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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21화 (21/60)

전남편이 부임했다 21화.

“가리고 계셔서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요.”

평소에도 차현오는 후드나 야구모자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정도가 지나쳤다. 야구모자 위에 다시 후드 모자를 겹쳐 쓰고는, 서장훈 손바닥만 한 마스크로 얼굴을 완전히 감춰버렸다.

“숨 안 막히세요……?”

“죽을 것 같아.”

“마스크를 좀 내리시죠.”

“안 돼. 민폐야.”

“민폐요……?”

“너한테.”

현오의 입가에 아슬한 웃음이 스쳤다.

스캔들 때문에 꽁꽁 싸맨 거구나. 나정은 왠지 차현오가 측은해졌다. 그녀의 눈빛을 오해했는지, 차현오는 냉큼 말했다.

“나한테 나가라고 하지 마. 나 이 호텔 아님 갈 데 없어. 서울에 있는 아파트랑 남양주 별장, 그리고 오피스텔까지 전부 팔았어. 나 이제 거지야.”

묻지도 않았는데 현오는 열심히 자신을 변호했다.

“나가라고 안 해요. 제가 고객님한테 그런 말을 왜 하겠어요. 그리고 정말 나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죠. 그런 황당하고 어이없는 스캔들을 기자에게 흘린 저희 호텔 직원이요.”

나정의 목소리는 담대했다.

황당하고 어이없을 것까지야…… 현오는 작게 중얼거렸다. 물론 나정은 듣지 못했다.

“여튼 커피 감사해요…… 유성우도요.”

“응. 기운 내 주임님. 내가 평생 커피 셔틀할게.”

평생 커피 셔틀이라니. 나정은 왠지 진짜로 힘이 났다.

“고객님도 기운 내세요. 원하시면 저도 언제든 고객님의 셔틀이 되어 드릴게요.”

화이팅, 나정이 한 손을 동그랗게 말아 쥐었다. 현오는 평소와는 다른 나정의 반응에 살짝 놀랐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말이 돌아와야 했다. 평생 셔틀이라니, 규정에 어긋납니다, 고객님.

“어…… 그럼 나 갈게.”

현오가 나정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주먹을 말아쥔 채 화이팅! 외치던 목소리가 왠지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귀여우면 안 되는데.

“고객님, 그냥 가시는 거예요?”

“커피만 주러 온 거야.”

현오가 한 손을 가볍게 흔들곤 멀어졌다. 나정은 그 뒷모습을 한동안 응시했다.

언제나 제 보디가드를 자처하는 보나도 그렇고, 난데없이 찾아와 제일 좋아하는 커피를 내미는 차현오도 그렇고. 예상치 못한 구간에서 응원을 받자 힘이 샘솟았다.

기죽지 말자. 나정은 작게 읊조렸다.

어차피 스캔들은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사그라들 것이다. 그리고 태주와의 문제도 언젠가 자연히 풀릴지도 모른다.

아니. 정말 그럴까……? 나정의 눈이 짙어졌다.

‘전 총지배인님이 불편해요. 난처하고, 껄끄럽고, 거북해요.’

‘다시 전남편이랑 엮이는 것 같아서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고요’

꼭 상처받은 것 같았다 그때.

나정은 자꾸 떠오르는 태주의 표정을 애써 무시하려 노력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리며 모르는 번호가 화면을 채웠다.

“여보세요. 강나정입니다.”

-세상에. 설마 했는데, 너 아직도 이 번호 쓰는구나?

핸드폰을 쥔 나정의 손이 살풋 떨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여진이었다.

-나정아. 나 지금 호텔 로비에 와 있어. 조금 특별한 손님을 모시고 왔는데…… 네가 컨시어지 좀 해줄래?

핸드폰을 넘어오는 여진의 목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달콤했다. 마치 악마의 유혹 같았다.

-내가 누굴 데리고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너도 보면 무지 반가울 거야.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와. 몸서리치며 놀라게 해줄 테니까.

나정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검지로 핸드폰을 두드리며 기다리던 여진은 여유만만 덧붙였다.

-방금 이 호텔에서 가장 비싼 객실을 체크인했어. 내 담당 컨시어지로 널 지목했고. 그러니까 이쪽으로 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게 네 일이잖아.

나정은 시선을 굳혔다. 앙다문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

여진을 만나기 위해 내려간 호텔 로비는 체크인 혹은 체크아웃 하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정은 커다랗고 웅장한 느낌을 자아내는 실내 분수대 앞에 걸음을 세웠다.

오고 가는 인파 속에 여진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오긴 온 건가.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 들던 찰나였다.

“회장님, 태주 씨 곧 나올 거예요. 저랑 커피 마시면서 기다리세요. 이쪽으로……,”

상냥하게 말을 잇던 여진이 눈앞의 나정을 발견하고 걸음을 세웠다.

“강, 강나정……?”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여진은 충격에 젖은 척 눈을 떨었다.

나정은 어이없는 그녀의 행태에 혀를 내두를 새도 없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

하마터면 정말 어머니라고 부를 뻔했다.

여진이 살갑게 팔짱을 끼고 선 인물은 자신의 시어머니였던 하문옥 회장이었다.

하 회장은 재계에서 백곰, 혹은 백호랑이로 통칭되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염색하지 않고 왁스로 넘긴 특유의 포마드 스타일은 뉴스 경제면뿐만 아니라 패션일간지에서도 자주 회자되었다.

“넌 나정이 아니니?”

남편이었던 우석중 회장이 작고한 후 홀로 재경 그룹을 이끌어온 하 회장은 3년 만에 마주친 며느리를 보고도 별로 놀란 내색이 아니었다.

하긴, 워낙 포커페이스에 능한 인물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야?”

하 회장이 감정을 배제한 채 물었다. 무미한 얼굴은 표정이 없어서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나정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회장님.”

“네 인사 같은 건 필요 없다. 너 설마 태주 밑에서 일하니?”

매서운 시선이 나정의 유니폼을 훑었다.

“나정아. 정말이야? 그동안 연락도 안 받고 어디서 숨어지내나 했더니. 태주 씨 밑에 있었던 거야?”

여진이 쌍꺼풀 없이 긴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나정은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태주와 떨어뜨려 놓기 위해 더한 연기도 서슴지 않을 애였으니까.

“이러는 거 안 창피하니?”

많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그러나 여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 둑, 년.

오히려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여 나정을 조롱했다. 강나정. 넌 도둑년이나 다름없어. 그러게 왜 내 남자를 욕심내.

“죄송합니다, 회장님. 나정이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어요. 미리 알았으면 다른 곳으로 모셨을 겁니다. 제 불찰입니다.”

여진이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원맨쇼를 지켜보던 나정은 가벼운 날숨을 내쉬었다.

“엄밀히 말하면, 우태주 총지배인보다 제가 먼저 이곳에 있었습니다.”

담담하게 말문을 열자, 하 회장의 눈썹이 치솟았다.

“우리 태주가 일부러 널 만나려고 여기 내려왔다는 거야.”

“아뇨. 우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연? 말이 좋아 우연이지.”

하 회장이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이곳이 보는 눈이 많은 호텔 로비고, 아들의 일터라는 사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무서울 게 없는 위치에 있으면, 누구라도 저럴 거라고 나정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정아. 내가 한때 널 얼마나 예뻐했는지 알고 있니.”

하 회장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난 돈보다 내 사람이, 내 식구가 더 중요하다. 바꿔 말하면 넌 더 이상 내 사람도, 내 식구도 아니니 자꾸 그렇게 건방을 떨면,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어.”

“…….”

“당장 호텔부터 그만둬라.”

하 회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여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난다긴다하는 기업체 대표들도 하 회장의 불호령 앞에서는 꼼짝없이 머리를 조아리곤 했다. 전 며느리였던 나정이 칼 같은 시어머니의 성품을 모를 리 없었다.

여진은 3년 전, 처음 하 회장에게 끌려갔던 날을 떠올렸다.

스위스 베른에 위치한 5성급 호텔 스위트룸. 그곳에서 고고하게 차를 마시는 하 회장을 처음 만났다.

‘왜 내 아들 주변에서 얼쩡대는 거니.’

하 회장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여진이 우연을 가장해 태주에게 접근하려 한다는 것도. 전 며느리인 나정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도.

‘잘못했습니다. 태주 씨를 사랑해서 그랬어요.’

여진은 거짓말을 하는 대신 하 회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든 내막을 파악한 하 회장이 자신을 한국으로 내쫓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외로 하 회장은 자신을 품어주었다.

‘선택은 네가 하렴. 태주 옆에 남아 날 도울지. 아니면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지.’

딩연히 여진은 전자를 택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태주의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빠짐없이 하 회장에게 고해바쳤다.

그렇게 지켜온 태주 씨 옆자리를 너한테 다시 내줄까 봐?

여진이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눈앞의 나정이 주춤하며 하 회장에게 머리를 조아리기만을 기다렸다.

자. 말해. 잘못했다고. 당장 여길 떠나겠다고.

“제가 이 호텔에서 제 발로 나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나정의 입에서 떨어진 한마디는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 회장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예전엔 네 그런 점이 예뻤는데. 지금은 영 거슬려. 김 실장?”

“네, 회장님.”

“얘 당장 이 호텔에서 치워버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행비서와 가드들이 나정의 앞을 막아섰다.

여진은 웃음이 나는 걸 참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만약 그때 태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소리 내 웃어버렸을지도 몰랐다.

“지금 뭘 하는 겁니까.”

익숙한 중저음에 나정이 고개를 돌렸다. 로비를 가로질러 오는 태주가 보였다.

“왔니.”

하 회장은 태연자약하게 아들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들렀다.”

“저녁 한 끼 치곤 너무 멀리 나오신 것 아닙니까?”

어머니의 말을 받아치는 태주의 표정이 싸늘했다.

[태주 씨. 나 회장님이랑 같이 있어.]

몇 분 전, 여진의 문자를 확인한 태주는 차갑게 실소했다. 여진의 얕은 수가 빤히 보였지만, 어찌 됐든 그는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의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었다.

뜻밖의 인물이 어머니 앞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지만 않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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