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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19화 (19/60)

전남편이 부임했다 19화.

널 지웠어도, 원망과 증오심은 여전히 남아있는 거야. 여진은 태연히 덧붙였다.

“그 말 하려고 아침 댓바람부터 보자고 한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나정은 앞에 놓인 테이크아웃 잔을 집어 들었다. 이 커피는 죄가 없으니, 이대로 집어 들고 나갈 참이었다.

“나정아.”

그러나 여진의 용건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여길 떠나줘.”

“뭐라고?”

나정은 테이크아웃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떠나줘.”

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던 친구가, 한 번 더 어이없는 요구를 해왔다.

“너 차현오랑 기사 난 거 봤어. 어차피 너도 이대로 호텔 다니긴 껄끄럽잖아. 사람들 시선도 있을 테고. 차라리 다른 곳에서 새롭게 시작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너무도 뻔뻔한 태도에 나정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헷갈렸다.

“태주 씨. 기억이 돌아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서든 널 망치려고 들걸. 그러다 결국 본인도 망가질 테고. 너 정말 그걸 원하니?”

부탁을 가장한 협박이 여진의 입에서 떨어졌다.

얼마간 침묵을 지키던 나정은 고개를 똑바로 세웠다.

“그러니까 우태주, 그 사람 기억이 돌아오고 있단 말이지. 그래서 나더러 떠나 달라고.”

“그래.”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뭐? 순간 여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정은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그 사람 기억이 정말로 돌아왔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는 건 잘 알겠어.”

“무슨 소리야 그게?”

“너 우태주랑 아무 사이 아니면서 내 앞에선 사귀는 척 굴었잖아. 기억 안 나?”

“그건,”

“그리고 어젯밤에 나 우태주 그 사람 집에서 나가는 소리 들었어.”

‘태주 씬 아직 자.’

“너 왜 나한테 그런 거짓말까지 하니?”

차분하게 저를 옥죄는 나정을 보며 여진은 말을 잃었다. 수치스러웠다. 아니 불쾌했다. 강나정 네까짓 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지만 이내 그녀는 기분을 다스렸다. 지금은 나정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됐다.

“그래. 나 거짓말했어. 태주 씨랑 네 사이가 불안해서 그랬어. 용서해줘, 나정아.”

“용서 같은 거 함부로 구하지 마. 용서하면 널 이해해야 하잖아. 난 여전히 네 행동. 네 선택. 납득 못 하겠어.”

강나정은 생각보다 매정했다. 여진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고 가겠다는 저를 환멸 어린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태주가 떠올랐다. 그의 마음이 제게서 영영 떠나기 전에 무슨 수를 써야 했다. 뭐라도 해야만 한다고!

“나정아……!”

여진이 의자에서 내려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태주를 갖기 위해서라면 이까짓 굴욕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정아 부탁할게. 우리 친구였잖아. 아니, 지금도 난 여전히 네 친구야. 지난 삼 년간 한 번도 널 잊어본 적 없어. 늘 체한 것처럼 네가 얹혀 있었어. 미안해. 우리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강나정은 맑은 얼굴 뒤에 교활한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의 시야 밖에서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내내 불안에 떨 바엔, 차라리 아군으로 만들어 옆에 두는 편이 나았다.

“나 태주 씨 너무 사랑해. 제발 그 사람 흔들지 말아줘.”

이건 진심이었다. 여진의 몇 안 되는 진심.

절절한 애원에 나정은 할 말을 잃었다.

“우태주 그 사람이 너한테 뭐길래 이렇게까지 해?”

자신이 알던 노여진이 아닌 것 같았다.

여진이는 학창 시절부터 자존심이 말도 못 하게 센 아이였다.

J그룹의 공주님으로 통하던 여진을 학기 초부터 못마땅해하던 패거리가 있었다. 패거리는 여진을 불러내 이유 없이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전원 퇴학 조치 되었다. 명목상 자퇴로 표기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비싼 무릎이었다.

그런데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나온다고……?

“다시 친구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 안 하니.”

“뭐?”

“일어나. 보기 안 좋다.”

나정에게서 예상 못 한 발언이 돌아왔다. 고개 숙인 여진의 입가가 씰룩였다.

“그렇게 불안하면, 네가 우태주 그 사람 데리고 떠나. 난 도망칠 생각 없으니까.”

맞은편에서 나정이 몸을 일으켰다.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고고한 태도에 여진은 퍽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구나. 아직 나는 완전히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어. 난 강나정 너한테 굽히고 싶지 않아.

“태주 씨 기억이 돌아오면, 제일 발등에 불 떨어질 사람은 너 아닌가?”

나정이 멈칫 걸음을 세웠다. 등 뒤로 웃음 섞인 비아냥이 들려왔다.

“쫓겨나기 전에 네 발로 당당히 여길 벗어날 기회를 준 거야. 난.”

“그래. 편한 대로 생각해.”

그렇게 받아치고 다시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고재영.”

애써 잊고 살았던 이름. 여진의 입에서 그 이름이 불거진 순간 나정은 동요했다.

“태주 씨 친구 고재영. 네가 그 사람이랑 어디까지 깊은 관계였는지 난 샅샅이 알고 있어.”

“…….”

“고재영이 너 때문에 어떻게 됐는지까지도.”

나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우태주, 고재영. 니가 두 남자를 망가뜨린 거야. 알지? 과거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거.”

여진은 짧게 웃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과거에 발목이 잡히는 한, 나정은 영원히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너랑 있으면 누구든 불행해져.”

“…….”

“태주 씨한테서 떨어져. 너랑 다시 엮이는 날엔, 그 사람 정말 죽고 말 거야.”

***

“나정아. 구매팀 연락해봤어? 우리 비품 새로 주문하려면…… 나정아?”

“어, 얘기해.”

눈앞에 펼쳐진 라운지를 멍하니 바라보다 파뜩 정신이 들었다.

나정은 보나의 얘기에 열심히 호응하며 집중하려 애썼다. 중간중간 자신을 비웃는 여진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다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자기들 뭐 해? 부서 회의 안 가?”

프론트를 지나치던 식음부 직원이 아는 체를 해왔다.

“부서 회의요?”

“몰랐어? 아까 회의실에 GRO팀 내려가던데? 꾸물대지 말고 얼른 쫓아가봐, 우 총한테 괜히 불벼락 맞지 말고.”

“참 맞다! 회의! 내 정신 좀 봐.”

보나가 한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평소엔 스케줄을 잊고 있어도 나정이 옆에서 찰떡같이 챙겨줬었는데, 오늘은 이상했다. 온종일 나정의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뭐해 빨리 가자. 늦겠다.”

보나가 나정을 이끌고 프론트를 벗어났다.

“VVIP 고객 확보를 위한 최주연 씨만의 업 세일 전략이 있습니까?”

조심스레 화의실 문을 열었을 땐, 이미 안에서 열띤 대화가 오가는 중이었다.

최주연 사원에게 쏠렸던 시선들이 부리나케 자리에 앉는 보나와 나정을 향했다. 그중에는 태주의 시선도 포함돼 있었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괜찮습니다. 계속하세요.”

태주는 짧게 대답한 후 다시 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방금 우 총이 너한테 괜찮다고 한 거 맞아? 하여간…… 속을 모르겠다니까.”

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난주에 우태주 저 인간이 판촉부와 인사부의 과장급 인재를 셋이나 갈아치웠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대놓고 폭정을 일삼는 인간인데. 요상하게 나정이가 관여된 일에는 태도가 느슨해 진단 말이지.

보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주로 회의 때 딴생각을 하거나, 헛물켜는 추리를 할 때 그녀의 표정은 이런 식으로 진지해졌다.

수상해. 우 총 저 인간 분명 기억을 지웠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뻥이고 나정이랑 다시 잘해보려고 나타난 건가?

보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나정이한테 아직 마음이 있는 거라면, 저런 식으로 바라볼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나정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빛은 사랑보다는 애증에 가까웠다.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간보나 씨.”

나정인 아직도 저 인간한테 미련이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왜 이혼한 거지??

“간보나 씨. 듣고 있습니까.”

“네? 아, 네, 네……!”

한창 상념에 빠져있던 보나는 뒤늦게 자세를 곧추세웠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아아, VIP 고객 선점을 위한 업 세일 전략, 어, 그게…….”

앞에 놓인 서류를 마구 뒤적이는데, 보다 못한 나정이 구제의 손길을 내밀었다.

“간보나 사원이 준비하는 동안 제 의견을 먼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태주의 시선이 나정에게 와 멎었다.

그의 침묵이 수락의 의미라는 것을 아는 나정은 가볍게 운을 뗐다.

“VIP 고객 한정으로 진행되는 갈라쇼를 기획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4, 50대를 위한 트로트 콘서트나, 세대에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뮤지컬, 오페라 위주로 프로그램을 구상해서,”

“갈라쇼는 규모가 큰 행사입니다. 비용 문제를 고려해 봐야 합니다.”

태주가 가볍게 제동을 걸었다.

나정은 유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게 아직 다른 대안이 남아있다는 의미에서였다.

태주는 나정의 웃는 모습에 잠깐 시선을 두었다가, 손에 쥔 서류로 고개를 내렸다.

나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니면 VIP 고객 유치를 위한 룸쇼는 어떨까요? 이번에 리모델링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을 전면에 내세워 기획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룸쇼라. 태주가 손끝으로 입술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가 뭔가를 고심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나정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나쁘지 않네요, 디벨롭 합시다.”

드디어 태주의 입에서 수락이 떨어졌다.

“이번 주 내로 관련 기획안 작성해서 나한테 직접 결재받아요.”

그 후로도 얼마간 첨예하고 타이트한 회의가 이어졌다.

태주는 업무 지시를 내릴 때 빼고는 한 번도 나정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건 나정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더 둘 사이를 특별해 보이게 하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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