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10화.
보나가 자리에 주저앉은 채 구시렁댔다.
“어제 그렇게 주사를 부리고 내가 먼 낯짝으로 우 총 얼굴을 봐? 난 절대로……,”
“일어나죠.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헐? 낮게 내려앉는 동굴 목소리에 보나가 움찔하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조, 좋은 아침입니다, 총지배인님.”
“글쎄요.”
태주가 손에 든 패드에 사인을 하며 대꾸했다. 보나는 냅다 사과부터 건넸다.
“죄송합니다. 어제는 제가 본의 아니게 술이 과했……,”
“어젯밤 간보나 씨의 추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태주가 손에 든 패드를 비서에게 넘기고는 보나를 예의주시했다.
“세상 무서울 게 없는 패기와 무모함이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기까지 하던데요.”
“저 이제 물갈이 당하는 건가요……?”
긴장한 보나가 마른 침을 삼키며 물었다.
태주는 무심히 말을 이었다.
“안심해요. 호텔 밖에서 있었던 일을 굳이 안까지 끌고 들어올 생각은 없으니까.”
살았다! 보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나정은 그때까지도 보나의 옆자리를 말없이 지키고 있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머릿속으로 어젯밤 태주와의 일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허리를 움켜쥐던 손길이나, 제게 가까워지던 입술, 뜨거웠던 숨소리 같은 것들이.
그때, 돌연 태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움직였다.
“괜찮아요?”
“네……?”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나정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태주는 금세 제게 쏠린 관심을 거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태주도 어젯밤 일을 신경 쓰고 있을까?
아니. 그렇다기엔 전남편의 눈빛은 지나치게 무미했다.
“총지배인님, 금주 프로모션 건으로 연회팀과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지금 내려갑시다.”
태주가 비서와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곧 몸을 돌려 사라졌다.
나정은 제게서 멀어지는 넓은 등을 혼란한 눈으로 바라봤다.
“……확인해야겠어.”
“응? 뭘?”
난데없는 나정의 읊조림에 보나가 의아한 듯 눈을 빛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우태주 당신이 날 기억하고 있는 것 같거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할 거야.
이윽고 나정이 자세를 곧게 세우며 숨을 골랐다.
같은 시각,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른 태주는 자신의 핸드폰이 울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강나정. 그가 입안에서 나정의 이름을 천천히 굴려보았다.
문득 간밤의 일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허리를 움켜쥐자 흠칫하던 떨림이나, 입을 맞추려는 순간 필사적으로 저를 밀어내던 손길이 아직 생생했다.
신경이 곤두서는 듯 태주가 한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총지배인님.”
“…….”
“총지배인님. 전화가…….”
“아.”
비서의 말에 정신이 든 태주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부재중 전화 2통. 발신자는 여진이었다.
[태주 씨.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저녁 같이 먹자. 내가 호텔로 갈게.]
“…….”
묘연한 시선으로 메시지를 읽은 태주가 곧 벌어지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내려섰다.
***
“이게 뭐야……?”
21층 VVIP 라운지.
난데없는 저녁 식사 제안에 나정은 멍하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놀아주라. 밥 사줄게.]
이 인간이 어떻게 내 번호를 안 거지……? 차현오가 보내온 톡에 나정은 미간을 좁혔다.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정도로 그 사람과 내가 막역한 사이였던가.
‘절대 아니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얼른 차현오의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쉽게 물러설 인간이 아니었다.
“밥 먹자. 응?”
바다 절벽에 자리 잡은 호텔 별관.
따뜻한 야외 풀 안에 들어간 차현오가 양팔을 크로스한 채 나정을 올려다봤다.
“주임님. 해산물 좋아해? 아님 육식 파?”
“고객님.”
타월을 들고 온수 풀 밖에서 대기 중이던 나정은 계속되는 플러팅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제 번호는 대체 어떻게 아셨어요?”
그의 앞에 핸드폰 화면을 턱 하니 내보였다.
[놀아주라. 밥 사줄게.]
메시지를 보며 차현오가 픽 입가를 올렸다.
“그러게. 내가 주임님 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돈으로?”
“고객님…… 제발요.”
잇새로 자작한 한숨이 흘렀다. 이 골치 아픈 장기투숙객을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
“죄송하지만, 호텔 규정상 고객님과 사적인 연락을 주고받을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희 GRO 부서를 통해서……,”
“아, 싫어.”
현오가 한 손으로 가볍게 물을 튕기며 말했다. 눈빛이 더없이 장난스러웠다.
“넌 내 전담이잖아. 핸드폰 번호 정돈 공유해도 되는 거 아냐?”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희 규정상……,”
“GRO는 고객의 어떠한 요구도 거절하지 않는다. 고객의 원츠를 충족시키기 위해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도 한다. 고객이 왕이다. 내부규정에 그런 말은 없어?”
세상에, 기가 막혀. 나정은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차현오가 싱긋 웃었다.
“왕까진 안 바래. 그냥 편하게 애인처럼 대해줘요. 격 없이.”
“규정에 어긋납니다. 고객님.”
나정이 대놓고 선을 그었다.
“너무하네.”
차현오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반동을 이용해 온수 풀을 빠져나왔다.
물에 젖은 상반신이 햇빛에 반사되어 더욱 윤기가 흘렀다.
압도적인 덩치 차이에 나정은 자연히 반걸음 물러났다.
“애인처럼이 안 되면.”
그가 제게 밀착하듯 다가섰다.
“친구처럼은 가능한가?”
“……규정에 어긋납니다.”
나정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윽고 차현오가 품 안의 타월을 휙 집어가더니 머리를 털며 웃었다. 진짜 안 넘어오네.
“그럼. 필요한 게 있으시면 또 불러주십시오.”
나정이 형식적인 고개 인사를 던지고 돌아섰다.
사실 규정 어디에도 고객과 식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은 없었다.
도리어 GRO들은 업무 특성상 고객과 단둘이 밥을 먹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가령 공항에서 고객을 픽업했을 때라든지, 그들의 제주도 여행을 가이드 한다든지 하는 경우에 그랬다.
‘하지만 왠지 차현오한텐 틈을 보이면 안 될 것 같단 말이야…….’
차현오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었다.
단둘이 밥을 먹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나정이 가볍게 진저리를 치며 걸음을 내딛으려던 때였다.
“나 생일이야.”
예상치 못한 한마디에 멈칫, 걸음을 세웠다.
“그러니까 같이 밥 먹어주면 안 돼요?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고.”
차현오가 멋쩍은 듯 한 손으로 목덜미를 쥐었다.
돌연 수그러든 그의 태도에 나정은 빠르게 눈을 깜박거렸다.
***
퇴근 후, 나정은 호텔과 그리 머지않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보테니컬 컨셉의 레스토랑 내부는 초록의 싱그러운 오브제들이 가득했다.
‘그래, 이건 일의 연장일 뿐이야. 고객의 생일을 챙기는 건 gro의 당연한 의무니까.’
맞은편의 차현오를 보며 나정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저희 레스토랑에서 새롭게 출시한 메인 디쉬입니다. 바닷가재와 채끝등심, 헝가리 거위 간을 사용한 3종 스페셜 플래터입니다.”
머잖아 테이블 위에 요리가 세팅되었다. 설명을 마친 쉐프가 정중한 인사를 건넨 뒤 사라졌다.
근사하다……. 화려하게 플레이팅 된 음식을 보며 나정은 무심코 감탄했다.
“다행이네.”
나정의 표정을 읽은 차현오가 안도한 듯 웃었다. 이내 직접 자른 스테이크 조각을 그녀 접시에 올려주었다.
“억지로 끌고 온 것 같아서 좀 미안할 뻔했거든.”
멋쩍어하는 차현오를 보며, 왠지 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TV에서 볼 땐 늘 반짝반짝 빛이 나던 사람이었는데. 이런 날 같이 밥 먹어 줄 사람 하나 없는 처지가 짠하다고 해야 하나.
“고객님의 뜻깊은 날을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에요. 생일 축하드려요.”
나정의 말에 차현오가 눈가를 휘며 웃었다.
정말 애 같은 구석이 많은 사람이야. 금세 해사해진 그의 표정을 보며 나정 역시 제풀에 미소를 머금었을 때였다.
“예약하신 자리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돌연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비튼 나정이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하고 표정을 굳혔다.
“노여진?”
“……나정아.”
여진이 미간을 구기며 멈춰 섰다. 그녀의 옆에는 태주가 서 있었다.
“강 주임?”
무심히 툭 와 닿는 음성에 나정은 동요했다.
“…….”
뭔가를 더 말하려던 태주가 곧 차현오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차현오 또한 태주를 마주 봤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을만한 사이는 아닌지라, 두 남자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세상에. 이런 데서 널 만나네.”
그즈음 여진이 반갑게 다가왔다.
“애인이랑 같이 온 거니?”
차현오에게 힐긋 눈길을 주며 그녀가 물었다. 입가에 만연한 미소는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아니. 그런 사이 아냐.”
짧은 대답을 내놓은 후 나정은 입을 다물었다,
하필 여기서 노여진을 만날 줄이야. 길게 말을 섞어봐야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맛있게 먹고 가, 그럼.”
여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태주의 팔을 잡아끌었다.
“우리도 앉자 태주 씨.”
그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정은 다시 정면을 향해 몸을 돌리고 앉았다.
제게 와 닿는 전남편의 적나라한 시선이 느껴졌지만 끝내 돌아보지는 않았다.
레스토랑 안에는 가벼운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각기 다른 테이블에 앉은 나정과 태주는 서로를 등진 채 칼질을 하고 있었다.
새하얀 접시에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유난히 생생하게 들렸다.
‘자꾸 의식하지 말자. 그냥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야…….’
등 뒤의 전남편을 신경 쓰지 않으려 나정은 무던히 애를 썼다.
“무슨 생각해?”
맞은편에서 턱을 괴고 저를 관찰하던 차현오가 불쑥 말을 건넸다.
“아뇨. 아니에요.”
뜨끔해진 나정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참…… 이거 받으세요. 고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