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11화.
이윽고 테이블 위에 작은 쇼핑백이 올라왔다. 차현오가 의아한 듯 눈을 빛냈다.
“뭐야?”
“향수예요.”
나정은 멋쩍게 말했다.
“급하게 준비한 거라 어떨지 모르겠어요. 알아본 바로는 고객님 취미가 향수 수집이라고…….”
“주임님 내 프로필 뒤졌어?”
차현오가 자그마한 상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연하게 웃었다.
“고마워. 잘 쓸게.”
“향이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괜찮아.”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바꾸셔도 돼요.”
“싫어. 네가 준 거잖아.”
선물이 마음에 드는 걸까. 차현오의 입가가 묘하게 올라섰다.
“근데 주임님. 이런 건 원래 생일날 주고받아야 하는 거 아냐?”
“네……?”
난데없는 소리에 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생일이시잖아요?”
“그런가.”
“그런가라니, 지금 무슨……?”
“이거 먹어 봐.”
현오가 바닷가재 살점을 발라 나정의 접시에 올려주었다.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리는 그를 보며 나정은 눈썹을 올렸다.
“설마 거짓말하신 거예요? 오늘 아무 날 아닌 거죠……?”
하. 얼굴에 화륵 열이 올랐다.
차현오가 이런 식으로 GRO들을 골탕 먹이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냐만, 그래도 이건 심하잖아.
“고객님. 저한테 무슨 악감정 있으십니까? 자꾸 왜 이런 장난을 치세요?”
차현오가 대답 대신 샴페인을 따르며 웃었다.
“내가 주임님 좋아하거든. 그래서 관심받고 싶은가 보지.”
티끌처럼 가벼운 한마디가 차현오의 입술 사이로 불거졌을 때였다.
뒤 테이블에서 탁. 나이프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은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온몸의 감각이 등 뒤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듣지 않으려 해도 뒤 테이블의 대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왜 그래, 태주 씨?”
“아냐.”
여진의 물음에 태주는 짧게 대꾸했다. 그러곤 다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여진은 말없이 그런 태주의 표정을 살폈다. 뭐랄까. 태주는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사람 같았다. 묘하게 언짢아 보이기도 했다.
‘강나정 때문에?’
그럴 리 없어. 강나정은 태주에게 더 이상 어떤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저 그런 부하직원에 불과했다.
“여기 음식 별로다. 그치?”
여진의 물음에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자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여진이 미간을 좁혔다. 괜히 이곳을 예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태주가 미치도록 멀게 느껴졌다.
“이상해 태주 씨. 오늘따라 말도 없고…… 혹시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화났어?”
“아냐.”
“아닌데 표정이 왜 그래. 아까부터 정신은 딴 데 가 있고. 우리 오늘 얼마 만에 보는 건지 잊었어?”
여진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태주 씬 내가 꼭 이렇게 서운한 소릴 해야 돼? 왜 항상……,”
“여진아.”
태주가 여진의 말을 잘랐다.
“자꾸 선 넘지 마.”
“뭐……?”
“피곤해.”
태주에게서 돌아온 냉담한 반응에 여진은 입을 어물거렸다. 눈동자가 여실히 떨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정은 잠자코 고개를 끌어내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여진의 얼굴이 얼마나 붉어졌을지 알 수 있었다.
“고객님. 저 잠시 화장실 좀…….”
잠시 후 현오에게 양해를 구한 후 나정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진과 태주 사이에 오가는 긴밀한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였다.
***
소란해진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찾은 화장실은 고요했다.
후우…….
세면대 앞에서 나정은 몇 번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무의미한 주문을 얼마나 쉼 없이 되뇌었을까.
점차 기분이 안정되며 거울 속의 달아오른 낯빛도 본연의 색깔을 되찾았다.
“우태주가 이제 와 누굴 만나든 나랑은 상관없어…….”
잠시 후 나정이 결연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자신의 오른팔을 낚아챘다.
우태주……?
고개를 돌리자, 온기 없는 시선을 번득이는 전남편이 보였다.
나정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낮은 탁성이 한발 앞서 공간을 울렸다.
“이런 데서 고객과 단둘이 사적인 만남을 갖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태주가 거센 아귀힘으로 나정의 팔목을 죄었다. 나정은 그의 손을 밀어냈다.
“뭘 염려하시는지는 잘 알겠지만, 전 사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일순 태주의 눈 안에서 새파란 감정이 피어올랐다.
비좁은 통로에 마주 선 채, 둘은 몇 초간 서로의 숨소리를 공유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현오와 여진이 앉은 자리에서는 이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나정은 다시 해명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차현오 고객의 일정을 함께한 것뿐입니다. 저한텐 이 시간 또한 고객을 응대하는 업무의 일환일 뿐……,”
“부득이한 사정?”
태주가 팍팍한 눈빛으로 말을 가로챘다.
“어떤 사정인지 말해봐요. 들어줄 테니까.”
어째서 차현오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보라는 것이다.
태주의 태도는 어쩐지 지나치게 고압적이었다.
“제가 제 전담 고객과 함께 저녁을 먹는 게 문제가 되나요?”
나정은 분명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서 총지배인님과 제가 무슨 밀담이나 나누듯 얼굴을 맞대고 있는 게, 밖에 있을 애인분 눈에는 훨씬 더 불미스럽게 보일 것 같은데요.”
“누가 그래요? 애인이라고.”
“아닌가요?”
“알잖아. 아닌 거.”
태주가 자신을 벽으로 몰아세웠다.
“네. 알겠네요. 여진이랑 아무 사이 아니란 거.”
나정은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러곤 내내 참아왔던 한마디를 날숨에 실어 내던졌다.
“당신이 나한테 쭉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너무 잘 알겠어요.”
태주가 나정의 말을 받아치려다, 멈칫 입을 다물었다.
묘한 긴장감 속에서 나정은 다시 운을 뗐다.
“더 이상 눈치 싸움하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해요.”
“…….”
“당신 다 기억하잖아. 내가 누군지. 우리가 어떤 사이였는지.”
나정이 태주와 가감 없이 시선을 섞었다.
“나 피 말리려고 일부러 여기 제주도까지 내려온 거잖아. 아니에요?”
“무슨 소린지 알아듣게 얘기하지.”
전남편이 비릿한 음성으로 뇌까렸다.
“모르는 척하지 마. 시치미 그만 떼요.”
나정이 전남편과 팽팽히 맞섰다. 첨예한 시선이 한 데 뒤엉겼다.
“……아.”
아슬한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태주가 돌연 표정 변화를 일으켰다. 그의 입에서 알 만하다는 듯 낮은 탄성이 흘렀다.
“너도 결국 그 과였어?”
“뭐라고요?”
“내가 기억을 지웠다는 얘긴 누구한테 들었지?”
태주가 굳어진 음색으로 나정을 추궁했다.
“끊어진 기억을 빌미로 나한테 치대려는 모양인데, 포기해.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잖아.”
“무슨, 난 그런 게 아닌……,”
“아니면. 네 말대로 우리가 무슨 사이이기라도 했나?”
태주의 비아냥에 나정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결국 태주와의 사이를 발설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은 절대로…….
“사랑하던 사이였어요.”
애써 눌러왔던 한마디가 기어코 입 밖으로 떨어졌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너무 사랑해서 용서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당신은 날 기억에서 걷어냈어요.”
“…….”
“내가 당신 뒤통수를 거하게 쳤거든요.”
나정이 처연한 표정으로 태주를 올려다봤다.
태주 역시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훑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군.”
“…….”
“이렇게 영악한 구석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끝내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태주를 보며 나정은 목 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때였다.
눈앞으로 여진이 들이닥치는 게 보였다. 곧이어 짝!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나정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너 정신 나갔니? 지금 누구 앞에서 헛소릴 지껄이는 거야?”
나정이 붉어진 뺨을 거머쥐었다. 여진이 자신을 후려친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한 대로는 분노가 가시지 않았는지, 다시 그녀의 손이 올라갔다.
나정은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더 이상 귀를 찢는 마찰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대신 여진을 제지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주였다.
“따라와.”
허공에서 여진의 팔을 낚아챈 태주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거 놔! 여진이 발버둥을 치며 그에게 끌려갔다.
“…….”
나정은 제게서 멀어지는 두 사람을 붙잡지 않고 그저 바라봤다.
가슴 한편에서 뭔가가 무참히 허물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태주와 여진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하. 누르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미치겠다, 정말…….”
나정이 한 손으로 뜨거운 이마를 덮었다.
***
“이거 놔. 아파. 아프다니까?”
태주의 손에 붙잡혀 주차장을 가로지르던 여진이 그를 홱 뿌리쳤다.
비로소 정신이 든 태주가 그녀를 돌아봤다.
“태주 씨 정말 왜 이래? 우리가 왜 도망치고 있는 건데!”
“우리?”
우리라니. 그가 여진에게 다가섰다.
“말했잖아. 선 넘지 말라고.”
태주의 냉담한 눈빛, 무감정한 목소리에 여진은 움찔했다. 어떤지 참을 수 없이 불안해졌다.
“아까 강나정이 한 소리 말이야.”
돌아서는 태주를 붙잡기 위해 그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신경 쓰지 마. 나정이 걔, 원래 남자라면 물불 안 가리는 애야. 태주 씨도 봐서 알 거 아냐. 보통내기 아니라는 거. 돈 없는 홀아버지 손에 커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욕심이 남달랐어. 돈 많은 남자한테 정착하고 싶은 욕망도 큰 것 같고. 동창들 사이에선 여러모로 소문이 안 좋아. 그러니까 쓸데없이 걔한테 마음 쓰지 마. 남들이 우습게 생각해.”
여진의 입에서 노련한 거짓말들이 이어졌다. 아니 노련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여진의 거짓말은 그녀의 붉어진 낯빛만큼이나 필사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