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9화
술은 잘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하나같이 사적인 영역의 질문들이었다. 선 밖에 서있는 사람이 던져서는 안 될, 선을 넘는 질문들.
“……했었어요, 결혼. 지금은 헤어졌지만.”
한참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태연하려 했지만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태주가 그런 자신을 보며 얼핏 웃었다.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해요.”
농담인 듯 농담 같지 않은 한마디 후, 그가 나정의 와인 잔 위로 붉은 액체를 따랐다.
귀를 스치는 나른한 웃음소리에 나정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위험했다.
“저 아무래도 보나한테 가봐야겠어요.”
결국 핑계를 대며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가지 마요.”
뜻밖의 한마디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나정은 움직임을 멈췄다.
“가지 마.”
한 번 더 입술을 달싹인 태주가 몸을 일으켜 제게 다가왔다.
나정은 그의 입가에 언뜻 조소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발등에 못질이라도 한 것처럼. 태주와의 거리가 맥없이 가까워졌다.
대체 난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기억을 잃은 건 전남편인데, 어째서 내가 저 사람 손에 놀아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거야.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어요. 강 주임.”
순간, 정수리 위로 적나라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나정은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 그게 무슨,”
“알잖아. 무슨 뜻인지.”
우람한 몸이 나정을 향해 기울었다.
“강 주임. 우리 그만 솔직해집시다.”
“…….”
“난 불순한 의도로 내게 접근한 여자들을 질리도록 봐왔어요.”
그런 여자들이 어떤 식으로 표정을 감추는지 누구보다 잘 안다고.
태주가 알만하다는 듯 나정의 표정을 훑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위선 떨지 말고 원하는 걸 말해봐요. 내키면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태주는 의도적으로 플러팅을 걸며 나정을 떠보고 있었다.
나정이 얼마나 쉬운 여잔지, 마치 그런 식으로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
나정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당신에게 불순한 의도 같은 건 없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실은 떳떳하지 못했다.
태주가 부임한 날부터 줄곧 그를 선임으로 대하려 노력했지만, 때때로 혼란이 왔다.
태주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 흠칫 정신을 차렸던 적도 많았다.
눈치 빠른 전남편이 그런 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전 총지배인님께 다른 마음 없습니다.”
나정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붉어진 얼굴 위로 태주의 시선이 지그시 내려앉았다.
“차현오였나.”
일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그 별관 고객과는 사랑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주고받는 것 같던데.”
“…….”
“뒤탈 없이 즐기기엔 내가 더 낫지 않나, 강 주임?”
태주가 치기 어린 눈빛으로 나정의 뺨을 그러쥐었다. 그러곤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려 시도했다.
나정은 순간 태주를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뿐이었다.
이성이 마비된 듯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사실은 밀어내고 싶지 않아. 머리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안고 입 맞추고 싶어.
예전처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이 사람을 만지고 싶어.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들이 나정의 얼굴 위로 여실히 드러났다.
“이런데도 딴 마음이 없다고?”
순간, 코가 맞닿는 거리에서 태주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이윽고 그가 제게서 휙 떨어져 나갔다.
“미안해요. 내가 장난이 좀 과했어요.”
“…….”
“혹시 헛된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지.”
방금까지의 일을 장난이라는 한마디로 축약시켜 버리고는 태주가 옅게 웃었다. 그건 비웃음이었다.
나정은 조용히 그를 바라봤다. 가슴 안의 뜨겁던 어떤 것이 썰물처럼 쓸려나갔다.
신기했다. 이제 와 전남편에게 놀아나고 있는 자신이.
“나정아. 우리 와인 딱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그때, 보나가 송준 팀장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진짜로 따악 한 잔만 더 하자!”
“……너 지금 제정신 아니야. 나가자.”
나정은 가까스로 표정을 추슬렀다. 아니, 추스르려 노력했다.
태주의 시선은 아직 제게 고정돼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형식적인 인사 후 송준 팀장에게서 보나를 넘겨받았다. 나정은 그대로 현관을 향해 직행했다.
“아니이, 딱 한 잔만 더 하자니까?”
“가만히 좀 있어.”
보나와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정은 현관을 나섰다.
이윽고 쾅.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남은 두 남자의 귀를 울렸다.
“와…… 술주정 한번 어메이징하네. 내일이 없어 보이는 게 딱 내 스타일이야. 보나 씨랑 친해져야겠다.”
두 여자가 사라진 집안에서 송준이 장난스레 말했다. 반면에 태주는 묵묵부답이었다.
“…….”
그가 마른 시선으로 제 오른손을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거기 머무르던 강나정의 온기는 이미 날아간 후였다. 침을 삼키자 툭 불거진 목울대가 천천히 움직였다. 야릇한 기분에 어쩐지 갈증이 났다.
***
“우리 나정이! 불쌍한 강나정이……! 어떻게 하면 전남편이랑 한 직장에서 엮일 수가 있냐아!”
1004호.
나정이 삼십 분째 고성방가 중인 절친을 바라보다 침대 아래에 웅크려 앉았다.
하. 물밀듯 밀려드는 자괴감에 머리가 뜨거웠다.
태주의 얼굴이, 차가운 말들이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내가 누군지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아까 그런 행동을 한 거야.
나정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이대로 태주에게 흔들릴까 봐.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난 그럴 자격이 없는데.
“우리 불쌍한 나정이…… 대체 그런 냉혈한이랑 어떻게 한 집에서 살을 맞대고 산 거야…….”
침대 위에서 심란한 술주정이 들려왔다.
“그 사람, 나쁜 사람 아냐.”
나정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우태주는 누구보다 자상한 남편이었다. 하나를 주면 어김없이 열을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아무렇지 않게 내 손에 쥐여주던 사람.
“나 때문에 헤어진 거지. 우태주 그 사람은 잘못 없어.”
나정은 잠자코 시선을 끌어내렸다.
‘널 증오해.’
태주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잊고 지냈던 오래전 기억이 눈앞을 어른댔다.
‘널 증오해. 강나정.’
‘미안해. 용서해줘 태주 씨.’
미안하다는 말, 거듭 반복되는 그 말이 도리어 태주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다.
쥐고 있던 언더락 잔을 내려놓고 태주는 위태로운 몸을 일으켰다.
뒤로 보이는 벽엔 나정과 찍은 결혼사진이 걸려있었다.
‘강나정.’
코앞까지 다가선 태주가 짙은 날숨을 섞어 아내를 불렀다. 생기를 잃은 눈빛이 선득하게 빛났다.
‘그 자식이 그렇게 잘해?’
끓어오르는 배신감을 어쩌지 못하고 나정의 셔츠 앞섶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나정은 반항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딸려갔다. 그게 더 남편을 미치게 만드는 줄 모르고.
‘널 어떤 식으로 안지.’
‘…….’
‘이렇게, 아니면 이런 식으로……?’
태주가 나정의 몸 곳곳을 열 오른 입술로 지분거리며 물었다.
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서 있었다.
목덜미를 거듭 베어 무는 전남편의 입술이 뜨거웠다.
셔츠 속을 탐하는 손길이 이전과는 달리 무자비했다.
그러나 나정은 미동 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마치 이게 마지막인 것처럼.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나정이 묵묵부답일수록 태주는 더욱 안달을 냈다.
‘내가 그 자식보다 널 더 만족시키면 다시 돌아올래?’
‘태주 씨.’
‘말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거센 손아귀가 나정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절망과 배신감이 태주의 눈 안에서 출렁거렸다.
마네킹처럼 아무 반응 없이 서 있는 나정을 보고 있자니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날 밀어내.
그런 표정으로, 이게 끝이라는 듯이 쳐다보지 마.
‘미안해. 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주 씨 아내로 살아갈 자신이 없어.’
한참 만에 나정의 입이 열렸다.
‘웃기지 마.’
태주는 곧장 받아쳤다. 검은 동공이 거세게 흔들렸다.
지금 아내는 기어코 자신을 버리려는 것이다.
아니. 넌 그렇게 못 해.
그래선 안 돼.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제발.’
태주가 나정의 어깨 위로 무력한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정은 그가 숨죽여 울음을 삭히고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가지 마.’
아내의 어깨를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나정은 조용히 시선을 끌어내렸다.
‘태주 씨. 나 당신 친구랑 잤어.’
‘…….’
‘이런 날 용서할 수 있어?’
확인사살 하듯 남편의 얼굴에 잔인한 한마디를 던졌다. 그러곤 그의 손길을 매정하게 떼어냈다.
이윽고 나정이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한 이별을 직감한 태주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아래로 미끄러졌다.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
“으으. 머리야…….”
아침 내도록 보나는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게 나오지 말고 쉬라니까.”
보나와 함께 프론트를 지키던 나정은 걱정 반, 잔소리 반 충고를 이어갔다.
“이참에 술 좀 끊어. 네가 어제 얼마나 진상을 떨었는지 알아?”
“그만해. 안 그래도 머리 울려 죽겠는…… 헉, 우 총이다!”
보나가 프론트 아래로 홱 몸을 숨겼다.
“뭐 하는 거야? 일어나 얼른!”
나정은 재빨리 보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저 멀리 전남편의 인영이 보였다. 그는 비서와 다른 지원들을 대동한 채 걸어오고 있었다.
“간보나, 일어나라니까!”
“이거 놔, 난 도저히 맨정신으로 우 총을 볼 자신이 없어!”
@공금 갠소 굴리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