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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12화 (12/60)

전남편이 부임했다 12화.

“한때 친구였던 앨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어서 나도 맘이 무거워. 그렇지만 나한텐 태주 씨가 먼저니까. 나정이…… 가까이하지 마. 속으로 감추고 있는 표정이 수십 개는 되는 애야.”

의미심장한 말을 태주의 면전에 내뱉었을 때였다.

“그 손버릇부터 고쳐.”

“뭐……?”

“강나정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야.”

아득한 태주의 목소리가 여진을 파고들었다.

“그런데 네가 내 직원한테 함부로 손을 대면, 내 꼴이 우스워지잖아?”

말을 마친 태주가 잠깐 동안 여진을 바라봤다. 얼음장 같은 시선이었다.

“……지금 우스워진 사람은, 태주 씨가 아니라 나야.”

여진이 자신을 버리고 돌아서는 태주를 향해 읊조렸다.

태주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여진은 가슴 한편이 욱신,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했다.

강나정에게는 태주와 연인 사이인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 알량한 거짓말이었다.

태주에게 자신은 여동생 같은 존재일 뿐, 여자는 아니었다.

삼 년 전, 기억을 지운 그를 쫓아 스위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통해 지금껏 그림자처럼 곁을 지켰다.

태주가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송두리째 사라진 기억에 몸부림칠 때마다, 그 옆을 지킨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태주는 늘 결정적인 순간에 저를 밀어냈다.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려 할 때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가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주제에. 또 강나정한테 끌리는 거야……?”

나한텐 기회조차 준 적 없으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당신을 가지려고 내가 삼 년 전에 무슨 짓까지 했는데.

“강나정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멀어지는 태주를 보며 여진이 선득하게 읊조렸다.

***

“우 총 말이야. 요새 이상하게 잠잠하지 않니?”

출근한 동료들이 락커룸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나정은 못 들은 척 옆에서 셔츠 단추를 채웠다.

“그러게. 물갈이니 뭐니 선전포고할 땐 언제고, 어째 조용하네. 그치 나정아?”

“어? 어.”

애매한 대답과 함께 짐짓 시선을 끌어내렸다.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태주와 노여진을 맞닥뜨린 후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호텔 로비나 라운지에서 스치듯 마주친 적은 있지만, 태주가 따로 자신을 호출한 적은 없었다. 대화를 나눈 적은 더더욱 없었고.

전 직원이 함께 모이는 브리핑 회의 때도 그는 제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일관적인 무시. 태주는 보란 듯 자신을 무시하고 있었다.

“뭐 해? 다 갈아입었으면 나가자.”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데 보나가 어깨를 툭툭 쳤다.

“먼저 가 있어.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보나가 라커실을 나간 뒤, 홀로 남은 나정은 아버지 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아빠. 나예요……. 아니, 일은 무슨. 그냥 전화해봤지.”

의자에 앉은 나정이 헛헛하게 웃었다. 핸드폰 너머에서 걱정에 잠긴 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호텔에 총지배인인가가 새로 왔다던데. 성격이 영 안 맞거나 그래?

“아빠가 그 사람 얘길 어디서 들었어? 아…… 보나한테? 응. 응 아냐. 나 괜찮아.”

대석의 걱정을 잠재우며 나정은 결심했다. 보나의 핸드폰에 저장된 아버지의 번호를 하루빨리 지워버려야겠다고.

“걘 뭐하러 쓸데없는 얘길했대…… 아냐, 총지배인님 꽤 괜찮은 분이야. 배울 점도 많고, 직원들한테도 자상하고…….”

그래도 보나가 태주의 정체를 완전히 까발리진 않은 모양이었다.

나정은 대석을 안심시키려 밝게 말을 이었다.

“걱정 말래도.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여직원들한테도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괜히 직원들 못살게 굴거나 하진 않고?

“응……. 아빠 나 끊어야겠다. 쉬는 날 같이 밥 먹어요. 응. 응.”

싱숭생숭한 마음을 들킬세라 나정은 서둘러 통화를 끝냈다.

괜히 전화했나 봐. 아빠 걱정할 텐데. 나정이 복잡한 생각을 떨치려 애쓰며 라커룸 출구로 향했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었을 때였다.

“어…….”

시야를 가로막은 사람은 태주였다.

“총지배인님이 왜 여기…….”

놀란 나정이 태주와 시선을 섞었다. 언제부터 문밖에 서 있었던 거지? 설마 통화하는 걸 다 들었나?

“…….”

태주는 당혹스러워하는 나정을 말없이 내려다볼 뿐이었다.

사흘만인가.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게. 나정은 왠지 생경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주 서 있는 태주가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왜 여기 계세요……?”

나정이 다시 한번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태주의 시선이 자신의 뺨에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며칠 전 여진에게 맞은 자리였다.

다행히 붓기는 금세 빠졌지만, 손톱에 긁힌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민망해진 나정이 손등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척하며 상처를 가렸다.

머잖아 태주의 시선이 제게서 떨어져 나갔다.

“…….”

“…….”

그리고 찾아온 침묵. 태주가 기다란 손끝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그 모습은 마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강 주임.”

한참 만에 저를 부르는가 싶더니 그 후로 태주는 다시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나정은 생소한 전남편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 먼저 말문을 열었다.

“혹시 저한테 괜찮냐는 말을 하러 오신 거면, 안 그러셔도 돼요.”

입술 사이로 담담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여진이와의 일은 저한테도 책임이 있으니까요. 걔가 보는 앞에서 총지배인님한테 하면 안 될 말을 했으니까.”

‘우리 사랑하던 사이였어요.’

나정의 눈앞으로 그날의 잔상이 지나갔다,

“솔직히. 맞을 만했죠.”

나정은 열없이 읊조렸다. 태주는 지그시 자신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제가 그날 총지배인님 앞에서 했던 말들, 추태, 전부 잊어주세요. 그리고 여진이 오해 잘 풀어주시고요. 저 때문에 여진이랑 총지배인님 관계가 틀어지는 걸 원하진 않거든요.”

“…….”

나정은 태주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끝으로 나정은 태주를 지나쳤다.

등 뒤에 남겨진 전남편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지만, 돌아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금 그를 돌아본다면 지신의 심란한 표정 역시 들키고 말 터였다.

***

“어우 짜증 나. 다들 오늘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거야.”

프론트로 들어선 GRO 직원 하나가 짜증 섞인 얼굴로 연신 손부채질을 해댔다.

“왜 그래?”

“왜겠니. 졸삼이 때문에 그러지.”

“헉, 졸삼이가 왜?”

“몰랐어? 오늘 아침에 졸삼이 스위트룸 체크인 했잖아.”

동료의 말에 보나가 입을 헛 벌렸다.

“나정아 들었어? 졸삼이가……!”

“어. 아침에 체크인했더라.”

나정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졸삼이.

‘졸부 3세’라는 말을 줄여 졸삼이로 일컬어지는 남자는, GRO들 사이에서 진상 오브 진상으로 통하는 VVIP 고객이었다.

“그래서…… 졸삼이 누가 맡을 거야……?”

“우리끼리 사다리 타기라도 해야 하나.”

GRO들이 티 나게 눈치싸움을 하며 말을 아꼈다.

그럴 만도 한 게, 졸삼이는 호텔에 묵을 때마다 학을 떼는 갑질로 GRO들을 괴롭히곤 했다.

여직원들의 몸을 훑는 변태적인 시선과 성적인 농담은 덤이었다.

“내가 컨시어지 할게.”

모두가 침묵하던 그때였다. 보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정이 손을 들었다.

안 그래도 태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하던 차였다. 이럴 땐 차라리 일에 치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

“그래서 이 호텔에 부대시설이 총 몇 개라고?”

비자나무가 우거진 호텔 산책로.

나정이 온몸에 명품을 휘감은 졸삼이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구두 굽 때문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지만, 졸삼이는 개의치 않고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예컨대 호텔의 컨시어지 서비스는 무엇이 있는지, 부대시설은 총 몇 개인지, 그 밖의 사사로운 질문들이었다.

“네, 고객님. 저희 호텔은 한식, 일식, 중식, 지중해식을 아우르는 9개의 레스토랑과, 13개의 연회장, 컨퍼런스 센터, 그 밖의 스파, 수영장, 피트니스, 명품 아케이드 등의 다양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똑같은 설명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졸삼이가 얼굴을 휙 디밀었다.

“근데 무슨 향수 써요?”

“네……?”

“향기가 좋아서.”

“필요하시면 프론트를 통해 구비해 놓을까요?”

“내가 여자 향수를 사서 뭐 해. 선물할 사람도 없고.”

졸삼이가 은근한 시선을 보내왔다. 나정은 모르는 척 설명을 이어갔다.

“GRO는 고객님의 편의를 위해 언제든 1대1 개별 컨시어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니까……,”

“일대일 개별 컨시어지? 일종의 개인비서라는 거네. 나만을 위한?”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나?”

졸삼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한대 콱 걷어 차주고 싶네, 진짜…….

나정이 본심을 누르며 다시 말을 이으려는 찰나였다.

멀리, 태주와 부하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중국 바이어와 미팅을 끝낸 직후여서인지 태주는 어딘가 좀 피곤해 보였다.

어.

일순 태주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살짝 놀란 나정은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렸다.

“개인비서니까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지?”

졸삼이가 그런 나정에게 다시금 치근덕거렸다. 나정은 목소리에 살짝 힘을 주었다.

“고객님.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밤에 호출하면 아가씨가 직접 방으로 오기도 하나요?”

뭐? 나정의 미간이 좁아졌다.

“저는 아가씨가 아니라 이 호텔 소속 GRO입니다. 직원들 앞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십시오.”

“예의? 아니 내가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지도 못하나? 어?”

졸삼이가 나정의 한쪽 어깨를 검지로 툭툭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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