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18화.
그건 단순히 부하직원을 독려하기 위해 건넨 말이 아니었다.
도리어 오래오래 옆에 붙잡아두고 못살게 괴롭혀 주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어쨌든 이번 일은 내 선에서 일단락될 겁니다. 그러니까 강 주임은,”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불쑥 끼어드는 나정을 보며 태주는 입을 다물었다.
“왜 계속 사람을 손안에서 들었다 놨다 하면서 떠보는 거예요.”
나정의 고개가 꼿꼿하게 바로 섰다.
“앞에선 끊임없이 비아냥대고 상처 주는 말도 서슴지 않으면서, 왜 뒤에선 나 모르게 내 뒷수습을 하고 다니시는 거냐고요.”
감정이 드러난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주의 눈빛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뭔갈 착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일개 부하직원 뒷수습이나 하자고 죽자 살자 뛰어다닐 사람처럼 보입니까?”
“그럼 그 손은요.”
나정이 반창고를 새로 교체한 태주의 오른손을 가리켰다.
“그 손.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거 아닌가요?”
이미 다 알고 물어보는 거였다.
태주의 늘어진 손끝이 살짝 움찔거렸다.
나정의 말간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말은 모질게 하면서, 행동은 전혀 그렇질 않잖아.”
“…….”
“총지배인님의 그런 태도가 날 얼마나 헷갈리게 하는지, 얼마나 비참하게 만드는지 아세요?”
내가 지금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
“…….”
둘 사이에 한동안 아슬한 정적이 흘렀다.
“내가 이러는 이유, 정말 알고 싶어요? ”
나정이 흐트러진 눈빛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수그렸을 때였다.
태주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가 걸음을 옮겨 제게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붉은 입술이 열리려던 찰나였다.
“강나정.”
자신은 부른 건 태주가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여기 있어? 왜 네가…….”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여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태주 씨 만나러 온 거니?”
가까이 다가온 여진에게서 지독한 술 내음이 났다.
나정은 표정을 정돈하며 그녀를 마주했다.
“누가 누굴 만나러 와.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면? 여진의 눈동자가 조여들었다.
“설마, 너 여기 살아?”
“…….”
“태주 씨 옆집이라고……? 네가?”
상황 파악을 끝낸 여진이 한 번 더 하, 웃음을 터뜨렸다.
제 문자며 전화를 모조리 씹는 태주가 야속해서 있는 대로 술을 들이부었다. 그 후 정신을 차려보니 이 직원 숙소 앞이었다. 자존심도 없이 비틀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잡아탄 게 미치도록 후회가 됐다.
고작 이런 꼴이나 보자고. 여진은 입술을 비틀었다.
“왜 나정이야.”
왜 하필이면 쟤냐고.
“노여진. 너 취했어. 그만……,”
“닥쳐.”
여진이 나정의 말을 히스테릭하게 잘랐다. 태어나 이토록 비참했던 적이 없었다.
혹여나 태주가 나정과 다시 엮일까 봐, 다시 나정을 사랑하게 될까 봐.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었다. 가슴을 졸이며 전전긍긍하다 기어이 일까지 접고 제주도에 내려왔다.
스위스에서 제주도로. 장소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자신은 태주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래. 언제나 뒤였다. 태주는 아주 가끔 저를 돌아봐 주었다. 그리고 늘 같은 말을 했다. 됐으니까 이제 그만 가봐.
“……그런데 너는. 강나정 너는.”
여진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너무나 간단히 태주의 옆자리를 지키고 선 나정을 보니 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졌다.
우태주와 강나정. 붙어있는 모습이 삼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잘 어울렸다.
여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나정이 미웠다. 나정이 불안했다. 겁이 났다.
“제발 좀 사라져.”
“뭐?”
“태주 씨 옆에서 꺼져달라고!”
나정을 향해 위협적으로 손을 뻗으려던 찰나, 몸이 기우뚱 중심을 잃고 말았다.
태주가 넘어질 뻔한 여진을 한 손으로 끌어당겼다.
나정은 맥없이 태주 품에 안긴 여진을 바라봤다.
순간, 묘한 마음이 치밀었다.
“…….”
뭘까. 이 불편하고 껄끄러운 마음은.
잠깐 동안 눈앞의 두 사람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곤 쾅,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하. 나정의 입에서 한숨 비슷한 것이 흘렀다. 현관문에 기댄 등이 주르르 미끄러졌다.
얼마 후, 조용하던 문밖에서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여진의 구두 소리. 그리고 여진을 부축하는 태주의 말소리. 그런 것들이 곧 옆집 현관문이 여닫히며 한꺼번에 사라졌다.
주저앉은 나정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
“나 물 좀.”
술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마시는 게 아니었다.
소파에 누운 여진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멀찍이 보이는 태주의 실루엣이 선명했다 흐려지기를 반복했다.
“물 좀 줘, 태주 씨.”
한 번 더 그를 채근했을 때였다.
툭. 차가운 음료수 캔 하나가 내밀어졌다.
“마시고 가.”
“……데려다줘.”
여진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을 했다. 그러나 이미 저만치 간 태주는 대꾸조차 않았다. 예상했던 바였다.
“태주 씨. 나 좀 봐주면 안 돼? 나 너무 힘들어.”
자그마치 삼 년. 삼 년이었다. 그 긴 세월을 태주만 쫓아다녔다.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태주 씨 제발…….”
소파에서 일어난 여진이 태주에게로 걸어갔다.
거실 블라인드 틈새로 희뿌연 밤 빛이 새어들었다.
여진은 태주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대로 입을 맞추려 했지만, 이내 강한 손아귀가 제 양팔을 거머쥐었다.
“선 넘지 마.”
또 그 소리. 여진은 고개를 낮추며 웃었다. 비참했다. 아니 억울했다.
“스위스에서 지낼 땐 나한테 이렇게까지 매몰차지 않았어. 관심이 없었으면 없었지, 밀어내진 않았다고. 차라리 그때 내가 필사적으로 매달렸으면, 태주 씨 나랑 잤을까?”
“노여진.”
“왜 갑자기 변한 거야 태주 씨? 강나정 때문이야?”
다시 언급되는 나정의 이름에 태주는 눈빛을 굳혔다.
여진은 더욱 약이 올랐다.
“나 알고 있어. 태주 씨가 나정이 신경 쓰는 거. 하긴.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을 거야. 나정이 걔 일부러 태주 씨 주변 맴돌면서 태주 씨 흔들고 있어. 내 눈엔 보여. 걔 수작질하는 거.”
“그만해. 관심 없으니까.”
태주가 제게 매달리는 여진을 완전히 떼어냈다.
여진은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술은 이미 깼다. 하지만 술에 취했을 때보다 더 머리가 핑핑 돌았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자신이 나정의 뺨을 올려붙인 후, 태주는 내내 연락을 받지 않았다.
나정과 관련한 일이라면 그는 늘 차가워졌다.
“태주 씨. 내가 비밀 하나 알려 줄까? 나정이 말이야. 결혼했었다?”
여진이 감정에 앞서 입을 놀렸다.
“근데 지금은 남편이랑 헤어졌대. 왠 줄 알아? 걔 바람피웠거든.”
“…….”
“남편이 꽤나 건실한 사람이었는데. 그 멍청한 계집애가 주제도 모르고 뒤통수를 친 거야.”
“말했지. 관심 없다고.”
태주의 날 서린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여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걔가 누구랑 바람이 났는 줄 알아? 남편의 절친. 그것도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하던 20년 지기 절친.”
립스틱이 발린 입술 새로 조소가 흘렀다.
“대단하지 않아? 어떻게 남편 친구랑 자? 그게 돼?”
소름 끼쳐. 여진이 양팔을 크로스해 몸을 껴안았다.
“괜히 남편만 불쌍하게 됐지. 가장 믿었던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은 셈이니.”
그렇게 말하면서 태주의 표정을 살폈다. 만약 그가 동요한다면, 기억이 돌아온 것이리라.
그러나 예상과 달리 태주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불같이 감정을 터뜨리거나, 간신히 화를 억누르지도 않았다. 그저 잠잠했다.
“강나정한테 남편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어.”
“뭐?”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거든 우리.”
우리? 여진이 몸을 바르르 떨었다.
태주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내 앞에서 강나정 얘기 함부로 하지 마.”
몇 초간 선득한 시선이 오갔다. 곧이어 태주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그만 나가줘.”
여진은 위태로운 표정을 어떻게든 감추려 애썼다.
“오늘 송준 씨 들어오지 말라고 해. 나 자고 갈 거야.”
“…….”
자고 가겠다는 말. 그 말의 의중을 태주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여진은 걸치고 있던 트위드 재킷을 벗었다.
“자고 가.”
그때였다. 태주의 입이 떨어졌다.
곧이어 여진은 차 키를 들고 현관을 나서는 태주의 뒷모습을 멀거니 응시했다.
쾅. 현관문이 닫히며 칠흑 같은 어둠이 발목부터 스멀스멀 저를 타고 올라왔다.
“하. 하하……하.”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함에 여진은 연신 실소했다.
***
새벽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보나의 단잠을 깨울세라, 나정은 평소보다 훨씬 조용히 출근 준비를 마쳤다.
간밤에 잠을 설쳐서인지, 안색이 엉망이었다. 한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며 나정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던 의외의 인물과 맞닥뜨렸다.
“노여진……?”
옆집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있던 여진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나정은 자신과 마주 선 여진을 바라봤다. 옷차림이 어제 그대로였다.
제 옷에 꽂힌 나정의 시선을 느낀 여진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태주 씬 아직 자.”
현관문을 힐긋 눈짓하곤 다시 말을 이었다.
“나랑 얘기 좀 해 나정아. 너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할 말이 뭐야?”
직원 숙소 1층에 위치한 카페테리아.
커피엔 입도 대지 않고 나정은 곧장 용건을 물었다. 노여진이 굳이 아침부터 저를 기다린 이유가, 아니. 의도가 궁금했다.
“태주 씨 말이야. 너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뭐?”
“널 볼 때마다 이상한 장면들이 떠올라 미치겠대. 자꾸만 네가 신경 쓰이고, 이유 없이 화가 치미나 봐.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거북하고 부담스럽대. 왜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