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20화.
보나는 연신 두 사람을 흘깃대며 혼자만의 망상을 펼쳤다.
“강나정 주임.”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모두가 회의실을 빠져나갈 때였다.
“네.”
나정은 살짝 긴장하며 태주를 돌아봤다.
막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태주가 묘연한 시선을 던졌다.
“이번 달 스위트룸 예약리스트와 리핏 게스트 명단 가지고 내 방으로 와요.”
“저 혼자서요?”
아. 나정은 재빨리 입을 닫았다. 혼자서요? 하고 얼빵하게 되묻는 제 얼굴이 얼마나 웃겼을지. 스스로가 한심했다.
“네.”
살짝 눈썹에 힘을 준 태주가 짧은 대답을 내놨다.
“알겠습니다…….”
“바로 올라오세요.”
“네…….”
나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잔바람을 일으키며 태주가 제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흐음…….”
보나는 회의실 밖에서 그 두 사람을 훔쳐보고 있었다.
진짜 이상하네. 예약 리스트랑 고객명단, 며칠 전에 내가 분명 갖다줬는데.
“진짜 뭐가 있구나?”
보나의 얼굴이 음흉해졌다.
우 총 저 인간…… 기억이 돌아왔거나. 기억이 없는데도 나정이한테 홀딱 빠졌거나. 둘 중 하나야. 분명해.
***
“여기, 말씀하신 이번 달 예약 리스트와, 리핏 게스트 명단입니다.”
호텔 초고층에 위치한 총지배인실은 몇 번을 와도 익숙해 지지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손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그만큼 위압감이 대단했다.
“거기 둬요.”
태주가 등을 보이고 선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당장 가지고 오랄 땐 언제고, 그는 정작 나정이 들고 있는 자료가 절실해 보이지 않았다.
나정은 고객명단과 예약리스트를 협탁 위에 내려놓고 잠시 망설였다.
나가라는 건가. 아니면 다시 지시가 떨어질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건가.
“긴장하지 말고 앉아요.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하면 보는 사람까지 불안하니까.”
나정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소가죽 소파 위에 몸을 앉혔다.
“좀 봅시다.”
“네?”
흠칫한 나정이 앞으로 다가선 태주를 올려다봤다.
앗 할 새도 없이 커다란 손이 다가와 제 목덜미를 살폈다.
“기어이 병원 안 갔습니까?”
그제야 나정은 목에 난 상처를 떠올렸다. 얼마 전 졸삼이와 실랑이를 하다 얻은 영광의 상처였다.
“괜찮습니다. 병원에 갈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닌데요.”
목에 와 닿은 태주의 손을 걷어내며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가만히 있어요.”
낮은 중저음이 울렸다.
태주가 목덜미에 성의 없이 붙어있던 밴드를 대신 떼주었다. 성마른 눈빛과 어울리지 않는 조심스러운 손놀림이었다.
나정은 움직임을 멈춘 채 정지했다.
살짝 기울어진 태주의 고개가 바로 옆에 와있었다. 고른 숨결이 제 이마를 반복적으로 간질였다.
“됐어요.”
밴드를 뗀 자리에 살살 연고를 바르고 새로 드레싱을 하는 손길이 지나칠 정도로 섬세했다.
나정은 머릿속이 너무 시끄러워 도리어 말을 아끼고 있었다.
우태주는 지금 또다시 날 간 보며 농락하는 중인 걸까.
그게 아니라면, 목덜미의 상처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건 가져가요.”
태주가 흉터 연고를 가리켰다.
나정은 더더욱 복잡해졌다.
무엇보다 납득이 가지 않는 건, 태주가 의도를 숨기고 성큼 다가올 때마다 도저히 밀어내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강나정.
“신경 써주시는 건 고맙지만, 제 몸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연고를 다시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냥 가져요. 별것도 아닌데.”
“전 됐으니까 총지배인님 손부터 신경 쓰세요.”
말이 제법 날카롭게 나갔다. 나정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운을 뗐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헷갈리게 하지 말아달라고요.”
태주가 낮게 웃었다.
“나도 말했을 텐데. 강 주임이 이상하게 신경 쓰인다고. 더 가까워지고 싶다고.”
“여전히 불순한 의도로 하시는 말씀일 테고, 전 거기 응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나랑 사적으로 엮이는 게 그렇게 싫습니까?”
“싫습니다.”
돌아오는 칼답에 태주는 수긍하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매는 온기 없이 차가웠지만 앙 다물린 입가는 도리어 차분했다. 도저히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모르겠어.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혹시.”
돌연 태주의 입술이 열렸다.
“노여진 때문인가?”
뭐? 나정의 눈빛이 흔들렸다.
“노여진이 내 집에 찾아왔던 게 신경 쓰여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나정이 잡아떼자 태주는 낮게 숨을 골랐다. 그는 나정에게 무언가를 해명하려 했다.
“노여진은 나한테 여자가 아니라 동생입니다. 뭔갈 오해하는 것 같은데 지금 내가 관심 있는 건,”
“아뇨. 그만 하세요.”
나정이 힘주어 말했다.
‘너랑 있으면 누구든 불행해져.’
여진의 말이 마녀의 저주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그러니까 태주 씨한테 떨어져. 너랑 다시 엮이는 날엔, 그 사람 정말 죽고 말 거야.’
“지난번에 말씀드렸었죠. 저 이혼했었다고요.”
“그래서요?”
무슨 상관이냐는 듯 태주는 곧장 반문했다. 나정이 그를 천천히 훑었다.
“제 전남편이 총지배인님이랑 아주 많이 닮았어요. 얼굴도, 목소리도.”
나정은 제게 고정된 태주의 눈동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전 총지배인님이 불편해요. 난처하고, 껄끄럽고, 거북해요.”
“…….”
“다시 전남편이랑 엮이는 것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고요.”
송곳 같은 한마디가 태주를 관통했다.
줄곧 태연한 척하던 나정은 무심코 숨을 멈췄다.
단단하던 태주의 눈빛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아무렇지 않아야 하잖아. 오히려 잘됐다는 듯이 나를 더 조롱하고 비웃으면 모를까.
나정은 저도 모르게 태주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안 돼.
노여진의 알량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은 더 이상 태주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서는 안 됐다. 그럴 자격이 없었다.
“총지배인님이 저를 여자로 보든, 심심풀이 장난감으로 보든 전 관심 없습니다.”
“…….”
“제가 바라는 건 더 이상 총지배인님과 엮이지 않는 것, 그것뿐입니다.”
***
며칠이 흘렀다.
여전히 나정과 차현오의 스캔들은 직원들 사이의 핫이슈였다.
“정말 아무 사이 아닌데 스캔들이 왜 났겠냐고. 백퍼 차현오랑 뭐가 있는 거지.”
“강 주임 말야 우 총이랑도 썸 탄다는 소문 있더라? 이번에 징계 없이 넘어간 게 다 우 총 덕분이라며. 대담하게 두 남자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는 중~?”
화장실 칸에 들어가 있던 나정은 밖에서 들려오는 뒷담에 한숨을 삼켰다.
차라리 지금 나가서 한바탕 뒤집어엎을까. 아니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냥 내버려 둘까.
“아오, 이 신참 나부랭이들이 진짜! 니들이 봤어? 강 주임이 이 남자 저 남자 놀아나는 거 봤냐고?”
굳이 자신이 문을 열고 나갈 필요도 없었다. 언제 나타난 건지 보나가 밖에서 와락와락 소리를 질러댔다.
“니들 연회부 소속이지? 내가 거기 송준 팀장이랑 아아아아주 밀접한 사인데 왜, 나도 소문 좀 내주지?”
“뭐, 뭐야 진짜. 가자.”
송준의 이름이 거론되자 당황한 여자들이 빠르게 화장실을 벗어났다.
“쯧쯧, 저런 쫄보들…… 됐어. 이제 나와.”
보나가 화장실 둘째 칸을 박력 있게 두드렸다. 곧이어 철컥 문이 열리고 나정이 푸스스 웃었다.
“너 꼭 내 보디가드 같다?”
“친구끼리 이 정돈 기본이죠.”
친구.
갑자기 여진이 떠올라서 나정은 쓰게 웃었다.
“고마워. 보나야. 여러 가지로.”
보나와는 3년 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데면데면 한 사이였다.
술자리를 좋아하고, 활달하다 못해 선머슴 같은 보나는 자신과 영 접점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태주와 이혼한 후로 누구와도 깊은 관계는 맺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외국에서 온 바이어가 보나를 반지 도둑으로 몰았다. 자신의 컨시어지였던 보나가 객실에 출입한 후 3캐럿짜리 반지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때 객실은 물론, 맨손으로 야외 쓰레기장까지 뒤져 기어이 반지를 찾아낸 게 나정이었다.
그 후로 두 여자는 각별해졌다. 아니 애틋해졌다.
“아무튼 네가 차현오랑 아무 사이 아닌 건 내가 보장해.”
넌 나만 믿어 나정아. 우 총이랑 다시 잘되도록 밀어줄게. 보나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잠깐만 나 호출.”
화장실을 나서던 나정이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주임님. 급해. 당장 와줘.
개인 번호로 자신을 호출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정이 훅, 숨을 내쉬며 차현오가 묵는 별관을 향해 돌아섰다.
***
-좀 더 오른쪽으로.
-거기서 세 발만 뒤로 가.
-다시 한발 앞으로.
대체 뭘 하려는 거지……? 현오와 통화를 하던 나정이 의아함에 미간을 좁혔다.
“한 발 앞으로…… 됐나요?”
-응. 잠깐 거기 서 있어.
뭐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차현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위 좀 봐봐.
“위요?”
-하늘.
나정은 조금 미심쩍었지만 순순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손차양을 만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랗게 개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하늘을 올려다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어?”
그때였다. 하얀빛이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이내 반짝 사라졌다. 나정은 눈을 키웠다.
“고객님. 저게 뭐죠?”
-유성.
핸드폰 너머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원래 대낮에 보긴 힘들어. 얼른 소원 빌어.
유성? 저게 진짜 별이라고? 나정의 눈이 일렁였다. 한낮의 유성이 한 번 더 빠르게 낙하했다.
“자. 샷 추가했어.”
그리고 난데없이 코앞에 바닐라 라떼를 들이민 사람은, 예상대로 차현오였다.
“스트레스받을 땐 독하게 매운 걸 먹어야 하는데. 일단은 단 걸로 퉁치자.”
그가 나정의 손에 커피를 쥐여주었다.
놀란 나정은 대꾸 없이 그를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