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17화.
그런 녀석이 왜 강 주임에겐 선을 넘는 행동을 했을까. 그것도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송준 팀장님.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요?”
“예? 아. 아닙니다. 하하.”
송준은 나정을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때 연회장 문이 열리며 GRO팀 동료가 튀어 들어왔다.
“주임님. 헉, 헉, 여기 계셨네요!”
“보람 씨? 왜…….”
말을 잇던 입이 저절로 스르르 닫혔다. 동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
중역 회의실.
하나둘 안으로 들어선 호텔 임원진들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정은 회의실 정 가운데 비치되어있는 의자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사방에서 보내오는 못마땅한 눈초리와 불편한 헛기침 소리. 나정은 어쩐지 목이 멨다.
온종일 저를 따라다니는 직원들의 수군거림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쳤는데. 이제는 더 큰 산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우리 호텔 별관 손님과 추문에 휩싸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한참 술렁이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비서의 도움을 받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정을 추궁한 사람은 엘러퀀스 호텔의 정중원 대표였다.
“사실이 아닙니다.”
나정은 즉각 대답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제게 꽂혀 있는 수십 쌍의 시선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이며 공격적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자신합니까?”
“기사까지 난 걸 보면 뭔가 있었던 거 아닙니까?”
“강나정 씨. 솔직하게 대답해요. 솔직하게.”
취조에 가까운 질문 세례에 나정은 몇 번이고 입술을 짓이겼다.
무슨 말을 해도 이들에겐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차현오와의 스캔들을 기정사실화한 뒤 나정을 조리 돌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같았다.
“스캔들도 문제지만, 며칠 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간 서한수 고객과도 마찰이 있었다는 게 사실인가?”
정중원 대표가 안경 너머로 나정을 빼꼼 쳐다봤다.
나정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졸삼이 사건은 전적으로 졸삼이, 서한수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추궁하는 정중원 대표의 눈빛엔 명백한 경멸이 담겨있었다.
마치 가해자를 대하는 눈빛과 태도, 어쩌면 이렇게 한 치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지.
지금 이들에겐 차현오와의 스캔들이나, 졸삼이 사건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문제에 연루된 직원을 처분하기 위해 모인 것이었으니까.
“사실입니다.”
그때였다. 회의실의 방음 도어를 열고 들어선 사람은 태주였다.
그의 뒤로 패드를 든 비서가 후다닥 따라붙었다.
“!”
나정은 제 앞으로 와 서는 태주를 움찔하며 바라봤다.
눈앞에 드리워진 등이, 꼭 임원진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내는 방패막이처럼 느껴졌다.
나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왠지, 기분이 처참했다.
“서한수 씨가 우리 호텔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태주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이미 가해자가 사실을 인정했고, 호텔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데 동의했습니다. 물론 강나정 주임에게 따로 사과했고요.”
“사과요? 고객이 직접 사과를 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그게…… 한쪽만 처벌한다고 해서 끝이 납니까? 강나정 주임은요? 어쨌거나 물의를 일으킨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임원진들이 못마땅한 한 듯 웅성거렸다.
그 소음공해 속에서 태주는 잠시 침묵했다.
나정은 여전히 제 앞을 막아선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피해자에게 공동 책임을 묻는다면 호텔 프라이드에 상당한 치명타를 입을 겁니다.”
피해자, 라는 워딩에 태주는 은근히 힘을 주었다.
“호텔은 고객의 원츠를 충족시키는 데 일차적인 목표가 있습니다……만. 명백하게 가해자와 피해자와 갈리는 상황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 직원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태주의 날렵한 시선이 임원진을 훑었다.
“이 호텔에서 강나정 씨가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스캔들은요! 차현오 스캔들은 어쩔 겁니까! 성추문이야 그렇다 쳐도, 스캔들은 이미 기사까지 다 난 마당에! 이거, 호텔의 명예를 제대로 실추시킨 거 아닙니까?”
임원진 일동과 태주의 시선이 동시에 박 상무를 향해 움직였다.
박한성 상무.
그는 스위스 본사에서 태주를 스카웃해오는 데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일인이었다.
속칭 고인물, 꼰대로 통하는 그는, 나이도 삼십 대 초반에 불과한 태주가 최연소 총지배인 타이틀을 갖는 것이 영 탐탁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완장 하나 찼다고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이야…….
박 상무에게 태주는 영 거북스러운 존재였다. 당연히 강나정인지 뭔지 하는 부하직원을 싸고도는 꼴도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정말 차현오 고객과 아무 사이 아닌 거 맞습니까? 둘이 격 없이 지내는 걸 본 직원들이 있어요. 예?”
박 상무가 나정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믿어주십시오. 저는 절대로 규정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정의 호소에 임원진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다들 난감한 눈치였다. 총지배인이 저리 떡 버티고 서서 직원을 비호하고 있으니, 딱히 맞대항할 명분이 없었다.
그때 태주가 비서에게 패드를 넘겨받고는 다시 운을 뗐다.
“스캔들에 대한 정정기사가 이미 포털마다 개재된 상탭니다. 차현오 고객이 강나정 주임과의 열애설은 사실무근이라고 직접 해명했습니다.”
직접 해명했다고. 나정은 묵묵히 시선을 내렸다.
“내부적으로 알아본 결과 홍보팀 강준호 대리가 이번 스캔들을 기자에게 흘린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곧 강 대리 앞으로 인사위원회 통지서를 발부할 예정입니다.”
“잠깐 있어 보세요.”
박 상무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태주의 말을 잘랐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갔다가,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면 어떡합니까? 직원들 기강도 바로 세울 겸, 이번에 반드시 강나정 주임을 강징계해야 한다고 봅니다.”
아. 시선을 내리깐 태주의 입에서 짧은 단말마가 떨어졌다.
그가 꼬리를 내렸다고 판단한 박 상무는 입가를 어물쩍 끌어올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태주의 입에서 떨어진 말은, 단박에 그를 닥치게 만들었다.
“추후에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강나정 주임을 대신해, 제가 옷을 벗죠.”
전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그 말에, 박 상무도 어쩔 수 없이 끄응, 입을 다물었다.
***
교대 근무를 마치고 직원 숙소로 들어서는 나정의 걸음이 무거웠다.
‘나정아,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갈래?’
‘아냐. 너 편하게 일해. 나 정말 괜찮아.’
보나에게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발목에 쇠추를 단 듯 앞으로 내딛기가 힘겨웠다.
호텔에서 일하면서 이토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로한 날은 없었던 것 같다.
나정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데, 제 얼굴 위로 언뜻 그림자가 졌다. 동시에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자신의 전남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태주에게선 특유의 청량한 체취가 났다.
한때는 그게 태주가 즐겨 뿌리던 향수 냄새라고 생각했다.
이혼 후, 홀린 듯 샵에 들어가 남자 향수를 무더기로 샀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태주의 체취는 그의 품에 안겨서 숨을 들이마실 때에만 맡을 수 있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미쳤었네, 나.
나정이 자조적인 표정을 짓고는 촤륵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태주 역시 따라서 걸음을 내디뎠다.
“…….”
“…….”
잠시 후, 위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은 정적만이 가득했다.
다시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내려설 때까지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거기서 제 편을 드실 줄은 몰랐어요.”
나정이 다시 입을 연 건, 복도를 걸어 1004호 문 앞에 다다라서였다.
1003호 도어락 키를 누르던 태주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나정을 돌아봤다.
나정은 그를 마주 보지 않았다. 다시 열없이 말을 이었다.
“오늘 종일 자리에 안 계셨잖아요. 다른 일로 바쁘신 줄 알았습니다.”
“내부에서 기자와 접촉한 직원을 차출하느라 정신이 없긴 했습니다.”
나정이 그를 향해 고개를 비틀었다.
“왜 그러셨어요?”
“뭘 말입니까.”
태주는 기민하게 눈을 빛냈다.
곧이어 나정의 입이 열렸다.
“왜 자꾸 사람을 헷갈리게 하냐고요.”
“내가 강 주임을 헷갈리게 했다는 소립니까?”
“…….”
“상사로서 곤경에 처한 부하직원을 도왔을 뿐인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태주가 내뱉는 싸늘한 말이 면전에 날아와 꽂혔다.
나정은 현관 문고리를 쥐고 있던 손을 스륵 내렸다. 그러곤 태주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힘이 돼주시는 건 고맙지만, 아까 징계 위원회에서 총지배인님의 태도는 단순히 부하직원에 대한 염려 차원을 넘어섰다고 생각합니다.”
‘추후에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강나정 주임을 대신해, 제가 옷을 벗죠.’
나정은 태주의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그런 나정을 빤히 바라보던 태주가 이내 운을 뗐다.
“누구보다 특별 대우를 원하는 것 같아 보였는데. 막상 양심에 찔려요?”
“양심에 찔릴 만한 잘못은 하지 않았어요. 전 그냥, 총지배인님이 자꾸 제 일에 개입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갈……,”
“나도 내가 이해가 안 갑니다.”
태주가 말을 잘랐다.
“다른 건 몰라도 차현오와의 스캔들은 추호도 감싸줄 생각이 없었거든.”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이대로 강 주임이 호텔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내가 좀 곤란해져요.”
뭐?
“난 강 주임 같은 인재가, 오래오래 내 밑에서 머물기를 바랍니다.”
“…….”
“그러니까 멋대로 벗어날 생각 말아요.”
나정은 살짝 눈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