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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2화 (2/60)

전남편이 부임했다 2화.

그 역시 아슬한 시선으로 나정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피식. 순간 전남편의 입가에 뜻 모를 비소가 걸렸다.

‘보나야, 난 도저히 그 사람이랑 한 공간에서 태연히 웃고 떠들 자신이 없어. 우태주 그 사람이랑 나, 4년을 같이 살았어. 한 집에서, 한 침대에서.’

설마 다 들은 건 아니겠지……? 긴장한 나정이 눈앞의 전남편을 응시했다.

왠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비릿한 조소를 머금는 듯 보였는데. 단순한 내 착각이었을까.

“강나정 씨.”

그때 낮고 두께감 있는 태주의 동굴 목소리가 제게 밀려왔다.

태주는 언제 그녈 비웃었냐는 듯 무색무취한 시선을 빛내고 있었다.

나정은 도리어 그 감흥 없는 시선에 살짝 안도했다. 다행히 전남편이 어쩌고, 저쩌고 했던 얘기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 저…….”

무슨 말이든 꺼내기 위해 나정이 다시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꾸르륵! 잠잠했던 배에서 보란 듯이 경보가 울려 퍼졌다. 꾸룩, 꾸루룩…….

그 소리를 잠자코 감상하던 태주가 곧 매정하게 입을 열었다.

“여기 누워있을 게 아니라 화장실에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네, 네?”

“장 트러블이 꽤 심각한 것 같은데.”

아…… 쪽팔려. 나정의 얼굴이 화륵 달아올랐다.

“이거 받아요.”

그때 태주가 그녀를 향해 자그마한 업무용 이어셋을 내밀었다.

“어…… 내 이어셋…….”

저게 언제 빠졌지? 나정은 재빨리 허전한 한쪽 귀를 매만졌다. 아까 라운지에서 쓰러졌을 때 떨군 건가.

“감사합니다…….”

멋쩍은 인사를 건네며 조심스레 이어셋을 집어 들었다. 순간 짧게 스친 전남편의 손이 무척 차가워서 나정은 몸을 움찔했다.

“본인 물건은 본인이 알아서 간수하도록 해요.”

칠칠맞게 흘리고 다니면 안 되지. 태주가 고압적인 표정으로 그렇게 덧붙였다.

방금 나더러 칠칠맞다고 한 거야……?

나정은 빠져나갈 틈 없이 촘촘한 전남편의 시선에 왠지 목이 탔다,

“죄송합니다.”

결국 한 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정이 속으로 울음을 삼켰다. 갓 부임한 전남편에게 제대로 찍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네?”

“좀 나아진 겁니까?”

“아…… 네. 괜찮습니다.”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태주는 잠깐 동안 말없이 눈을 빛냈다.

그 짧은 찰나, 나정은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전남편의 눈동자는 유달리 채도가 낮았다. 모든 기억을 지웠음에도 그 눈빛엔 여전히 어떤 감정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쉴 만큼 쉰 것 같은데 바로 업무 복귀합시다.”

곧 냉정한 한마디가 공간을 울렸다.

“네. 지금 바로 프론트 복귀하겠습니다.”

나정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태주는 몸을 돌려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용건은 그게 다라는 듯 가차 없는 모습이었다.

“와, 첫날부터 뭐가 저렇게 팍팍해? 네 전남편 진짜 더럽게 인간미 없다…….”

멀리서 몸을 사리고 있던 보나가 뒤늦게 구시렁거렸다.

나정은 전남편이 사라지고 없는 자리를 한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부임 첫날부터 저 남잔 부하직원들을 불도저처럼 몰아붙일 생각인가보다.

하긴. 일에 있어서만큼은 언제나 확실한 사람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규범과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 자신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이든지 간에 자비 없이 싹을 잘라버리는 냉혈한.

하지만 그런 태주에게도 단 하나, 예외가 있었다. 바로 하나뿐인 아내였다.

남에게 감정을 내보이는 것이 서툰 태주가 유일하게 풀어진 모습을 보이던 사람이 바로 나정이었다.

‘나정아.’

태주의 오래전 음성이, 함께했던 과거의 잔상들이 나정의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또 배 아프지.”

아기자기한 그릇과 커트러리가 가득한 신혼집 키친.

설거지를 하던 나정이 습관성 복통에 몸을 웅크리자, 등 뒤로 태주가 다가섰다.

“가서 눕자. 나머진 내가 할게.”

그가 두 손으로 자연스럽게 나정의 허리를 쥐었다.

“아냐. 싫어.”

나정은 단호한 표정으로 그를 밀어냈다.

“오늘 설거지는 내가 해. 자꾸 자기가 중간에서 가로채버리면 순서를 정하는 의미가 없잖아.”

흐르는 물에 샐러드 볼을 닦으며 나정은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요즘은 가정적인 남자를 넘어 가정부 같은 남자가 대세라는데, 그래도 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은 싫어.”

나름 소신 있게 발언을 이어가는데, 잠자코 듣던 남편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난 네가 아픈 게 싫어.”

그가 나정의 목덜미에 깊숙이 고개를 파묻었다.

꺅 간지러! 유독 목덜미가 쥐약이라 이미 저리 상체를 비틀어보지만, 그럴수록 새신랑은 더 짓궂게 나정의 목을 헤집었다.

“읏, 그만해 그만! 여보……!”

결국 나정이 먼저 백기를 들고 말았다.

“정 그러면 나 설거지하는 동안 여보는 그거 해줘.”

“응?”

“그거 있잖아. 나 배 아플 때마다 당신이 해주는 거.”

아. 남편이 이해했다는 듯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곤 한 손을 내려 내 배를 마사지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부드럽게 원을 그리면서.

남편 손은 약손. 저릿한 음성으로 태주가 읊조렸다. 조금 더 과감해진 손길은 배를 지나 나정의 다른 부분을 향해가고 있었다.

“나 이제 여기도 아픈 것 같아.”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휙, 돌아선 나정이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렸다.

그런 아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태주가 곧 입을 맞춰왔다. 처음 한 번은 짧게. 그다음은 아내의 목덜미를 당겨 깊숙하게.

벌어진 입 새로 차가운 숨결이 밀려 들어왔다.

달콤하면서 질척한 감촉에 나정은 움찔하며 남편의 한 팔을 붙들었다.

“나정아 이제 배 안 아프지.”

아내가 아까부터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간파했다.

태주는 기다란 손끝으로 아내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툭, 툭 끌렀다.

“우리끼리 있을 땐 이런 거 입지 마.”

빨리 벗길 수가 없잖아.

그가 헤쳐진 아내의 셔츠 안을 파고들며 말했다. 나정의 얼굴이 불시에 달아올랐다.

단추가 전부 벌어진 셔츠는 마치 허물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짓궂은 미소를 머금은 태주가 곧 나정을 번쩍 안아 들더니 그대로 침실로 향했다.

‘뭐야, 강나정! 지금 언제 적 일을 곱씹고 있는 거야……?’

멍하니 옛일을 회상하던 나정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정신 차리자. 양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전부 지나간 일이야…… 우태주 그 사람은 이제 날 알아보지도 못하잖아.’

***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또 뵙겠습니다. 고객님.”

엘러퀀스 호텔 21층. 이곳은 VVIP 고객 전용 라운지가 있는 곳이었다. 또한 나정과 같은 GRO 호텔리어들이 평상시 상주하는 곳이기도 했다.

막 오후 조 근무를 끝낸 나정은 초조한 걸음으로 복도를 내디뎠다. 한 손엔 핸드폰을 움켜쥔 채.

-에? 부서 이동요? 갑자기?

“내가 좀 급해서 그래. 부탁 좀 하자, 은영 씨.”

-뜬금없이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강 주임님?

“아냐. 그런 건 아니고…….”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어물어물 말끝을 흐렸다.

삼 년 전 갈라선 전 남편이 마침 우리 호텔 총지배인으로 부임했지 뭐야? 게다가 앞으로 GRO 부서를 ‘특별’ 관리감호 한다네. 그니까 나 부서 좀 옮겨주라. 안 그럼 나 그냥 제주도 앞바다에 빠져 죽을래, 죽을 거야. 하하하…….

나정은 차마 꺼내지 못한 말들을 다시 꼴깍 삼켰다.

-에이, 강 주임님 안 돼요. 우리 호텔 백 오피스는 자리 안 나기로 유명한 거 아시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내부채용 시즌도 아니고.

인사팀 동료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은영 씨, 나 그냥 아무 데나 꽂아주라. GRO 팀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아. 응? 판촉팀이나, 아니면 객실부 뭐 어디라도……,”

“야! 강 주임!”

그때였다. 객실부 변 팀장이 등 뒤에서 확, 어깨를 낚아챘다.

“여기서 뭐 해? 회식 안 가?”

“회식이요……?”

“우 총지배인 환영식! 아까 데스크에 알림 뜬 거 못 봤어?”

뭐? 저절로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GRO 팀은 절대 빠지지 말라는 특별 지시가 있었어. 자기 아까 첫 만남부터 찍혔잖아. 회식 가서 만회 좀 해.”

자 렛츠고! 변 팀장이 나정을 재촉했다.

이거 놔. 난 못 가. 나…… 나 그 사람 전 와이프라고……!

변 팀장 손에 붙들린 나정이 소리 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

“새로 오신 총지배인님을 위하여! 다 같이 먹고!”

“죽자!”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은 고급 이자카야 내부를 천천히 둘러봤다.

젊고 잘생긴 데다 유능하기까지 한 총지배인의 환영식이라 그런지, 평소 잘 참석하지 않던 얼굴들도 제법 보였다.

‘여긴 어디. 난 누구…….’

어떻게든 눈도장을 찍으려 안달이 난 직원들 틈에서 나정은 홀로 외딴 섬처럼 동떨어져 있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앞접시에 덜어진 차돌박이 숙주 볶음을 깨작거리는데, 옆에서 동료들이 꺅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태주 총지배인 말이야, 재경 그룹 외아들이란 소리가 있어. 재무팀 권형 씨가 그러더라.”

“재경 그룹? 말도 안 돼……. 그런 부자가 왜 굳이 우리 호텔에 와? 가만히 앉아서 아버지 회사나 물려받으면 될걸?”

“빽은 쓰기 싫다는 거지. 낙하산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저 도도함. 빛이 난다, 빛이 나.”

동료들의 말에 나정은 맥주를 꼴깍 들이켰다.

정말로 낙하산이 싫어서 재경 그룹 대신, 외국 체인의 엘러퀀스 호텔을 선택한 걸까?

문득 호랑이 같던 시어머니가 떠올랐다. 하루라도 빨리 그룹을 이어도 모자랄 판에 뜻을 굽히지 않는 아들이 얼마나 미우실지.

멀리, 전남편이 있는 테이블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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