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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15화 (15/60)

전남편이 부임했다 15화.

태주의 표정에서 가벼운 경멸이 묻어났다. 탁! 서류철 하나가 졸삼이 앞에 떨어졌다.

“이름 서한수.”

“!”

“나이 서른여덟. 해룡 운수 신갑철 회장의 둘째 사위.”

뭐야……? 졸삼이의 미간이 구겨졌다.

태주는 아랑곳없이 졸삼이의 인적사항을 뇌까렸다.

“대외적으로 상무 이사 직함을 달고는 있지만, 실상은 장인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회사 내 암적인 존재.”

“야, 뭔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무슨 의도로 남의 뒤를 캐고 지랄이야? 졸삼이의 낯짝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테이블 위의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안에서 사진 몇 장이 떨어졌다.

“이 새끼가……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사진을 주워든 손이 움찔거렸다. 호텔에서 여자와 밀회를 즐기던 제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선택해. 그 사진 네 와이프한테 보내줄까. 아니면 번거로운 과정 생략하고 곧장 신동철 회장 앞으로 전송할까.”

장인의 이름이 연이어 언급되자 졸삼이는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외도 사실을 들킨다면 정말 끝이었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어렵게 시험관에 성공한 와이프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 그런 아내의 뒤통수를 쳤으니, 장인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개인 오피스텔 키며, 차 키도 모두 반납해야 할 터.

“이 새끼가 진짜…… 우리 와이프 임신 중인 거 알지. 만에 하나 충격 먹고 애라도 잘못되면. 감당 가능하겠냐?”

“뒷감당은 네가 져야지. 임신한 아내 대신 내연녀나 끼고 여기까지 내려왔을 땐 그만한 각오는 돼 있었던 것 아닌가?”

태주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너무 평이한 목소리가 도리어 소름 끼쳤다.

졸삼이의 안면근육이 마치 구안와사라도 온 것처럼 일그러졌다.

“굳이 일을 키우겠다는 거야?”

“그 반대야. 이 일은 내 선에서 덮이게 될 거야.”

태주의 눈에 날카로운 안광이 번득였다.

“이틀 줄게. 내 직원한테 직접 사과해.”

“뭐?”

“무슨 일이 있어도 네 더러운 성추문에 강나정의 이름이 같이 거론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높낮이 없이 이어지는 태주의 목소리에서 선득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엿 됐네. 졸삼이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호텔의 총책임자가 일개 여직원을 이렇게나 싸고돈다고?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당사자 동의도 없이 찍은 사진으로 감히 날 협박해? 특급호텔의 총지배인이 고객의 사생활을 빌미로 협박한 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넌 끝이야.”

졸삼이는 나름의 반항을 해보았다.

그러나 태주에게는 먹히지 않았다. 그는 같은 말을 고집스럽게 반복했다.

“강나정한테 사과해.”

“사과 같은 소리 하네 씨X, 내가 그년이랑 뭐라도 했으면 덜 억울하지. 그냥 좀 데리고 놀려던 것뿐이야. 솔직히 그년 비쩍 말라서 볼 것도 없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태주가 손에 쥔 크리스털 유리잔을 테이블 위로 퍽 내리꽂았다. 곧이어 붉은 선혈이 손가락을 타고 투둑, 툭 떨어졌다.

저, 저 미친 새끼……?

깨진 유리 잔해를 보며 졸삼이는 벌어진 입을 뻐끔거렸다.

태주가 티슈 몇 장을 뽑아 손에 엉긴 피를 닦아냈다. 극단적인 행동과 달리 표정은 무료했다.

“원한다면 네가 내 직원한테 한 짓을 똑같이 되돌려 줄 수도 있어.”

다시 태주의 입이 열렸다.

“여기도 CCTV는 없거든.”

순간 졸삼이는 몸에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 눈앞으로 유리 잔해 위에 쓰러진 나정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저 자식 뭐야. 진짜 또라이야……?

졸삼이가 새빨간 태주의 손을 보며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을 도리어 꽃뱀으로 몰던 졸삼이가 하루 만에 깁자기 태세를 전환한 것은. 어색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네는가 싶더니, 오늘 아침엔 뭐에 쫓기듯 급하게 호텔을 떠나기까지 했다.

“너 공지 뜬 거 봤어? 졸삼이 블락 당했단다. 우리 호텔 최초의 블랙리스트.”

함께 호텔 로비를 걷던 보나가 만세! 하며 쾌재를 불렀다.

“이제 분기마다 그 변태 자식 얼굴 안 봐도 되는 거지? 진짜 십 년 묻은 똥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다. 변비 탈출이야!”

“그러게.”

나정은 열없이 대꾸했다. 뭔가 이상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이번 일만 선처해주시면 두 번 다시 호텔 근처엔 얼씬도 않겠습니다.’

왜 갑자기 태도를 바꿨을까. 문제가 커질수록 불리한 쪽은 나였는데. 각종 추측과 구설수에 휘말리다 아마 그대로 호텔에서 잘렸을지도 모른다.

“에이 됐어.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괜히 신경 쓰지 마. 다 끝난 일인데.”

보나가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고심하던 나정은 문득 멀리 보이는 인영에 눈길을 주었다.

태주였다.

“총지배인님……!”

“어, 나정아 어디가!”

보나의 목소리가 등 뒤로 따라붙었다.

나정은 뭐에 홀린 듯 태주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전남편에게 꼭 물어볼 말이 있었다.

“총지배인님! 잠시만요!”

나정이 직원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등 뒤에서 보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꼭 태주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잠깐만요!”

한 번 더 크게 닫히려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챘다.

곧 다시 촤륵, 문이 열리며 안에 올라탄 두 사람이 보였다. 태주와, 태주의 수행비서였다.

“뭡니까.”

짧은 정적 후, 태주가 나정을 내리훑으며 물었다.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나정이 고개를 들고 전남편을 올려다봤다.

잠깐 말이 없던 태주가 곁에 선 비서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의 의중을 알아차린 비서가 스스럼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타요.”

텅 빈 엘리베이터 안에서 태주가 고갯짓을 해보였다.

이윽고 나정이 들어서자 엘리베이터 문이 촤륵 닫혔다.

“묻고 싶은 게 뭡니까.”

묘하게 밀실 같은 공간. 태주의 중저음이 바로 옆에서 훅 불어왔다. 그가 집무실이 있는 30층을 눌렀다.

“삼 분 줄 테니까 얘기해요.”

삼분. 그건 엘리베이터 안에서 용건을 끝내라는 의미였다. 나정을 침범하는 태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건조했다.

“총지배인님.”

속으로 말을 고르던 나정이 운을 뗐다.

“어제 집무실에서 서한수 씨와 단둘이 무슨 얘길 나누셨는지 궁금합니다.”

정면에 고정돼있던 태주의 고개가 나정을 향해 움직였다.

“왜요. 내가 강 주임을 위해 그 사람이랑 모종의 딜이라도 했을까 봐?”

되묻는 태주의 눈매가 기민했다. 나정은 그가 자신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서한수 씨한테 어제 일, 정식으로 사과받았어요. 제 생각엔 그 사람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게 총지배인님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나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태주가 나정을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엘리베이터의 은은한 조명이 그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검은 머리칼이 연갈색으로 빛났다.

나정은 새삼 그가 커다랗다고 생각했다. 키도. 존재감도.

“설마 내가 강 주임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랐던 건가?”

태주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서늘하게 읊조렸다.

“잊었어요? 나한테 먼저 선을 그은 게 강 주임이라는 거. 그런데 이제 와서 편애라도 해주길 바래요?”

나정이 자신을 비웃는 태주와 시선을 섞었다.

그 사이 엘리베이터가 30층에 다다랐다.

“어쨌든 서한수 고객이 잘못을 반성했다니 다행이군요.”

“…….”

“쓸데없는 구설에 휘말리지 않도록 당분간 업무에 집중합시다.”

형식적인 말을 끝으로 태주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나정은 묘연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각이 진 어깨를. 그리고 오른손을.

“손, 흉지지 않게 치료 잘하세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찰나였다. 나정은 홀연히 읊조렸다.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태주는 대리석 복도를 태연히 걸었다.

곧이어 나정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갔다.

“…….”

일정한 속도로 걸음을 내딛던 태주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상처를 소독하고 드레싱한 오른손이 아래로 늘어졌다.

***

그 후 의아할 정도로 평온한 며칠이 지났다.

“강 주임님! 그, 그 스캔들이 정말 사실이에요?”

“기사에 나온 K양이 정말 주임님 맞아요?”

“나정아! 이 기사 뭐야!?”

보나와 팀원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면전에 핸드폰을 들이댔을 때, 나정은 비로소 깨달았다. 지난 며칠간 만끽했던 평온함은 곧 몰아닥칠 폭풍의 씨앗에 불과했단 사실을.

놀랍게도 보나가 들이민 핸드폰 화면 속엔 차현오와 자신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차현오 제주도 칩거 중 호텔리어 K씨와 염문설!]

[자숙 대신 열애?! 국민배우 차현오의 추락은 어디까지?]

“이게 무슨…….”

나정은 말을 잃었다.

[차현오의 연인으로 알려진 K씨(30)는 엘러퀀스 호텔 소속 GRO로…… 두 사람은 호텔에서 처음 만나……]

기사 속 ‘K씨’는 자신이 분명했다. 모자이크가 되어있긴 했지만 차현오와 함께 있는 사진 속 여자는 분명 자신이었다.

“벌써 너랑 차현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해.”

보나의 말을 애써 무시한 채 나정은 핸드폰 기사를 정독했다.

[상습적인 코카인 투약과, 정 재계 마약 운반책이던 것이 알려져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국민 배우 차현오가 지난달 20일 미모의 호텔리어 K씨와의 열애설을 전격 인정했다.]

열애설을 인정해? 차현오가……?

“말도 안 돼.”

나정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직 졸삼이에게 받은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졸삼이의 일은 세간에 알려지지 않고 총지배인인 태주의 선에서 정리될 수 있었지만 차현오의 일은 달랐다. 이번엔 제게 닥칠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프론트 좀 봐줘.”

나정이 보나에게 프론트를 맡긴 채 걸음을 재촉했다. 현오의 별관을 향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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