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3화.
우연의 일치일까. 그 역시 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통으로 눈이 마주친 데 놀란 나정은 얼결에 그와 시선을 섞었다.
“…….”
왜인지 태주는 먼저 시선을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야릇한 정기를 발하는 눈동자는 제게 완전히 꽂혀 있었다.
나정은 묘한 긴장감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즈음 전남편의 시선이 그녀의 목선을 따라 좀 더 아래로 내려섰다.
“……?!”
적나라한 시선이 자신의 셔츠 앞섶에 와 닿았음을 느낀 순간, 나정은 얼굴을 붉혔다.
전남편 태주가 눈빛만으로 자신을 애무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벌어진 단추 속을 집요하게 파고들고, 헤집고, 입 맞추고…… 3년 전 그와 부부였던 때가 떠올라 나정은 질끈 눈을 감았다.
우태주, 설마 날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
제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는 태주가 불길했다.
아냐, 아닐 거야. 나정은 작게 되뇌었다.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태주는 그 여린 떨림을 눈여겨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 화장실이 어디죠……?”
전남편과 아슬한 눈맞춤 끝에 먼저 시선을 돌린 건 결국 나정이었다.
“저쪽으로 쭉 돌아가시면 나와요.”
직원이 술집 안 편을 가리켰다. 감사합니다. 나정은 어색한 인사를 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하필 전남편이 앉은 테이블을 지나쳐야 화장실이 나오는 구조여서, 나정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나 곧 태연한 척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전남편 태주는 더 이상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다. 태주의 시선은 아예 이쪽을 향해있지도 않았다.
그래, 아닐 거야. 날 기억할 리가 없어. 3년 전 저 사람은 모든 기억을 지웠어.
마음을 다잡으며 나정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새로 오신 총지배인님을 위하여!”
태주와 직원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챙! 맥주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은 애써 태연한 척 그들과 거리를 좁혔다.
“총지배인님, 아까부터 안주는 입도 대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부쟁이 변 팀장이 랍스터 버터구이를 조금 덜어 태주의 앞접시에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나정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연갈색의 눈동자가 출렁거렸다.
“한번 드셔 보십시오, 총지배인님. 입맛에 맞으실 겁……,”
“안 돼요!”
다음 순간,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확 튀어 나가고 말았다.
변 팀장과 태주의 사이를 파고든 나정은 랍스터구이가 담긴 앞접시를 다짜고짜 낚아챘다.
“뭐, 뭐야? 강 주임 왜 그래?”
난데없는 상황에 좌중이 음소거를 한 듯 조용해졌다.
모두가 얼떨떨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뿔싸. 나정은 한 손에 랍스터 접시를 든 채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아뇨, 그게…….”
대체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아니, 이건 생각에 앞서 몸이 먼저 튀어 나간 거였다.
전남편에게는 극심한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는 이 랍스터구이를 먹으면 안 됐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아는 척하면 안 됐지…….’
나정이 마른 침을 삼켰다.
“강 주임 취했어? 왜 난데없이 남의 앞접시를 낚아채고 그래?”
변 팀장이 테이블로 뛰어든 나정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핀잔했다.
나정은 의아해하는 직원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접시에 뭐가 들어간 것 같아서요. 드시면 안 될 것 같아서…….”
어설프게 둘러대며 손에 든 앞접시를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왜 저래? 동료들이 횡설수설하는 나정을 미심쩍게 바라봤다.
태주 역시 가늘게 휘어진 시선을 나정에게 고정한 상태였다.
‘내가 미쳐.’
고라니 새끼처럼 확 튀어나와 상사의 안주 접시를 인터셉트 하다니…….
“총지배인님, 접시 주십시오. 다시 떠드리겠습니다.”
“아뇨.”
전남편이 변 팀장의 호의를 거절하며 혀로 아랫입술을 축였다.
“어차피 알러지가 있어서요.”
나정에게 시선을 둔 채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묘하게 경직된 눈빛은 어쩐지 선득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취한 것 같은데 그만 자리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강 주임.”
곧 굵은 중저음이 공간을 울렸다. 태주의 명령에 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죄송합니다.”
“쯔쯧.”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는데, 변 팀장의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수를 따도 모자랄 판에. 너 벌써 투아웃이야. 그가 나정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안녕하십니까! GRO팀의 간보나, 살짝 늦었습니다!”
때마침 보나가 이자카야 안으로 들어서며,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물먹은 풀처럼 되살아났다.
나정은 재빨리 보나와 동료들을 향해 다가갔다.
“총지배인님,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
“총지배인님?”
변 팀장이 사케 병을 든 채 고개를 갸웃했다. 전남편은 대답 없이 눈앞의 랍스터 접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찍이서 그를 바라보던 나정은 곧 완전히 몸을 돌려세웠다.
***
“아, 속 쓰려…….”
다음 날.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숙취에 절로 눈이 떠졌다.
나정은 지끈대는 머리를 거머쥔 채 식탁에 앉았다.
“나정아. 이것 좀 마셔라.”
아버지 대석이 직접 간 과일 주스를 내밀었다.
“대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셨어. 생전 안 쓰던 월차까지 쓰고. 무슨 일 있니?”
“아냐.”
나정은 주스를 한 모금 들이켜며 별스럽지 않게 웃었다. 그러나 대석은 그녀의 조그만 변화에도 언제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삼 년 전 태주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이혼 도장을 찍더니,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들고 제주도로 저를 찾아온 딸이었다.
표정 없이 온종일 방에 갇혀 지내던 때에 비하면, 이제는 많이 밝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나정아. 들어가서 좀 더 쉬어라.”
“아냐. 나 갈 데가 있어서.”
대석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정이 빈 컵을 싱크대에 넣고는 자리를 떴다.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배우자의 외도. 그 밖의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이들이 기억을 제거하기 위해 찾는 곳. Memory loss organ.
“그러니까, 한번 지워진 기억은 절대 되돌아올 수 없다는 말씀이시죠?”
나정이 몇 년 만에 서울을 찾은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전남편의 기억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란 확답을 듣기 위해서.
초조해하는 나정을 보며 정원표 박사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PSTD 뇌 질환 연구소의 총책이자 3년 전 전남편 태주의 기억을 지운 장본인이었다.
“강나정 씨. 사람은 누구나 지우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우린 편두엽에 미세한 전류를 흘려 고객이 원하는 기억 일부를 제거합니다. 아시다시피 지금껏 side effect(*부작용)이 일어난 사례는 없었고요.”
정 박사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가 개발한 기억 소거술은 까다로운 수십 가지의 검사를 거쳐 적합 판정을 받은 사람에 한해서만 이루어졌다.
일단 검사를 통과하면 그땐 고가의 금액을 지불하고 원하는 기억을 도려낼 수 있었다. 3년 전 태주가 그러했듯이.
태주는 아내인 나정의 음색과 얼굴, 이름까지도 완전히 도려내기를 원했다.
“혹시 다시 마주치게 되면, 그 사람이 절 알아볼 수도 있을까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정 박사가 힘주어 말했다. 나정은 엄지손톱을 매만졌다.
“지금 그 말. 박사님의 전부를 걸고 확신하실 수 있나요? 책임지실 수 있어요?”
그건 꽤 무례한 발언이었지만 알면서도 입 밖에 냈다.
확인받고 싶었다. 전남편이 자신을 기억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우리 두 사람이 지나온 과거를, 악몽 같던 그날 밤의 일을. 전남편이 떠올리는 일은 없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그 사람은 제대로 무너지고 말 테니까.
“우리 연구팀의 커리어를 걸고 약속드리죠.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나정의 절박한 마음이 전해진 걸까. 정 박사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나정은 좀처럼 잠자리에 들지 못한 채 계속해서 뒤척였다.
눈앞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전남편을 피해 호텔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전남편 밑에서 구차하게 살아남든지.
“하…….”
달궈진 한숨이 입 새로 흘렀다.
괜찮아. 정 박사님이 그랬잖아. 날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괜찮을 거야.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이며 반대편으로 돌아누웠을 때였다.
화장대 구석에 놓인 반지 케이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나랑 결혼하자.’
왠지 전남편의 우직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내가 결혼반지를 버리지 않은 걸 알면, 그 사람 얼마나 치를 떨까.
3년 전 경멸에 찬 태주의 눈빛이 떠올라 나정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같은 시각, 침대 위의 태주는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쉰 소리 같은 신음을 터뜨릴 때마다, 그가 움켜쥔 시트 자락이 바스라지는 소리를 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당신을 두고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꿈에서 흐릿한 여자의 인영이 보였다.
‘내가 정말 미쳤었어. 미안해.’
‘하지만 나 아직 당신 사랑해…….’
사랑해, 하고 잦아드는 여자의 목소리. 그 음색에 태주의 가슴이 사무쳤다.
곧이어 그가 발작하듯 상체를 일으켰다.
하.
입술을 비집고 나온 아득한 한숨이 적막 속에 흩어졌다.
태주가 땀에 젖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헤집었다.
역시 또 그 꿈이었다. 항상 같은 구간에서 끊어지고 마는 꿈.
왜 매번 지독한 악몽으로 잠을 설치게 만드는지.
흑연색을 띤 눈동자가 가벼이 흔들렸다.
가슴에 저미는 어떤 감정.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이상한 감정이 들끓었다.
그가 목울대를 움직이며 긴 숨을 삼켰다. 그러곤 몸을 일으켜 침실을 벗어났다. 목이 타는 듯 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