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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13화 (13/60)

전남편이 부임했다 13화.

“이봐. 당신 GRO라며. 그거 나 같은 VIP한테 충성하라고 달아준 명찰 아냐? 근데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요, 예.의.가.”

아. 거센 손길에 떠밀린 나정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한 손으로 제 등을 안정감 있게 떠받쳤다.

놀란 나정이 고개를 돌렸다.

“일종의 개인비서는 맞는데, 그렇다고 네 비서는 아니고.”

자신의 등을 떠받친 사람은 차현오였다.

“강 주임은 내 전담이라서.”

그가 졸삼이를 향해 시니컬하게 지껄였다.

“고객님…….”

차현오의 난데없는 등장에 나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객님이 왜 여기 계세요?”

“나 산책 중이었는데.”

“고객님이요?”

차현오가 산책을? 몇 달 동안 별관에서 박쥐처럼 은둔하던 그 차현오가?

“해를 안 보고 사니까 사람이 우울해지더라고.”

뒤집어쓴 후드 모자를 벗으며 차현오가 짧게 웃었다.

“어……? 이 사람 그 연예인 아닌가?”

차현오를 알아본 졸삼이가 대뜸 목소리를 키웠다.

덕분에 주변의 이목이 현오에게 집중되었다.

“맞지? 마약인가 도박인가 터져서 한 방에 훅 간 걔! 와, 이런 데서 유명인사를 다 보네?”

졸삼이가 원색적인 조롱을 던졌다. 그럼에도 현오는 일말의 동요 없이 태연했다.

일면식조차 없는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거나, 원치 않는 관심을 받는 일엔 이미 익숙했다.

“왜. 사인이라도 하나 해주리?”

“뭐……?”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졸삼이가 주춤했다. 그 사이 현오가 나정을 향해 돌아섰다.

“주임님. 내 전담 아니었어? 그럼 나한테만 집중해. 굳이 이딴 인간한테 애쓰지 말고.”

“이딴 인간?”

발끈한 졸삼이가 현오를 향해 다가서려던 찰나였다.

“자기! 뭐 해! 자쿠지 가자며?”

가슴을 반절이나 훤히 드러낸 여자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하 참. 두고 봅시다, 강 주임. 응……?”

졸삼이가 붉으락푸르락한 면상을 들이미는가 싶더니 여자를 향해 홱 돌아섰다.

나정은 멀어지는 졸삼이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워낙 갑질에 특화된 인간이라 후환이 두렵긴 했지만, 어쨌거나 당장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고객님. 왜 자꾸 제 일에 끼어드세요.”

그리고 안도감이 물러간 자리엔, 언제나처럼 차현오에 대한 걱정과 염려가 들어섰다.

“앞으로는 남의 일에 절대 나서지 마세요. 물론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도와준 거 아닌데.”

현오의 짓궂은 대답에 나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쨌든…… 앞으로는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몸을 좀 사리시는 게 좋겠어요. 고객님 공인이시잖아요.”

“야.”

현오가 푸식 웃더니 나정에게 다가섰다. 돌연 엄지로 그녀의 뺨을 지그시 눌렀다.

“여기 흉지겠다.”

“…….”

“연고라도 좀 바르지.”

여진에게 맞은 자리를 그가 세심하게 살폈다.

‘정말 맛있네요.’

순간 현오의 눈앞으로 며칠 전 레스토랑에서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우태주가 레스토랑에 나타난 직후부터 티 나게 표정 관리를 못 하더니.

한참 만에 화장실에서 돌아온 나정은 누구한테 맞았는지 오른쪽 뺨이 부어올라 있었다.

그런데도 끝끝내 아무 일 없는 척, 자신과 식사에 임하던 나정의 모습은 현오의 뇌리에 선연히 각인돼 있었다.

“물어볼 게 많은데,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아. 너는.”

사연 많은 여자. 현오가 장난스레 읊조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를 마주 보던 나정의 눈자위가 가볍게 흔들렸다.

“…….”

태주는 멀찍이서 그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총지배인님.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옆에서 저를 종용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자리에 붙박여있던 태주가 곧 나정과 현오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버려요.”

이윽고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비서에게 던지듯 건네고는 걸음을 돌렸다.

“뭐야, 웬 약……?”

태주에게 건네받은 자그만 연고를 보며 비서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

“나 요즘 졸삼이 때문에 진짜 미쳐버리겠어! 대체 컴플레인을 하루에 몇 번씩 거는 거야! 그 자식 비위 맞추다 화병 날 것 같아!”

21층 VIP 라운지. 보나가 옆에서 걷던 나정을 붙잡아 세웠다.

“대체 졸삼이 그 자식 언제 체크아웃한대?”

“아마 다음 주까진 있을걸.”

“다음 주? 망했다…… 나도 나지만, 나정이 너 괜찮겠어?”

“뭐가?”

“뭐긴. 졸삼이가 요즘 집요하게 널 괴롭히잖아. 유독 너만 호출도 잦고?”

“그러려니 해야지, 뭐.”

별스럽지 않다는 듯 보나의 말을 넘겼지만, 사실 나정도 요 며칠 속내가 복잡하긴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 산책로에서 현오와 작은 언쟁이 있은 후, 졸삼이는 그 분풀이를 오롯이 제게 하고 있었다.

“강 주임님. 졸삼이…… 아니, 1003호 고객님이 또 호출하셨는데요…….”

“어. 지금 갈게.”

“아니 그 자식은 왜 너한테만 난리래?”

“그러게.”

짐짓 웃어 보인 후 걸음을 돌리는데, 등 뒤에서 보나의 의미심장한 외침이 들려왔다.

“조심해! 내가 볼 때 졸삼이 이 시끼, 조만간 사고 한 번 크게 치지 싶다.”

***

한 귀로 흘렸던 보나의 예언이 진짜로 현실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삼십 분 후, 졸삼이의 객실을 찾은 나정은 눈앞의 적나라한 상황에 말을 잃었다.

“강 주임님.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침대에 뭘 좀 쏟았거든.”

“…….”

“이리 와서 시트 좀 갈아줄래요?”

졸삼이가 침대에 걸터앉은 채 거북한 시선을 보냈다.

맨몸뚱이에 샤워 가운만 달랑 걸친 그를 보며 나정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며칠간 시도 때도 없는 갑질로 사람 혼을 쏙 빼놓은 졸삼이는 이제 넘어선 안 될 선까지 넘으려 하고 있었다.

“고객님. 시트 교체를 원하시면, 관련 부서에 턴다운 서비스를 요청해 놓겠습니다.”

“난 강 주임이 직접 교체해줬으면 좋겠는데?”

졸삼이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와서 좀 앉아봐요.”

“…….”

“앉아보라니까.”

졸삼이가 다시 제 옆자리를 고갯짓했다.

나정은 자리에 선 채 단호히 말했다.

“직원에게 모욕감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발언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뭐래. 난 그냥 잠깐 앉으라고 했을 뿐인데?”

역시나. 말이 통할 인간이 아니다. 나정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졸삼이에겐 그런 나정의 반응이 오히려 재밌는 것 같았다.

“강 주임님. 애인 있어요? 나랑 데이트할까?”

“…….”

“여자친구가 어제 일이 생겨서 서울로 먼저 올라갔그든. 그래서 뭐랄까. 내가 좀…… 적적해.”

침대에서 일어난 졸삼이가 슬리퍼를 끌며 다가왔다. 벌어진 샤워가운 틈새로 탄력 없는 가슴선이 드러났다.

나정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여차하면 방을 벗어날 생각에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강 주임님 피부가 되게 하얗다.”

“…….”

“적당히 그을리면 더 섹시할 것 같은데.”

뭐, 지금도 충분히 매력 있지만. 졸삼이가 한 손을 뻗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나정이 그의 손길을 쳐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엘러퀀스 호텔을 찾는 이 진상 고객은 매번 이런 식으로 여직원들을 불쾌하게 했다.

나정은 언제 한번 제게 걸려라, 하며 벼르고 있었다. 비록 그게 오늘일 줄은 몰랐지만.

“계속 이러시면 고객님을 성희롱으로 고발하겠습니다.”

“강 주임. 회 좋아해요? 같이 먹으러 갈까?”

졸삼이가 아랑곳없이 다시 손을 뻗어왔다.

회 같은 소리 하네. 나정의 눈빛이 매몰차게 굳어졌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고객님을 고객놈으로 부르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협조해주십시오.”

“뭐?”

순간 졸삼이의 미간이 어그러졌다.

“고객놈이라니, 네가 미쳤구나?”

졸삼이가 한 손을 허리에 짚고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우리 강 주임. 뭘 믿고 이렇게 막 나갈까? 아무도 몰래 숨겨둔 빽이라도 있어요? 아, 지난번에 그 딴따라? 차현오?”

“비켜서시죠.”

“말해봐요, 강 주임. 솔직히 걔랑 잤지? 어땠어? 연예인은 뭐가 좀 다른가?”

“경고했습니다. 비키라고.”

“이야, 일류 호텔 GRO가 고객이랑 막 사적으로 만나도 되는 거야?”

그런 거면 나한테도 기회를 한번 주든지. 엉……?

졸삼이가 나정에게 위압적으로 다가섰다.

“비키라 그랬지.”

내내 누르고 있던 분노가 한꺼번에 역류하는 순간이다.

나정이 어깨에 와 닿는 뜨끈한 손을 그대로 잡아채 반대로 꺾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익혀둔 호신술이 이렇게 빛을 발할 줄이야.

“야! 야, 놔봐! 야! 아악!”

팔이 반대로 꺾인 졸삼이가 객실이 떠나가라 오두방정을 떨었다.

나정은 이번 기회에 졸삼이를 완전히 처단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그의 희롱과 갑질에 놀아나는 직원이 없으려면, 누군가는 총대를 메야 했다.

“고객님에 대한 대우는 여기까집니다. 규정대로 퇴실 조치하겠습니다.”

나정이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이런 X년이! 감히 팔을 꺾어!?”

가까스로 나정에게서 벗어난 졸삼이가 격분한 듯 숨을 몰아쉬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어린 년에게 쪽을 팔리다니, 눈이 홀딱 뒤집혔다.

그가 나정이 호출하던 무전기를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너 잘 걸렸어. 오늘 내가 너 옷 벗긴다.”

그건 나정을 이 호텔에서 내쫓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워낙 변태적인 인간이라 의미조차 다르게 들렸다.

나정은 다시 무전기를 주우려고 했다. 그러나 졸삼이가 한 발 빨랐다.

그가 나정의 멱살을 거세게 움켜쥐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투둑, 유니폼 단추가 튿어지며 벌어진 셔츠 틈새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나정은 한 손으로 재빨리 셔츠를 여미려 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졸삼이는 다시 그녀를 떠밀었고, 중심을 잃은 나정의 몸이 제 키만 한 유리 조각상에 부딪히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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