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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5화 (5/60)

전남편이 부임했다 5화.

“네? 여, 열흘 정도…….”

파르르 떨며 대답하는 신입의 머리 위로 인간미 없는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이지윤 씨.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아요.”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

“해고라고. 당신.”

헐? 난데없는 해고 통보에 직원들이 크게 술렁였다. 나정 역시 거센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난 아마추어는 필요 없습니다.”

태주는 혼란 속에서도 가차 없는 언행을 이어갔다.

“GRO팀은 로열층에 머무는 VVIP만을 응대합니다. 즉 최상위층 고객에게 걸맞은 상품과 인적 서비스, 그들이 원하는 밸류포 머니를 언제나 일관되게 충족시켜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태주는 여러 방면에서 멀티 태스킹이 가능한 부하직원을 원하고 있었다.

“이 시간 이후로, GRO팀의 물갈이를 선언합니다.”

즉, 멀티가 안되는 무능한 직원들을 모두 내치겠다는 거였다.

물갈이……?! 나정을 비롯한 직원들의 입이 벌어졌다.

“쯧. 여기서도 한바탕 피바람이 불겠구만…….”

줄곧 사태를 방관하던 송준 팀장이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

호텔 로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나정은 전남편을 찾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물갈이라니, 물갈이라니?!

난데없이 그런 폭탄을 직원들한테 투하하고 휙 사라지면 다야?

조금 전 상황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전남편과 이런 일로 부딪친다는 게 껄끄러웠지만 그래도 GRO팀의 주임으로서, 할 말은 해야 했다.

동료들의 불만이 속출하는 이어셋을 귀에서 빼버린 후, 나정은 로비 중앙에 걸음을 세웠다.

라운지 직원이 일러준 대로 저 멀리, 전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

널찍이 벌어진 그의 등판을 보는데 사뭇 복잡한 기분이 밀려왔다.

내가 알던 우태주란 사람은 그렇게 무자비한 폭군이 아닌데.

내면은 정이 많고 다정한 남자였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도 눈이 마주친 건너편 아이에게 먼저 개구진 미소를 지어주던, 그런.

‘그런데 아까 그 모습은 꼭 이 호텔을 정복하러 온 악당 같았다고…….’

직원들한테 미움을 사도 상관없다는 거야? 나정은 왠지 답답해졌다.

“우태주 총지배인님!”

잠깐 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정이 목에 힘을 주고선 그를 불렀을 때였다.

“태주 씨.”

태주를 부르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은 로비 입구에 서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짧은 단발머리에 마른 체형. 쌍꺼풀 없이 긴 눈을 가진 여자. 단번에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노여진……?”

호텔 로비로 들어서는 여자를 보며 나정은 눈을 키웠다.

여진이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였던, 아니 친구란 말로는 부족했다. 여진과는 친자매보다 가까운 사이였다.

3년 전, 그 애가 모든 연락을 끊고 돌연 잠적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네가 여기 있어……? 나정은 일렁이는 눈으로 여진을 응시했다.

“여진……,”

“노여진.”

그때였다. 한발 앞서 여진을 부른 건 다름 아닌 전남편 태주였다.

나정은 흠칫 걸음을 세웠다.

“태주 씨 놀랐지? 나 올 줄 몰랐지?”

“어떻게 된 거야.”

“그냥. 서프라이즈.”

여진과 태주 사이에 얼마간 살가운 대화가 오갔다.

나정은 멀찍이서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기억을 지운 전남편이 어떻게 내 친구와 만남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마치 연인처럼 보이는 그 둘의 모습에 머리가 소란해졌다.

“……노여진.”

잠깐 망설인 끝에 나정은 먼저 여진을 불렀다.

두 손으로 태주의 셔츠 깃을 고쳐주던 여진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강나정?”

몇 초간 정적이 흐르더니, 그 애가 반가운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나정아!”

“아는 사이야?”

곁에 서 있던 태주가 무심히 물었다.

“응. 친구였어.”

친구였어. 여진의 말은 과거형이었다. 그녀가 태주와 몸을 밀착한 채로 나정을 돌아봤다.

***

호텔 라운지 카페.

식어버린 커피를 앞에 둔 채 두 여자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실은 너 여기서 일하는 거 알고 있었어.”

한참 만에 먼저 운을 뗀 건 여진이었다.

“태주 씨가 자기 커리어를 버리다시피 하고 선택한 호텔이 얼마나 대단한 덴지 궁금했거든. 그래서 알아보던 중에 우연히 네가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됐어.”

“…….”

“웃기지 않니? 악연이라는 게 정말 있나 봐. 서울도 아닌 제주도에서 너랑 태주 씨가 다시 만난 걸 보면.”

여진이 아인슈페너를 한 모금 입가로 기울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한참 침묵을 지키던 나정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자그마치 삼 년이야. 너 지난 삼 년간 연락 두절이었어. 내가 태주 씨랑 갈라서고 힘들어할 때, 제발 누구라도 옆에 있어 주길 바랐을 때…… 그때 너 말 한마디 없이 사라졌어. 꼭 기다렸다는 듯이. 대체 어떻게,”

“나 태주 씨 따라 스위스에 갔었어.”

냉담한 한마디가 면전에 와 박혔다.

“뭐? 무슨 소리야.”

나정이 되물었다. 여진은 일말의 동요 없이 차분한 표정이었다.

“나정아. 너 똑똑하고 사리 분별 정확한 애잖아. 제발 미련하게 굴지 마.”

“…….”

“내가 널 배신했다는 걸 모르겠니?”

그녀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늘 태주 씰 사랑했어. 나정이 네가 그 사람을 만나는 내내. 그 사람과 결혼생활을 이어가는 내내.”

여진이 가감 없이 속내를 까 보였다.

“네 이혼 소식을 듣고 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 그래서 무작정 태주 씰 쫓아갔어. 지난 삼 년간 타국에서 그 사람 옆을 지켰다고. 무슨 말인지 아니? 이제 그 남자, 네 게 아니란 소리야.”

“…….”

“나 지금 태주 씨랑 결혼 전제로 사귀고 있어.”

여진이 가죽 소파 등받이에 지그시 몸을 기대며 말했다.

“너…… 제정신으로 하는 얘기야?”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소리가 떨리고 말았다. 나정은 가까스로 표정을 추슬렀다.

“우태주 그 사람. 내 전남편이야. 그런데 사랑한다고? 사귀고 있다고? 그게 가능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총알처럼 공회전하며 나정을 관통했다. 단순한 배신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질척하고 아득한 감정이 자신을 짓눌렀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 너한테 별로 미안하지 않아.”

자신을 내리훑는 여진의 눈빛이 건조했다.

“애초에 태주 씰 버린 건 너야. 내가 뺏은 게 아니라고.”

남이 버린 걸 가진 게 죄가 되니?

여진의 한마디에 나정은 허탈해졌다.

“3년 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결국 그거야? 내가 버린 걸 가졌을 뿐이라고?”

“…….”

“나쁜 년.”

여진이 작게 코웃음 쳤다.

“너도 알다시피, 태주 씬 너에 대한 기억이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엮이지 않도록 행동 똑바로 해. 너 때문에 그 사람 두 번 상처받는 일 없게.”

“……걱정 마. 우태주 총지배인이랑 사적으로 엮이고 싶은 맘 추호도 없으니까.”

여진의 말을 받아치며 총지배인이라는 호칭에 힘을 주었다. 의식적으로 선을 긋는 거였다.

나도 너처럼 그 사람 기억이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 그러니까 안심해.

“더 할 얘기 없으면 먼저 일어날게.”

애써 덤덤한 얼굴로 나정이 몸을 일으켰다. 여진이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태주 씨가 널 알아보면 어쩌나. 솔직히 좀 걱정했었거든.”

“…….”

“근데 아까 태주 씨 표정을 보니까 알겠더라. 전혀 기억 못 한다는 거.”

“…….”

“하긴. 널 알아봤음 그대로 내버려 뒀을 리가 없지. 당장 시야에서 치워버리고도 남았을 사람이잖아.”

칼처럼 예리한 한마디가 등 뒤로 날아와 꽂혔다. 뜨거운 피가 등허리를 타고 콸콸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여진의 말이 아팠다. 나정이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대로 카페를 벗어났다.

***

지하 2층, 지상 17층 규모의 직원 숙소.

“…….”

침대에 모로 누운 나정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감았다.

룸메인 보나가 직원들끼리 급결성한 술자리에 가버려 집안은 평소보다 적막했다.

[나정아 진짜 안 올 거야? 여기 지금 분위기 살벌하다. 다들 우 총 욕하고 난리 났어.]

보나가 보낸 톡을 확인하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충격의 물갈이 선언 이후, 태주의 민심이 바닥을 치는 모양이었다.

‘물갈이도 물갈인데…….’

나정이 굳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갑작스런 여진의 등장으로 마음이 더욱 시끄러웠다.

‘난 늘 태주 씰 사랑했어.’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여진과 자신은 학창 시절 내내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사이였다.

J그룹의 금지옥엽 외동딸과, 평범한 과일가게 딸의 조합은 꽤나 신선한 것이어서, 두 소녀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떨어지기 싫어서 같은 대학을 지원할 정도로 한때 그 들의 우정은 각별했다.

그랬던 아이가, 전남편의 연인이 되어 돌아왔다고?

나정은 억지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머잖아 태주의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여진을 보며 부드럽게 입가를 끌어올리던 모습이.

분명 제게도 그렇게 웃어주던 때가 있었다.

“내가 다 망친 거야…….”

작게 읊조리며 나정은 감은 눈을 떨었다.

***

“에휴, 우리 불쌍한 막내. 어제 기어이 사직서 냈다며? 이 뒤숭숭한 분위기 어쩔 거야, 진짜.”

다음 날. 프론트를 지키던 보나가 동료들을 선동하며 투덜댔다.

“그냥 다 같이 우 총 방으로 쳐들어갈까? 가서 물갈이니, 뭐니 떠들어댄 주둥이를 다신 못 놀리게 만들어 주는 거야.”

“그래요. 이대로 있을 순 없어.”

불만을 제기하는 동료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나정은 그 옆에서 말없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제 해고 통보를 받은 팀 막내에게 톡을 보내봤지만, 끝내 돌아온 한마디는 ‘그냥 관둘래요. 우 총 무서워서 일 못하겠어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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