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이 부임했다-1화 (1/60)

전남편이 부임했다 1화.

“우태주 씨. 아내에 관한 기억을 폐기하시겠습니까?”

“폐기하겠습니다.”

낮고 우직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아내에 대한 모든 기억이 우태주 씨 뇌 변연계에서 사라질 겁니다. 동의하십니까?”

“지워주십시오. 남김없이.”

“좋습니다. 그럼 강나정 씨?”

박사의 시선이 나정을 향해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남편에 대한 기억을 지우시겠습니까?”

“…….”

“강나정 씨. 지우시겠습니까?”

“…….”

강나정 씨?

번쩍. 눈을 뜨자 적막한 어둠이 가슴을 짓눌렀다. 경기하듯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킨 나정은 잘게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다. 또 그날의 꿈을 꿨다.

3년 전, 전남편과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어냈던 날.

그와의 결혼생활을 전부 없던 것으로 ‘리셋’ 했던 날의 꿈을.

“하아…….”

나직한 한숨이 터졌다. 꿈에서 전남편을 보게 되면 그날은 종일 일진이 사나웠다.

‘6시 58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나정은 훅, 한숨을 쉬며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

“오늘부터 호텔의 총책을 맡게 된 우태주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오마이갓, 지저스……!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눈앞의 남자를 보며, 하마터면 육성으로 비명을 내지를 뻔했다.

새벽에 그 꿈, 그 꿈이 어째 심상치가 않더라니!

극도의 충격과 공포로 대장이 꾸르륵, 꾸륵! 신호를 보내왔다.

‘악. 안 돼……!’

유니폼 차림의 나정이 재빨리 배를 움켜쥐었다. 파도치는 시선은 여전히 새로 부임한 상사에게 정박한 채.

‘어떻게 우태주가…….’

어떻게 내 전남편이 여기 있는 거냐고.

다리 힘이 풀려 재빨리 라운지 기둥을 한 손으로 지탱했다.

“스위스 본사에서 삼 년간 실무를 마치고, 우리 엘러퀀스 호텔 제주점으로 전출해 온 우태주 총지배인님께 다 같이, 박수!”

어지간히 잘 보이고 싶은 모양인지, 객실부 변 팀장의 목소리가 고무돼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그에 반해 새로 부임해온 상사의 대답은 짧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으윽……!’

나정이 꼬로록 울부짖는 하복부를 다시 강하게 내리눌렀다.

삼 년 전 합의하에 갈라선 전남편이 직속 상사로 부임해 올 줄이야.

지옥이 있다면 여길까?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며 점차 가까워지는 전남편을, 도르륵 눈알을 굴리며 바라봤다.

상대방을 제압하는 절도 있는 걸음걸이와, 선이 굵은 눈썹 아래 드리운 야릇한 눈빛,

거기다 벌어진 어깨 위로 달라붙은 외설스러운 셔츠 핏 까지.

“…….”

어쩜 저 사람은 모든 게 삼 년 전 그대로구나 싶어 나정의 눈빛이 출렁거렸다.

옛날과 달라진 게 있다면 딱 하나.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겠지.

“우 총지배인님께서는 앞으로 우리 호텔의 재무 및 전사적인 운영을 맡아주실 예정이며, 이례적으로 GRO 부서의 관리 감독 또한 자진해 맡아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자, 뭐하나 GRO팀. 박수!”

변 팀장의 말에 나정의 두 다리가 한 번 더 휘청거렸다.

그녀가 속한 GRO 부서는 오로지 VIP 고객만을 응대하는 호텔리어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그런데 누가 GRO팀을 관리 감독한다고?’

꼴깍 마른 침을 삼키며 전남편 태주를 눈으로 좇았다.

그간 GRO 부서를 이끌었던 권영아 팀장이 휴직계를 내는 바람에 당장 공석을 메워 줄 선임이 필요했던 건 맞지만, 무려 오늘 부임한 총지배인이 자진해서 총대를 멜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떡하니 나? 오늘 처음 본 남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은데.”

“칙칙하디칙칙한 우리 호텔에도 드디어 얼굴 맛집 냉미남 상사가 입성하는 건가?”

나정의 타는 속도 모르고, 호텔리어들은 연신 호들갑을 떨어댔다. 그녀들의 시선은 온통 태주에게 꽂혀 있었다.

‘어떡하지? 나 어떡해!’

앞으로 매일같이 한 공간에서 전남편과 부대끼며 지내야 한다고?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전남편에게 업무 보고를 하고, 마주 앉아 점심을 먹고?

초조함에 나정이 입술을 바르르 떨었을 때였다.

“우태주입니다.”

언제부터 앞에 와있었던 건지.

분명 저만치서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던 태주가 어느덧 눈앞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태주.

황금색 명찰에 각인된 이름이 날카롭게 시야에 박혔다.

“아…….”

예고 없이 눈앞을 점령한 그를 보며 나정은 무심코 숨을 참았다.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데 웬걸, 이마 위로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다.

심장이 어찌나 세차게 뛰는지 발바닥에서조차 쿵쿵,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강나정?”

일순, 나직한 음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나정이 떨리는 시선을 끌어올렸다.

태주는 자신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나정의 얼굴이 아닌, 가슴에 달린 명찰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강나정 씨. 앞으로 강 주임이라고 불러야겠군요.”

“아…… 아. 네.”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잘해봅시다.”

자주 보게 될 것 같은데. 그 살벌한 한마디가 위험 신호처럼 양쪽 귀를 애앵애앵 울려댔다.

숨이 턱 막힌 나정은 태주가 내민 오른손을 아연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푸른 핏줄이 야릇하게 불거진 손. 한참 만에 가까스로 그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전남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뭐지, 이 서늘함은?

뭔가 묘한 기운을 느낀 나정이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윽……!”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극심한 통증이 복부를 휘감았다.

나정은 무릎을 접으며 주저앉았고, 붙잡고 있던 전남편의 손이 얼결에 아래로 딸려 내려왔다.

“으으…….”

욱신한 아픔에 자동으로 신음이 터졌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나정 씨, 왜 그래?”

“강 주임님. 괜찮아요?”

난데없는 사태에 동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을 향했다.

“괜찮아요, 제가 긴장하면 그…… 배가 좀 아파서요.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어서…….”

나 왜 이래?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뭘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있는 거야?

그때였다. 별다른 동요 없이 나정을 내려다보던 태주가 붙잡혀있던 손을 홱 빼버렸다.

그 매정한 몸짓에선 부하직원을 향한 일말의 동정도 안쓰러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땀에 젖은 나정의 손과 맞닿은 제 손이 못내 불결했는지, 그는 살짝 이맛살을 구기기까지 했다.

“으윽, 으…….”

태주의 표정이 송곳처럼 저를 찌르는 것 같아서, 나정은 기어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데구루루 굴렀다는 표현이 더 적합했다.

엄마…… 나 죽어…….

“헐? 강 주임! 나정아!”

같은 팀 동료 보나의 외침이 멀리서 들려왔다. 나정은 짙은 신음을 터뜨리며 몸을 웅크렸다.

***

직원 휴게실. 탁 트인 통 창 너머로 맑게 갠 색달해변이 보였다.

얼마나 오랫동안 소파에 누워있었을까. 나정은 배에 얹어 둔 찜질팩을 하릴없이 만지작거렸다.

“…….”

배가 저미는 듯한 복통은 이제 잠잠해졌는데, 그 대신 눈을 깜박일 때마다 전남편의 얼굴이 밀려왔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불결하다는 듯 휙 손을 잡아빼던 모습이 눈앞을 어른거렸다.

“나정아. 강나정.”

멍하니 누워만 있는 나정이 답답했는지, 곁에 있던 보나가 불쑥 말을 건넸다.

“새로 부임한 총지배인 말이야. 너 아는 사람이지?”

“…….”

“혹시 삼 년 전에 헤어졌다던 전남편?”

“뭐?”

티 나게 표정 변화를 일으키자 보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보나는 3년간 같은 부서에서 동고동락해온 동료이자 친구로, 나정의 이혼 경력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일인이었다.

“너 술만 취하면 우태주, 우태주, 노래를 불렀잖아. 미친년처럼 울다 웃다 하면서. 그래서 아까 총지배인 이름 듣자마자 필이 오더라고. 네 얼빠진 표정도 그렇고…… 맞지? 네 전남편.”

악……. 입술 새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나정은 소파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보나야. 나 어쩌지? 이제 어떡해?”

“대박. 나정이 너 생각보다 남자 얼굴 되게 따지는구나. 네 전남편 무슨 모델 같더라.”

엉뚱한 데서 혀를 내두르던 보나가 곧 나정의 굳어진 표정을 살피더니 태세를 전환했다.

“어우 야! 뭘 그렇게 심각해! 뭐 상황이 좀 그렇기는 한데…… 어차피 그 사람은 네가 누군지 기억 못 할 거 아냐. 이혼할 때 널 기억에서 완전히 걷어냈다며?”

보나의 말이 날카롭게 귀에 꽂혔다. 나정은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나는 기억하잖아.”

“어……?”

“그 사람은 다 지웠겠지만. 난 아냐.”

우태주가 누군지. 누구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눈앞으로 3년 전 잔상이 아릿하게 지나갔다.

‘강나정 씨. 대답하세요. 기억을 지우시겠습니까?’

‘……’

‘강나정 씨?’

‘아뇨. 전 지우기 싫어요.’

‘…….’

‘제 남편에 대한 기억을 잃고 싶지 않아요.’

그날, 기억을 지우는 대신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끝까지 비겁해, 너란 여자.’

질린다는 듯 절 응시하던 전남편의 눈빛이 떠올랐다. 나정이 한 손으로 열 오른 이마를 덮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면 모를까. 보나야, 난 도저히 그 사람이랑 한 공간에서 태연히 웃고 떠들 자신이 없어. 우태주 그 사람이랑 나 4년을 같이 살았어. 한 집에서, 한 침대에서.”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고, 매일 밤 살을 섞었다고.

“한때 내 남편이었던 사람을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그때였다. 돌연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에, 나정은 말을 잇다 말고 흠칫 시선을 비틀었다.

“?!”

순간 눈이 마주친 건 한 손에 문고리를 쥔 채 서 있는 전남편 태주였다.

왠지 툭 발밑으로 떨어진 심장이 그대로 데구르르 전남편의 발 앞으로 굴러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설마 얘길 들은 건 아니지……?’

가는 침을 삼키며 전남편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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