데?”
“나도…!”
“그냥… 그냥… 날 가만히 뒀으면 안 됐어? 그러면 서로 행복했잖아. 차라리… 차라리 그때가 행복했는데.”
내 마음속은 나만의 왕국이었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왕국.
시간도 부술수 없는 그런 폐쇄적인 왕국이었다.
근데 전부 무너졌다.
이제는 폐허가 돼버린 성에 나 혼자만 남았다.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에. 쓸쓸하게.
마음속의 길을 걸을 때마다 밑으로 떨어졌다.
밑으로. 그 어떤 곳보다 아래로 끝없이. 추락했다.
이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나를 마주보기 싫어서 나를 피해 대피하고 있었다.
눈은 점점 세차게 내렸다. 추위도 같이 찾아왔지만, 너무 무감각해졌다.
손과 발이 시리지도 않았고, 내 눈은 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는 진절머리가 난다. 아픈 것도. 힘든 것도.
“잘 들었으면. 그냥 죽어줘.”
나와 그녀들 사이에 눈이 세차게 내렸다.
시야가 점점 흐려졌고, 눈으로 덮어져 갔다.
서로의 모습이 눈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옷을 입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