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8화.
감흥 없이 대꾸하며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뒤따라 내린 보나는 자꾸만 우 총이 어쩌고저쩌고, 듣고 싶지 않은 TMI를 남발해댔다.
“어? 옆집 이사 오나 보네?”
듣다 못해 보나의 말을 막으려던 때였다. 옆집 앞에 켜켜이 쌓인 포장이사 짐이 시야에 들어왔다. 문이 활짝 열린 옆집에서 전에 없던 인기척이 들렸다.
“아까 아침에도 짐 들어오는 거 보긴 했는데. 누굴까? 법무팀 현섭 씨면 좋겠다.”
보나가 신나서 조잘거렸다.
“짐은 밖에 있는 게 단가?”
그때 옆집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연회부서 소송준 팀장이었다.
“어? 이게 누구야?”
송준 팀장이 보나와 나정을 보고 눈을 키웠다.
“안녕하세요, 우리 구면이죠? 여기 살아요? 옆집? 1004호?”
잇따른 질문 세례에 보나가 고개를 으쓱였다.
“뭐야? 그쪽이 이사 들어온 거였어요?”
“그쪽이라뇨. 편하게 소송준이라고 불러주세요.”
“소송중? 법적 싸움에 휘말리기 딱 좋은 이름이네?”
“중 아니고 준인데? 소송준.”
떨떠름해하는 보나를 향해 송준 팀장이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1003호 안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뭐 해, 안 들어오고.”
귀에 익은 중저음에 나정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입술이 열리며 반사적인 인사가 튀어 나갔다. 나정의 낯빛 위로 당혹감이 피어올랐다.
“이런 데서 보네요.”
뭐랄까. 나정과 달리 태주는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이런 데서 마주친 것이 우습지 않냐는 듯, 그가 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
전남편이 같은 호텔로 부임한 것도 모자라 이젠 옆집으로 이사까지 왔다.
대체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총지배인님…… 정말로 여기 사시려는 건 아니죠?”
아니라고 해줘요. 보나가 옆에서 하하, 웃으며 식은땀을 훔쳤다.
“…….”
반면 멘붕에 빠진 나정은 말을 잃은 채 전남편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남편이 왜 옆집에서 나와……?
나정이 머물고 있는 직원 숙소는 내부에 편의점, 휘트니스, 카페 등의 부대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어 직원들의 호평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제껏 호텔 총지배인이 입주한 적은 없었다.
분명 윗선에선 공들여 스카웃한 총지배인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줬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2인 1실인 직원 숙소를 고집했다고?
‘말도 안 돼…….’
혼란한 마음을 누르며 전남편을 바라봤다.
태주는 새하얀 와이셔츠 대신 몸에 편안하게 핏되는 니트를 걸치고 있었다. 왁스 끼 없이 내린 앞머리가 3년 전 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나정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원래 이 시간에 퇴근해요?”
그때 태주의 음성이 저를 파고들었다. 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번 주는 쭉 오후 조라서 늦게 끝나요.”
“그래요?”
태주는 짧게 호응했다. 호텔에서처럼 딱딱하게 날이 선 말투는 아니었다. 도리어 힘이 좀 풀어진 목소리.
“두 분 저녁 아직이면 우리랑 같이 먹을래요?”
갑자기 끼어든 송준 팀장이 화두를 돌렸다.
“내가 이사 온 기념으로 맛있는 파스타 만들어 줄게요.”
“호오. 그럴까요, 그럼?”
보나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릴 틈도 없이 1003호 안으로 들어섰다.
“너, 너 어디 가?”
나정은 재빨리 보나를 붙들었다. 그러자 몸을 기울인 보나가 은밀한 한마디를 속삭였다.
“나한테 우 총을 엿 먹일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일단 따라와.”
***
둘러앉은 대리석 식탁 위로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손사래까지 치며 사양했건만. 결국 보나에게 붙잡혀 이곳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전남편의 새로운 보금자리에.
“하하, 남자 둘뿐이라. 좀 썰렁하죠?”
주방에서 나온 송준 팀장이 식탁 위에 관자 오븐 구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만 가져오셔도 되는데. 진짜 배불러요.”
나정은 진심으로 그를 만류했다.
“와, 관자잖아? 송 팀장님 요리 잘하네요? 자주 와서 얻어먹어야겠다.”
“보나 씨가 와서 먹어주면 난 영광이지.”
송준 팀장이 보나를 향해 생긋 눈웃음을 쳤다.
타인에게 벽을 치는 태주와 달리, 그는 굉장히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대체 저 두 남자가 어쩌다 친해진 거지? 아니 친한 게 맞긴 해?’
힐긋, 맞은편에 앉은 전남편을 바라봤다.
일순 시선을 느낀 태주가 나정을 향해 고개를 움직였다.
“!”
흠칫한 나정은 자연히 시선을 돌렸다.
잠깐 눈만 마주쳐도 이렇게 동요하면서. 대체 어떻게 같이 일을 하겠다고.
전남편 앞에서 허둥대는 자신이 한없이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만 일어나자.”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쿡 보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나 보나는 전혀 자리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벌써 가? 송 팀장님, 우리 와인 한 잔 더 해요.”
“그럴까.”
송준 팀장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정은 초조한 눈초리로 식탁 위에 늘어선 와인 병을 바라봤다.
“나정아. 내가 겨우 밥이나 먹자고 여기 온 줄 알아?”
송준 팀장이 와인을 가지러 간 사이, 보나가 결연히 입을 열었다.
태주는 업무통화를 위해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나 이따가 술 취한 척 우 총 한 대 깔 거야.”
“뭐?”
“미친 척 들이받아 버릴 거라고. 물갈이니 뭐니 팀 분위기 흐린 복수는 해야지.”
“너 그래서 오자 그런 거야? 술 취한 척 들이받으려고?”
“엉.”
“미쳤어. 그게 무슨 복수야, 자폭이지. 얼른 일어나. 집에 가게.”
“왜. 나정이 너도 솔직히 우 총 재수 없잖아? 내가 오늘 네 전남편 아주, 읍!”
나정은 황급히 보나의 입을 막았다.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태주가 잠깐 이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자, 여세를 몰아 다들 한 잔 더?”
송준 팀장이 양손에 와인을 든 채 나타났다.
“꺄! 좋죠!”
말릴 새도 없이 보나가 와인을 연달아 들이켰다.
이제 나도 몰라. 나정은 폭주하는 친구의 모습에 어깨를 늘어뜨렸다.
“전요. 총지배인님이 진짜, 지인짜 맘에 안 들어요. 솔직히 재수 없다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잔뜩 취한 보나는 당장이라도 태주를 한 대 들이받을 기세였다.
“다들 내 말이 틀려? 우 총이 물갈이 선언하는 바람에 우리 분위기 개판 된 거 맞잖아!”
“얘가 왜 이래. 안 되겠다, 저희 진짜 가볼게요.”
몸을 일으킨 나정이 보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뭐야, 이거 놔! 나 아직 우 총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다음에 하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태주가 손안에서 와인 잔을 굴리며 무심히 뇌까렸다.
이성이 마비된 부하직원과 가타부타 입씨름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만취한 보나는 기어이 그의 면전에 손가락을 뻗었다.
“이 봐 우 총! 내가 이 말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당신 나정이한테 잘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정인 알아서 특별 대우하라고!”
보나가 폭탄 같은 말을 투하했다. 나정은 숨을 멈췄다.
“지금 날 더러 강 주임을 편애하라는 소립니까?”
태주가 마른 눈빛으로 되묻자 보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히 편애해야지. 나정이가 어떤 앤데. 당신 얘가 누군지 몰라?”
“알아야 하나?”
태주의 입가에 실소가 스쳤다. 바짝 약이 오른 보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당신이 한때 죽고 못 살던 여자. 강나정. 정말 기억 안 나?”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보나의 말에 태주가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파랗게 질린 나정을 바라봤다.
평소에는 귀엽게만 느껴지던 보나의 주사도 이 순간만큼은 너무 미웠다.
기어코 폭탄을 투척한 보나가 의기양양 태주와 대치했다.
“…….”
나정은 충격에 빠져 그들을 바라봤다. 온몸의 피가 발밑으로 쑥 꺼지는 기분이었다.
보나가 술에 취하면 입이 가벼워지는 건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제 전남편 앞에서 대형 사고를 칠 줄은 몰랐다.
“보나가 많이 취했나 봐요. 방금 한 얘긴 잊어주세요. 얘가 워낙 주사가 심해서요.”
“아…… 그래요.”
송준 팀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정말 오해하지 마세요, 간보나 사원이 술김에 헛소리한 거니까.”
나정은 거듭 해명했다. 태주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여있었다. 기민하고 날카로운 눈빛이 꼭 살갗을 파고드는 듯 했다.
“뭘 그렇게 긴장해요.”
머잖아 태주의 입가가 벌어졌다.
“안심해요. 간보나 씨가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안 쓰니까.”
그는 보나의 말을 단순 술주정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신경 쓸 가치 조자 없는 헛소리라고.
‘나랑 어떻게든 엮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왠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태주가 행여 자신을 기억할까 전전긍긍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 나 화장실…… 우웁!”
그때 보나가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내달렸다.
“내가 따라가 볼게요.”
송준 팀장이 나정을 대신해 보나의 뒤를 따라갔다.
우웩. 웩! 이윽고 화장실에서 적나라한 사운드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송준 팀장이 보나의 등을 두드리며 화장실 문을 닫았다.
“…….”
제발 이런 상황만은 오지 않길 빌었는데.
결국 전남편과 단둘이 남겨지고 말았다.
태주와 나정 사이에 얼마간 정적이 이어졌다. 침 넘기는 소리가 신경 쓰일 정도였다.
나정은 당장이라도 여길 벗어나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보나를 두고 갈 순 없었다.
“……죄송해요. 이사하시는데 멋대로 쳐들어오다시피 해서.”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문을 열었을 때였다.
“술은 좀 해요?”
굵직한 목소리가 얼굴로 훅 불어닥쳤다.
태주의 손에 와인 병이 들려 있었다. 나정은 고개를 저었다.
“잘 못 하는 편입니다.”
“그래요.”
“…….”
“결혼은, 했어요?”
다시 엉뚱한 질문이 날아왔다.
왜 그런 걸 묻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