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2부. 설화(雪花) (Fin)
눈을 떴다. 어두웠던 시야에 밝은 빛이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자김세연과 유은설이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유은설의 몸에는 두 개의 창이 박혀 있었고, 김세연은 빌런들에게 제압당한 상태였다.
빌런들은 유은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섣불리 접근하지 않았다. 나 때문인가?
저 멀리 양쪽에서 공격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 내가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몇몇은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이미 그들 중에는 피를 엄청나게 쏟은 사람도 존재했다. 그러면서도 무기를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고 있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대체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가.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저기…”
나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빌런에게 얼음 창을 쏘아냈다.
무방비한 상태였는지 배에 구멍이 뚫려 즉사했다.
“시끄러…”
‘얼음 창?’
내가 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거지?
지금 느껴지는 감각도 이상했다. 서 있는 곳과 내가 연결된 느낌이 들었다. 내가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설화야!’
“윽…”
머릿속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다… 나가.”
그들은 나를 이상할 정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지만…”
“나가!”
내 주위로 얼음이 형성되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다.
한 명씩 천천히 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걔는 두고 가.”
왜지. 내가 왜 김세연을 구하려는 거지.
그들은 몇 번수신호를 주고받더니 김세연을 두고 문 밖으로 나갔다. 내가 손짓하자 문이 닫혔고, 이 방에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해.”
가슴에 남아있는 이 공허함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분명 자살했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난 거지?
부활에 대한 유물은 존재하지 않는데.
내 주위에 남아있는 두 명에게 해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절했는지 눈을 뜰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내 목소리를 들어줘.’
또. 이상한 목소리. 들어본적 없는 소리.
환청이라기엔 너무 생생한 목소리가 내 머리에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듣기 싫었다. 애초에 내가 어떻게 살아났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죽을 예정이었다.
주위에 피어난 꽃을 짓밟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으로 걸어갔다. 단검을 주워 내 목을 향해 겨눴다.
분명히 망설임 없이 내 목에 찌를 생각이었다. 심장에 찔렀던 것처럼.
왜. 왜 못 찌르겠지?
내 의지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에 다가갈수록 떨림은 심해졌고, 결국 단검을 내려놓았다.
─깡!
단검이 얼음에 닿았고, 쓰러져있는 김세연에게로 향했다.
누워있는 두 명 때문이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그러니까 둘을 죽이면 미련이 없어질 것이고,나도 죽을 수 있을 것이다.
‘혼자가 아니야.’
귀에 소리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단검을 들고김세연의 목을 겨눴다. 다시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혼자야. 누구도 내 주위에 없어.”
몇십 년을 길목에 혼자 서 있었다. 혼자서 앞을 바라봤고, 앞이 막혀 어디에도 가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 빌어먹을 목소리는.”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떠드는 거야.
‘내 말을 한 번만 믿어줘.’
“믿어?”
단검을 떨어트렸다. 누구 하나 죽이지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했다.
바닥에는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눈물?’
손을 들어 오른쪽 눈을 만졌다. 내 눈에는 분명히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았다.
아니 사실은 알고 싶지 않은 걸 수도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의 정체를.
지독하게 들었던, 하랑에 처음 왔을 때 들었던, 그 따뜻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를 향해 인사해줬던 사람.
‘안녕. 나는 김세연이야.’
‘설화야!’
매일 인사해줬던 사람. 따뜻하게 대해줬던 사람. 나를 찾아줬던 사람.
“잊을 리가 없잖아.”
나는 김세연을 들어 올려 꾹 끌어안았다.
내 울음은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등을 두드려도 눈을 뜨지 않았다.
“널 만나서 다행이었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목소리가 새었는지 이상한 쇳소리가 내 입에서 나왔다.
뒤를 돌아봤다. 늘 앞만 보고 있던 내 시선이 뒤로 향했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김세연과 유은설이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지 않았다. 이미 내 주위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했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외면했을 뿐.
초등학교 때 만난 소꿉친구도. 우리 부모님도. 대학교 때 만났던 친구들도.
이미 내 뒤에 와 있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던 왼쪽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크게 미소지었다.
‘이젠… 이젠 일어나줘.’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내가 아는 목소리. 내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목소리.
문을 열었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생도들과 교관들을 둘러싸고 있는 빌런들이 보였다.
다시 열린 문에 빌런들은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지은 성에서 나가기 위한 첫걸음.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니까.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이 꿈이라면.’
“네가 목표로 하는 것이 꿈이라면.”
머릿속에 들리는 유은설의 목소리와 겹쳤다.
‘내가 도와줄게.’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내가 못 본 척 하며 올라간 것도. 끝까지 외면했던 내 뒤에 있는 그림자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미안함을 전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제는 전하지 못할 세상에 있는 사람도 있었고, 살아있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똑바로 미안함을 전해야 했다. 적어도 지금 살아있는 사람에게라도.
유은설이 목표로 하는 것이 허황한 꿈이라면.
내가 그 꿈을 안고 달려줄게. 혼자가 아니니까.
성이 무너져 내렸다. 유은설과 김세연을 안은 채로 바닥에 내려앉았고. 둘을 살포시 바닥에 내려놨다.
두 걸음. 이제 세상에 내뻗은 걸음 수.
‘나도.’
‘멍청하고.’
“멍청하고.”
‘어리석고.’
“어리석고.”
‘우둔한 사람이야.’
“우둔한 사람이야.”
어쩌면 유은설보다 더.
빌런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생도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노려봤다.
그리고 빌런들을 향해 얼음 창을 만들어 던졌다. 이제야 자기편이 아닌 것을 알아차렸는지 나를 죽이려고 몰려들었다.
그들을 향해 얼음 창을 던졌지만, 쪽수가 너무 많았다. 전부 다 이쪽으로 몰려온 건지 죽여도 끝이 없었다.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사방에서 몰려온 적은 없었지만, 그때도 비슷했다.
죽여도 끝이 없는 적. 그때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을 뿐. 지금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활을 꺼내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애초에 활을 꺼낸다고 해도 이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을까.
손에서 끊임없이 얼음이 형성되었고, 형성되는 것과 동시에 적에게 날아갔다.
한계였다. 내가 근접전을 벌일 수도 없었고, 이미 옷의 능력은 모두 사용한 지 오래였다.
저번처럼 좁은 공간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이겨내야 하지?
‘포기해야 하는 거야?’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걸까.
그렇다면 나머지 둘이라도. 아니 나를 구하러 온 생도들만이라도 살릴 수 없는 걸까.
온 몸이 베이고, 피가 나오고있는 나에게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기억 속에 박혀있는 목소리일지도 모르는 소리가.
‘나는 무능력해.’
유은설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내 뒤를 갑자기 누가 껴안았다. 당연히 적인 줄 알고 공격하려 했지만, 고개를 돌려 정체를 확인하고 안심했다.
유은설은 배에서피를 흘리며 다가오며 나에게 검을 쥐여줬다.
“검?”
“꽉 쥐어.”
그리고 내 옆에 다가온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나를 꽉 안아주며 말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을까. 이 검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가 함께한 순간은 아직 남아있잖아.’
그 말을 듣고 유은설을돌아봤지만, 그녀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감은 채로 내 손을 부여잡고 있었다.
유은설을 보고 나도 눈을 감았다. 이제 얼음 창은 내 감각에 의존했다. 발소리 하나하나에 집중해 그곳으로 얼음 창을 꽂았다.
유은설과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처음 숲에서 쓰러져있는 그녀를 만났을 때. 병원에 데려다줬을 때. 치료실에서 만났을 때도.
다 기억에 남아있었다. 교관에게서 나를 구해줬을 때도. 내가 그녀를 멀리했을 때도.
빌런들의 침입 때있었던 일도 다 지나갔다. 몇 초도 지나가지 않은 순간에 모든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눈을 뜨자 내 손은 머리 위로 올라가 있었다. 유은설의 검이 높게 올라가 있었고, 밝게 빛났다.
유은설이 무엇을 하려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저번처럼 한 번에 적들을 베려는 생각인 것처럼 보였다.
‘힘이 부족해.’
당연히 될 리가 없었다. 그때는 기적이었다. 우연이 겹쳐 일어난 기적. 지금은 힘이 부족했다.
“할 수 있어.”
내 손을 잡은 사람이 한 명 더 늘었다. 옆을 돌아보자 생긋 웃어 보이는 김세연이 보였다.
그녀의 말을 듣고 어딘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무심코 상태창을 열었다.
달라진 점이 한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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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A]
[숙련도 A]
•성지: 주위에 영역을 선포한다. 영역 내의 선한 존재는 치유 효과를받고, 악한 존재에게 피해를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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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밑에 점이 생겼다. 아주 작은 점이었지만, 곧 점은 길고 곧은 선이 되었다.
선은 원이 되었고, 원은 넓게 퍼져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세 걸음. 넓게 퍼졌던 원이 나에게 다시 모여들었고, 그 안에 있는 힘은 성해포로 들어갔다.
성해포에서 나온 힘은 다시 검으로 들어갔고, 유은설의 검은 흰색으로 밝게 빛났다.
“뭐해! 막아!”
빌런들이 검을 보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태양보다 더 밝게.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검을 천천히 내렸다.
네 걸음. 발을 앞으로 디디며 검을 하늘과 수직으로 베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전혀 불가능해 보일 것 같은 일이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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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남은 빌런들은몇 없었다. 내 손을 부여잡고 있는 유은설과 김세연은 그대로 쓰러졌고, 그 둘을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가면을 착용했다.
투명화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니까.’
당장 맨정신으로 사람을 너무 많이 죽였다. 그녀들과 같이 있으면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내가 주위에 없는 것이 그들에게 좋지 않을까. 오히려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 멀어져 있어도 연결되어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그런 내 앞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나와 비슷한 가면을 쓴 사람.
내가 해맑게 인사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좀 숨겨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