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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14화 (14/60)

전남편이 부임했다 14화.

쨍강하고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산산이 깨진 유리 파편이 지면에 닿은 빗방울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어?

당황한 졸삼이가 바닥에 쓰러진 나정을 내려다봤다.

파편들 위로 가냘픈 몸뚱이가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으으. 나정이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지난 3년간 호텔에 머무르며 별별 사건 사고가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일진이 사납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리에 베인 팔이며 목덜미가 쓰라렸다. 피가 나는 건지, 목에서 기분 나쁜 열감이 느껴졌다.

안 되는데. 적어도 교대 시간까지는 버텨야 하는데.

이런 와중에도 일 걱정뿐이라니. 스스로를 어이없다고 생각하며 나정은 정신을 잃었다.

***

정신 차려요, 강 주임.

정신 차려.

강 주임.

“강나정……!”

가까스로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은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었다.

익숙한 향기. 안정감 있게 저를 떠받친 팔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나정은 희미하게 이름하나를 떠올렸다.

우태주……?

“가만있어.”

가쁜 걸음을 내딛던 태주가 품 안의 나정을 향해 말했다. 커다란 손이 내려와 나정의 벌어진 셔츠 틈새를 여며주었다.

꿈인가?

나정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나정아! 어떡해, 우리 나정이!”

보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태주의 뒤를 따랐다.

“나정이 죽은 거 아니야?”

“어유, 오버하지 마!”

보나와 동료들이 연이어 호들갑을 떨었다.

나정은 다시 스륵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전남편의 품이 편안하게 느껴진다면. 나 정말 미친 거겠지.

태주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녀는 감긴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파리한 몸뚱이는 의무실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백열등 빛에 눈이 부셨다.

“나정아. 좀 괜찮아? 정신이 들어?”

내내 곁을 지키던 보나가 화색을 띠며 물었다.

“괜찮아.”

침대에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키는데, 커다란 남성 재킷이 아래로 떨어졌다.

재킷에 달려있는 금장 명찰. 나정은 이 재킷의 주인이 태주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나 얼마나 누워있었니?”

“한 시간쯤. 그래도 많이 안 다쳐서 다행이야. 가벼운 절상이래.”

절상……. 나정이 한 손으로 목을 어루만졌다. 응급처치를 끝낸 목덜미에 손 한 뼘만 한 반창고가 달라붙어 있었다.

“하여간 졸삼이 이 치졸한 새끼. 너한테 무슨 해코지를 하려고 한 거야?”

“…….”

“그나마 내가 널 바로 데리러 갔으니 망정이지. 어우, 소름 끼쳐. 어쩐지 기분이 싸하더라고. 네 무전이 갑자기 중간에 끊어진 게……,”

말을 잇던 보나가 심상찮은 나정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정은 아까부터 손에 쥔 태주의 재킷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 그 옷…….”

“어떻게 된 거야?”

“실은, 내가 우 총한테 연락했어. 너 쓰러진 거 보고 순간 멘붕이 와서…… 일단 윗선에 알리긴 해야겠고…….”

“응.”

나정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눈치를 살피던 보나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너 다쳤다는 연락받고 우 총이 곧장 와줬어.”

“그랬구나.”

“어…… 근데 우 총 말이야. 너에 대한 기억이 진짜로 없는 거 맞아?”

“응?”

나정의 고개가 올라섰다. 보나는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머뭇댔다.

“아니, 아까 너 쓰러졌을 때 말이야. 우 총 눈빛이 좀 묘하더라고. 다른 직원은 너한테 손도 못 대게하고, 굳이 직접 안고 뛰질 않나.”

“…….”

“우 총이 그렇게 경황없는 모습은 처음 봐서…… 혹시 널 기억하는 게 아닌가 하고…….”

보나가 말끝을 흐렸다.

나정은 대꾸 없이 시선을 끌어내렸다.

‘가만있어.’

자신을 품에 안은 채 어르던 목소리. 튿어진 셔츠 위로 재킷을 덮어주던 손길. 그런 것들이

눈앞으로 해일처럼 밀려왔다. 태주의 목소리에, 눈빛에, 모든 것에 꼬르륵 잠겨 버릴 것 같았다.

“모르겠어 나도. 우태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정이 아득하게 뛰는 가슴을 짓누르며 읊조렸다.

***

“몇 번을 말해? 난 잘못 없다니까? 강나정 저 여자가 나한테 들이대고 혼자 쌩쇼한 거라고.”

집무실.

태주를 중심으로 왼쪽엔 졸삼이가, 오른쪽엔 나정과 보나가 앉아있었다.

“아니 나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놈인데 미쳤다고 호텔 여직원을 건드리겠습니까?”

졸삼이가 거만하게 지껄였다.

나정은 핏기없는 얼굴로 그와 대치하고 있었다. 쓰러지고 나서 미처 몸을 회복할 새도 없었다.

“강나정 저 여자가 자꾸 추근대길래, 난 그냥 장단 몇 번 맞춰준 게 다예요. 근데 난데없이 사람을 성추행범으로 몰더라니까. 그뿐인가? 되도 않는 협박질에, 자해쇼에, 금전 요구까지…….”

“야! 지금 누굴 꽃뱀 취급해?”

울컥한 보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졸삼이는 여유롭게 반대편으로 다리를 꼬았다.

“못 믿겠으면 CCTV 돌려보든가.”

“객실 내부에 CCTV가 어딨어? 댁도 그거 알고 나정이한테 독박 씌우는 거잖아!”

“보나야, 그만해.”

나정이 흥분한 보나를 다시 잡아 앉혔다.

졸삼이의 뻔뻔한 행보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지만, 여기서 같이 언성을 높여봤자 일만 더 커질 뿐이었다.

나정은 제 처지를 잘 알았다.

자신은 호텔에 소속된 수많은 인력 중 한 명일 뿐이지만, 졸삼이는 달랐다. 그는 호텔 임원들과도 줄이 닿아있는 최상위 리핏 게스트였다.

호텔에선 성추문을 일으킨 장본인보다, 성추문에 연루된 여직원을 내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그편이 훨씬 간단할 테니.

“풉.”

시끄러운 속내를 눈치챈 건지, 졸삼이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강 주임님 표정 대박이네. 이제 분위기 파악이 좀 돼요? 그러게 왜 쓸데없이 목소리를 내고 그래요. 봐. 괜히 시끄러워지기밖에 더해?”

노골적인 비아냥에 나정은 표정을 굳혔다.

그때였다. 태주의 입술 새로 틈이 벌어졌다.

“강나정 주임이 본인에게 금전 요구를 했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몇 번을 말해, 사실이라니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대놓고 쩐을 요구하더라고.”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자 방으로 찾아가 협박과 자해 쇼까지 감행했다?”

태주의 짙고 아슬한 시선이 졸삼이를 훑었다.

“본인의 말에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어, 어디까지?

뜨끔해진 졸삼이는, 그러나 소파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목소리가 작아지면 밀린다. 그는 더욱 빳빳이 고개를 쳐들었다.

“뭐가 됐든, 나 이번 일 그냥 안 넘어갑니다. 정식으로 징계 위원회 열고 강나정 저 여자 처리해요. 멀쩡한 사람을 성추행범으로 매도한 죗값은 치러야지.”

“매도를 하긴 누가!”

화가 난 보나가 또 다시 스프링처럼 솟아올랐다.

“총지배인님, 설마 저 자식 말을 믿으시는 건 아니죠?”

“…….”

“총지배인님!”

보나가 대답 없는 태주를 채근했다.

“나정인 정말 결백해요! 오히려 피해자라고요!”

“그러니까 CCTV 까보래도?”

“저 자식이 자꾸 있지도 않은 CCTV 타령이야! 너 같은 놈 때문에 우리가 카메라 없는 사각지대를 기피하는 거야!”

아 혈압이야. 보나가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호흡을 추슬렀을 때였다.

“무의미한 입씨름은 그만하죠.”

태주의 날카로운 시선이 보나와 나정을 향해 움직였다.

“두 사람은 그만 나가봐요.”

“네? 하지만,”

“못 들었나? 나가라고.”

일방적인 명령에 보나가 미간을 좁혔다. 우 총 저 인간, 설마 졸삼이 편에 서는 건가? 졸삼이 뒷빽이 대단하다는 걸 알고?

“일어나자.”

그때였다. 나정이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해명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데. 억울한데. 하지만 나정은 끝내 하려던 말들을 목 안으로 삼켰다.

태주에게는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냉담한 눈빛에 절로 위축이 되었다.

믿어주지 않을 거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태주에게 형식적인 고개 인사를 건넨 후, 나정은 보나를 이끌고 방을 벗어났다.

스치듯 태주의 시선이 제 목덜미를 훑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모르는 척 걸음을 내디뎠다. 유리에 베인 목의 상처가 어쩐지 따끔거렸다.

“야, 이렇게 그냥 가면 어떡해, 저 변태 시끼 뺨이라도 한 대 갈겨야지!”

얼마 후 문 밖에서 보나의 외침이 들려왔다. 곧 그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집무실 안에 차가운 공기가 침전물처럼 가라앉았다.

태주와 둘뿐인 공간. 졸삼이가 발끝에 걸린 구찌 슬리퍼를 건들거렸다.

“솔직히 나도 더 이상 일을 키울 생각은 없어요. 강나정 그 여자만 확실하게 징계합시다. 그래야 나도 면이 살지. OK?”

“…….”

이만하면 많이 봐줬다 싶은데, 이상하게도 태주는 가타부타 어떤 대꾸가 없었다.

그가 제 기세에 눌렸다고 생각한 졸삼이는 슬쩍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굳이 안 해도 될 조언을 곁들였다.

“이번에 새로 부임했다 그랬죠? 내가 한두 살 더 먹은 인생 선배로서 충고하는데, 직원 관리 잘해요. 강나정 그 여자 나한테만 추파를 던진 게 아니거든. 호텔에 투숙 중인 연예인 있지? 차현오라고.”

뜻밖의 이름에 태주의 시선이 느슨하게 움직였다.

“그 여자 차현오랑 꽤 친밀한 사이 같던데. 어떤 식으로든.”

졸삼이가 노골적으로 나정을 까내렸다. 나정과 현오의 사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까운지 실질적으로 설명한 길은 없었지만, 어차피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정이 이 호텔의 VVIP인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데 있었다.

“모르지 또. 연예인이랍시고 좋다고 만났을지도.”

아. 이런 말은 아까 강나정이가 있을 때 했어야 했는데. 그 계집애 하얗게 질린 표정이 보고 싶네. 얼마나 볼만할지. 졸삼이가 질 낮은 상상을 하며 헤죽댈 때였다.

“원래 그렇게 사사건건 오지랖이 넓어요?”

온기 없는 중저음이 졸삼이를 관통했다.

“정말 한시도 입을 쉴 줄 모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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