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7화.
차현오가 묵고 있는 호텔 별관은 바다 절벽 위에 위치해 있었다.
이곳은 주로 은밀한 비즈니스 계약을 원하는 인사들, 혹은 방한한 해외 스타들이 머물다 가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나정은 빠른 걸음으로 야외 풀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아르누보풍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제주 색달해변의 푸른 정경이 등 뒤에서 넘실거렸다.
얼마 후 프레지덴셜 룸 앞에 멈춰선 나정은 문에 걸린 DND 팻말을 그윽이 노려보았다.
방해하지 마시오. 말 그대로 이 방은 고객의 허락 없이는 절대 출입이 불가능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거면……?’
장기투숙객인 차현오는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한동안 별관에 지인들을 끌어모아 광란의 파티를 벌이더니, 생각해보면 요즘은 이상하게 잠잠했던 것 같기도 하고.
잠시 망설인 끝에 나정은 마스터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문에 카드를 대자 철옹성 같은 입구가 철컥. 열렸다.
“……메이 아이 컴 인.”
허공에다 인사를 건넨 후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헉?’
다음 순간 눈앞의 펼쳐진 광경을 보며 나정은 눈을 의심해야 했다.
방 여섯 개와 욕실 세 개로 이루어진 객실 내부는 그야말로 개판 오브 개판이었다.
바닥을 나뒹구는 각국의 술병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들, 선혈처럼 침대 시트를 물들인 와인 얼룩까지.
하…… 이 사람 대체 뭐지?
“고객님. 어디 계세요?”
진짜로 죽은 건 아니죠?
구두 앞코로 양주병을 하나하나 밀어내며 나정은 계속 전진했다.
돔 형태의 높은 천장이 있는 방들을 지나, 당구장과 마스터룸, 프라이빗 바까지 차례로 둘러봤지만 어디서도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고, 고객님?!”
그냥 지나칠 뻔한 세 번째 욕실에서 다다라서야, 마침내 나정은 방 주인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는 맨몸에 샤워가운만을 걸친 채 욕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고객님, 괜찮으세요?!”
나정은 순간적으로 후배의 말을 떠올렸다.
‘차현오 씨가 일주일째 방에서 나오질 않아요. 인기척도 전혀 없고요.’
‘그분, 방에서 자살 시도라도 한 게 아닐까요……?’
안 돼! 나정은 재빨리 차현오 고객 옆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고객님! 정신 차리세요. 고객님! 차현오 씨……!”
축 늘어진 그의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는데, 돌연 커다란 손이 나정을 확 끌어당겼다.
“악!”
중심을 잃은 몸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동시에 야릇한 페로몬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살며시 눈을 뜬 나정은 그제야 자신이 차현오의 맨가슴팍 위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날 안은 거야……?’
자신의 밑에 깔린 차현오를 몇 초간 얼떨하게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은 줄 알았던 차현오도 나정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심해 밑바닥처럼 깊고 아슬한 눈빛으로.
“!”
정신이 든 나정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차현오는 강한 아귀힘으로 자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왜 이러세요, 고객님!”
결국 짧은 실랑이 끝에 나정이 차현오를 홱 밀쳐냈다.
“아야야…….”
제게 떠밀리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차현오가 나직이 앓는 소리를 냈다.
“아프잖아. 주임님.”
“저도 아파요, 고객님! 갑자기 그렇게 잡아당기시면 어떡해요?”
“미안, 미안.”
차현오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 비시시 웃었다.
술이 덜 깬 건지 그는 살짝 몽롱해 보였다. 열없이 식은 눈동자는 어딘가 횅했다.
‘극단적인 선택은 무슨. 그냥 평소처럼 술에 절어 있는 거였어.’
나정은 한 손으로 지끈대는 이마를 덮었다.
“혼자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잡아주라.”
그가 나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샤워 가운 앞섶이 벌어지며 단단한 대흉근이 드러났다.
나정은 눈 둘 곳을 찾아 얼른 고개를 돌렸다.
“봐도 돼. 어차피 보여지려고 만든 몸인데.”
차현오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기나 하세요.”
나정은 담담한 척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이어 부축을 받고 일어선 차현오는, 머잖아 다시 중심을 잃고 고꾸라졌다.
맥없이 처지는 그의 몸뚱이를 얼결에 떠안은 나정은 읏, 신음을 터뜨렸다.
성인 남자가 몸도 못 가눌 만큼 술을 마시다니.
왜 대중들이 그를 예쁜 쓰레기라고 부르는지 새삼 알 것 같달까.
“고객님.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입술 새로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고객 앞에서는 언제나 깍듯한 태도로 일관해야 했지만, 지난 몇 달간 끊임없이 사고를 일으킨 이 VVIP 고객에겐 말이 곱게 나가질 않았다.
“이래서 네가 좋드라. 가식이 없어서.”
차현오가 나정의 어깨 위에 한 팔을 두른 채 웃었다.
“사랑해, 주임님.”
작은 품안에 고개를 파묻으며 그가 실없이 읊조렸다.
‘콱 이대로 던져버릴까 보다…….’
꺾인 풀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차현오를 도저히 내팽개칠 수 없어 나정은 긴 숨을 삼켰다.
그때였다. 객실 밖이 소란해지더니, 이내 벌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임님!”
난데없는 외침에 차현오와 나정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곧 마스터 카드를 손에 쥔 GRO팀 후배가 시야에 잡혔다.
“보람 씨? 여긴 왜…….”
나정의 말이 애매한 지점에서 끊어졌다. 후배 옆에 서 있던 태주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우 총지배인님……?”
태주는 대답 없이 나정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나정에게 몸을 기댄 현오를 향해 움직였다.
객실로 들어서는 전남편을 보며 나정은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우태주가 여길 왜 왔지?
나정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로 GRO팀 후배를 쳐다봤다.
“아…… 제가 모시고 왔어요. 주임님이 하도 안 오셔서. 진짜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봐요…….”
GRO팀 후배가 우물쭈물 말했다. 객실 투숙객인 차현오가 무슨 사고를 쳤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윗선인 태주에게 SOS를 요청한 모양이었다.
나정은 전남편의 황금색 명찰을 바라봤다. 호텔 총책임자라는 의미의 G.M 표식이 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자신과 달리, 전남편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객실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괜찮은 겁니까?”
일순 태주의 입술이 열렸다. 괜찮냐는 말은 제게 한 것이 아니었다.
태주의 팍팍한 시선은 차현오를 향해있었다. 딱히 정말로 차현오가 걱정돼서 묻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괜찮냐는 말은 어딘가 비꼬는 것처럼 들렸다.
호텔에 장기투숙하며 쉼 없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 VVIP에 대해 태주 역시 들은 바가 있는 듯 했다.
“멋대로 문까지 따고 쳐들어와선 괜찮냐니.”
차현오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왜. 걱정돼요? 내가 이 방에서 목이라도 매달까 봐?”
그의 노골적인 언사에 나정은 움찔했다. 그러나 차현오와 대치하고 선 태주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그럼, 쉬십시오.”
태주가 짧게 말했다. 차현오가 멀쩡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됐다는 태도였다.
“갑시다.”
태주의 말에 옆을 지키던 GRO 후배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정은 그 광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아까부터 태주는 자신을 쳐다보지조차 않고 있었다.
나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 왠지 마음이 쓰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저 사람한테 난 이제 어떤 의미도 없는 타인일 뿐인데.
“그럼…… 저도 그만 가보겠습니다.”
나정이 표정을 추스르며 차현오에게 인사를 건넸다.
“너도 가려고?”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있어줘. 차현오가 나정의 손목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그의 손이 워낙 커서 나정의 손목은 한 줌 거리도 안 돼 보였다.
나정은 반사적으로 현오의 손을 쳐냈다.
그건 전남편 태주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정작 저 사람은 내게 관심조차 없는데.
“진짜 갈 거야?”
“…….”
“혼자 있기 싫은데.”
차현오가 다시금 애달픈 눈빛을 보내왔다.
저렇게 절절한 눈빛으로 같이 있자고 말하면 거절할 여자가 몇이나 될까.
나정은 잠깐 그런 생각을 하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고객님. 필요하시면 다른 컨시어지를 불러드리겠습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난 네가 필요해.”
차현오가 나정의 뺨을 향해 손등을 뻗었을 때였다.
누군가 중간에서 그의 손을 가볍게 제지했다.
태주였다.
“그만 나가봐요.”
“네……?”
“간보나 씨가 찾는 것 같던데.”
“아. 네.”
나정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빛이 오묘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정이 짧은 고개 인사 후 먼저 객실을 나섰다.
“주임님.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뒤에서 차현오의 알량한 한마디가 들려왔다.
나정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차현오가 아닌, 자신의 전남편과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아마도 보나는 자신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나정은 한 손으로 뜨거운 이마를 덮었다.
***
“아, 삭신이야. 대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나 몰라…….”
직원 숙소. 보나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뻣뻣한 어깨를 두드렸다.
“우 총이 어디서 우릴 감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나 좀 늙은 거 같지 않아?”
보나의 푸념에 나정은 대답 대신 10층 버튼을 눌렀다.
하루 종일 모든 직원들이 태주를 의식하며 살얼음판 위를 걸었지만, 정작 태주는 호텔의 내부 시스템을 돌아보느라 종일 모습를 비추지 않았다.
나정이 그를 본 건, 오늘 아침 현오의 객실에서 마주쳤을 때가 유일했다.
“우 총지배인 말이야. 재경 그룹 외아들이라서 그런가? 존재감이 남다르단 말이지. 뭔가 모럴리스한 그 눈빛. 마주치기만 해도 난 막 쫄리더라. 나정이 넌 같이 살 때 안 쫄리디?”
“글쎄. 너무 오래전 일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