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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6화 (6/60)

전남편이 부임했다 6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나정은 결연한 얼굴로 프론트를 벗어났다.

“주임님, 어디 가세요?”

“……우 총 만나러.”

직원들을 등진 채 나정은 힘있게 걸음을 내디뎠다. 머릿속엔 전남편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시 후. 총지배인실이 위치한 30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갈라지는 문밖으로 내려선 나정이 짧게 숨을 골랐다. 이윽고 비서의 안내를 받아 Executive Office 앞에 걸음을 세웠다.

나정은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총지배인님. GRO팀 강나정입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들어와요.”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안에서 익숙한 중저음이 울려 퍼졌다.

나정은 철옹성 같은 문을 밀고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방 주인을 닮아 깔끔하고 모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은 입성과 동시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정은 손잡이를 당겨 다시 찰칵, 문을 닫았다. 그러자 밖에서는 더 이상 안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창마다 자동 블라인드가 내려가 있는 탓에 이곳이 완벽한 밀실처럼 느껴졌다.

“뭡니까, 할 말이?”

마호가니 책장을 등지고 앉은 전남편이 자신을 보지도 않고서 용건을 물었다.

“일단 좀 앉아도 될까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부하직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전남편의 태도에 살짝 오기가 발동한 터였다.

그제야 전남편의 고개가 위로 올라섰다.

“앉아요.”

그가 접객용 소파를 눈짓했다.

나정은 잠자코 소파 위에 몸을 앉혔다. 가죽 시트의 서늘한 감촉이 종아리를 스쳤다.

“어제 총지배인님께서 해고하신 이지윤 사원에 관한 얘기를 하려고 왔습니다.”

입술 새로 곧장 본론이 튀어 나갔다.

“저희 팀 막내의 부당한 해고를 철회해 주세요.”

멀리 앉은 전남편을 향해 분명한 소리로 말을 이었다.

전남편은 검지로 툭. 툭. 책상을 두드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관음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나정은 목 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위축되지 말자. 그녀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지윤 사원이 어제 실수를 한 건 맞지만, 아직 신입이고 그만한 시행착오는 누구나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다시 트레이닝 할,”

“기회?”

태주의 눈이 번득였다.

“말했을 텐데. 난 아마추어는 필요 없다고.”

돌아오는 인색한 대답에 나정은 다시 목소리를 냈다.

“이지윤 사원은 아직 사회초년생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잘 해내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해요. 총지배인님 같은 분은 이해 못 하시겠지만,”

“나 같은?”

그가 돌연 말을 잘랐다. 그러곤 자리에서 우람한 몸을 일으키더니 소파를 향해 다가왔다.

“내가 어떤데요?”

나정은 말없이 태주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얼굴 위로 태주의 그림자가 너울졌다.

“말해봐요. 강 주임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냐고. 나정은 순간적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우태주라는 사람은 이렇게 보고 있어도 숨이 멎게 그리운 사람이었다.

만질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코 손을 뻗어서는 안 되는 사람.

“제 눈에 비친 총지배인님은……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나정은 한참 만에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부하직원들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극단적인 말씀도 서슴지 않으시는데…… 전 그렇게 직원들을 몰아세우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총지배인님의 독단적인 면모가 자칫……,”

“독단적이다.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태주가 재미있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단 말이야.”

그러고는 나정이 앉은 소파의 양 사이드를 손으로 거머쥐며 상체를 낮췄다.

눈앞에 드리워진 태주의 얼굴을 보며 나정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툭, 소파 등받이에 등이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

태주는 가까이서 나정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풍겨 오는 달콤 쌉싸름한 체취 때문일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날 어떻게 해버릴 것 같은 저 눈빛 때문일까.

나정은 혼란한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웠다.

“강 주임. 어디서 나 본 적 없어요?”

다음 순간, 태주가 짙은 날숨을 섞어 말했다.

“난 왠지 강 주임이 낯이 익은데.”

입이라도 맞출 듯 가까운 거리. 그가 엄지로 나정의 뺨을 누르듯 쓸었다.

“이러지 마세요.”

나정은 그를 밀어내려 시도했다. 그러나 시도뿐이었다. 태주가 무력한 눈앞의 부하직원을 보며 비소를 머금었다.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어.”

“…….”

“당신이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이상하게 속이 뒤틀린단 말이지.”

못 견디게 화가 치밀어. 왜 그럴까.

그가 푸른 힘줄이 불거진 손으로 나정의 턱을 끌어올렸다.

자신을 가해하는 태주의 한마디 한마디에 나정은 숨도 쉬지 못한 채 눈을 떨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전남편을 보며 나정은 크게 동요했다.

이 남자가 정말 날 기억하고 있는 건가. 가슴이 아리게 뛰었다.

태주는 자신을 기억하면 안 됐다.

자신을 잊는 게 태주에겐 축복이었다. 태주와 함께한 시간은 나정에게 죄악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비켜주세요.”

애써 태연한 척, 눈앞의 태주를 향해 다시금 무력한 경고를 던졌다.

그러나 태주는 제게 기울인 몸을 움직일 줄 몰랐다.

“비켜주세요.”

나정은 한 번 더 단호히 말을 이었다. 그녀와 태주 사이에 아슬한 긴장감이 흘렀다.

“…….”

곧이어 표정을 푼 태주가 굽어진 상체를 바로 하며 제게서 물러났다.

얼굴에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히며 나정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곧 잘 갈린 칼처럼 예리한 한마디가 나정의 귓전을 울렸다.

“여기까지 찾아온 노력은 가상하지만, 난 이지윤 사원을 다시 팀에 복귀시킬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구태의연한 얘긴 집어치우고 그만 나가봐요.”

말을 마친 태주가 널찍한 등판을 보이며 돌아섰다.

“잠시만요 총지배인님. 제 얘기……,”

“못 들었나? 나가라고.”

태주의 서늘한 눈빛에 압도당한 나정이 소리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저 사람, 원래 저렇게 매몰찬 사람이었나.

자신이 보고 듣고 만져왔던 우태주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몇 년 사이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빛 없이 꺼진 눈빛과 고압적인 말투,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선득한 분위기까지. 이제는 정말로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세웠을 때였다.

등 뒤로 무미한 실소가 들려왔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돌아서는 자신을, 태주는 그런 식으로 조롱하고 있었다.

“…….”

잠깐 걸음을 세운 나정이 문을 열고 곧장 숨 막히는 공간을 빠져나갔다.

***

“나정아. 2014호 투숙객 공항 픽업이 언제였지?”

“…….”

“나정아?”

“어? 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 흠칫 고개를 들었다. 보나가 자신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왜 그래? 온종일 멍해서는.”

“그러게.”

어색하게 얼버무리며 곧장 흐트러진 자세를 정비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머릿속은 다시 전남편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사람, 아까 날 대하는 태도가 어딘가 달랐어. 정말 기억이 돌아온 건가.

가슴을 휘젓는 불안감에 나정은 무심코 손톱을 물었다.

‘어디서 나 본 적 없어요?’

‘난 왠지 강 주임이 낯이 익은데.’

어쩌면 전남편은 무의식중에 제게 익숙함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사냥감 앞에서 본능적으로 발톱을 세우는 포식자처럼, 한때 자신을 기만했던 날 볼 때마다 의지와 상관없이 기분이 곤두서는 것일지도.

‘아냐. 한번 지운 기억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잖아. 날 알아 봤을리가 없어.’

나정이 허리를 곧게 편 채 정면을 주시했다.

그러나 머잖아 다시 태주가 눈앞을 어른댔다.

태주의 차가운 표정이, 뜨겁던 눈빛이 차례로 제게 왔다가 갔다.

나정은 울렁거리는 가슴을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주임님! 큰일 났어요!”

그때 GRO 직원 하나가 프론트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왔다.

“어떡해요! 그, 그 별관 투숙객이요!”

“별관 투숙객?”

나정이 헉헉대는 후배의 어깨를 한 손으로 붙들었다.

“숨 고르고 천천히 얘기해봐. 별관 투숙객이면, 차현오 씨 말하는 거야?”

“네. 프레지덴셜 룸 차현오 씨요! 아무래도 그분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윽. 또 차현오 그 사람이야?”

보나가 옆에서 입을 삐죽였다. 나정은 후배를 향해 조금 더 다가섰다.

“정확히 무슨 일인데 보람 씨?”

“사실은 차현오 씨가 일주일째 방에서 나오질 않아요. 인기척도 전혀 없고요. 클리닝이나 룸서비스를 부른 적도 없고…….”

후배가 울상을 지었다.

“방에서 자살 시도라도 한 게 아닐까요……?”

“뭐? 보람 씨 말조심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왜요, 차현오 씨 연예인이잖아요. 한창 잘나가다가 그 사건 터지고 우리 호텔에서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는데…….”

죽을 만하죠, 뭐. 후배가 목소리를 낮추고 소곤댔다.

“차현오 씨랑 사귀던 영화배우 신지혜 있잖아요? 며칠 전에 10살 연상 사업가랑 결혼 발표했거든요. 혹시 그 충격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아닐까요……?”

“쉿!”

후배의 말을 자르며 나정은 미간을 좁혔다.

차현오는 서너 살짜리 아이도 얼굴을 알아볼 만큼 국민적 사랑을 받던 톱스타였다. 얼마 전 세간을 뒤흔든 정 재계 마약 스캔들에 연루되며 하루아침에 날개가 꺾이긴 했지만.

어쨌든 날개 잃은 톱스타는 몇 달째 호텔 별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진정한 돈 지랄이 뭔지 보여줄 태세로 온갖 초호화 서비스를 마음껏 누리고 소비하면서.

“자긴 여기 있어. 내가 한번 가볼게.”

쩔쩔매는 후배를 다독여주고 나정은 대신 프론트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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