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이 부임했다-23화 (23/60)

전남편이 부임했다 23화.

그 꿈에서 깼을 때,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얼마나 숨죽여 울었던지.

나정은 다시 떨리는 눈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감자채 볶음, 예쁘게 말린 계란말이, 미역 줄기. 전부 전남편이 좋아했던 음식이었다.

태주의 움직이는 젓가락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대석이 말문을 열었다.

“이거 내가 담근 술인데. 괜찮으면 반주로 같이 들어요.”

대석이 잔 하나를 태주의 앞에 내려놓았다. 언제 내왔는지 상 옆에 커다란 담금주 통이 보였다.

“직접 키운 돌배로 담근 술이에요. 달달하니 괜찮아요. 예전에 우리 아들이 이 술을 좋아했는데. 내가 주면 주는 대로 덥석덥석 받아마셨지.”

나정은 대석이 말하는 아들이라는 게 누군지 금세 알아챘다. 자신이 태주와 이혼한 후에도 대석은 때가 되면 직접 술을 담갔다. 그러고는 대문 밖의 제주 바다를 벗 삼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아들처럼 격 없이 굴던 사위를 내내 그리워했다.

나정은 울컥 뜨거워지는 마음을 빠르게 추슬렀다.

“아빠, 술은 안 돼. 차 가지고 오셨잖아.”

“대리 부르면 되지.”

대체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나정은 가는 숨을 내쉬었다.

태주는 대석을 바라보다 말없이 그의 잔에 제 잔을 부딪쳤다.

“허허, 이게 도수가 꽤 되는데 생각보다 참 잘 드시네. 자, 한 잔 더 받아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담금주 두통이 모두 따져 있었다.

태주를 취하게 할 작정이었던 대석은 도리어 알딸딸하게 혀가 꼬여가고 있었다.

거실과 연결된 대청마루 위로 새하얀 달빛이 스몄다.

“나정아, 은혜네 가서 소주 몇 병만 얻어올래?”

“알겠어.”

나정은 순순히 일어섰다. 대석은 이미 만취 상태였다. 소주 대신 근처 24시 약국에서 숙취 해소제를 사올 참이었다.

“잠깐만 계실래요? 빨리 다녀올게요.”

“안 서둘러도 됩니다.”

태주가 무뚝뚝하게 말한 후 잔을 입가로 기울였다.

‘제가 바라는 건 더 이상 총지배인님과 엮이지 않는 것, 그것뿐입니다.’

나정은 내심 민망해졌다. 그런 말을 해놓고, 하루도 안 돼서 이런 상황이라니.

멋쩍고 불편한 표정으로 태주를 등진 나정이 곧 대문을 벗어났다.

“…….”

잠깐 나정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었던 태주가 다시 대석의 잔을 받았다.

적적한 거실에 남겨진 두 남자는 한동안 조용히 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태주가 앞에 놓인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뒤이어 대석의 잔을 반쯤 채웠다.

“태주야.”

그때였다. 대석의 입이 무겁게 떨어졌다.

멈칫한 태주의 고개가 그를 향해 올라섰다.

“나는 다 안다.”

“…….”

“네가 우리 딸 목 조르려고 다시 돌아온 거. 나는 알아.”

태주가 손에 들었던 잔을 잠자코 상 위에 내려놓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못 속인다 태주야. 내가 널 몇 년을 봐왔는데.”

말을 잇는 대석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래, 네 입장에선 우리 나정이가 원망스럽겠지. 나도 대강은 안다. 삼 년 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손에 쥔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이 도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잊어달라고는 안 한다. 용서해달라고도 안 해. 어떻게 그게 용서가 되겠어.”

“…….”

“그저 네가 이것만 알아줬으면 한다. 우리 나정이…… 너랑 갈라선 후로 하루도 맘 편히 못 지냈어. 그 애가 지난 삼 년간 어떻게 살았는지 알면 너도…… 너도…….”

말을 흐리던 대석의 고개가 아래로 푹 꺼졌다. 내쉬는 날숨에서 진한 술내음이 났다.

“수면제에, 불안 약에, 강박 약까지. 밥 대신 약으로 살았다. 잠을 너무 못 자서 내가 매일 밤 걔를 붙들고 울었어. 아무리 그래도 이제 태주는 안 온다고, 좀 편하게 살라고.”

“…….”

“너랑 헤어지고 처음 맞는 결혼기념일에 나정이가 죽으려고 했었다. 아직도 손목에 희미하게 흔적이 남았어.”

태주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동요했다. 대석은 자조적으로 말을 이었다.

“바보같이. 힘들어할 거면 차라리 그때 기억을 지웠어야지…….”

전부 지웠어야 했어…… 아래위로 흔들리던 대석의 고개가 결국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태주가 상에 엎어진 대석을 내려다봤다.

“미안하다, 태주야…… 면목 없는 거 알지만, 우리 나정이 그냥 모른 척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우리 나정이, 그냥 내버려 두면……,”

드문드문 이어지던 목소리가 이내 완전히 끊어졌다.

몸을 일으켜 맞은편으로 다가간 태주가 대석을 등에 업었다.

잠시 후 안방에 깔아둔 요 위에 대석을 눕힌 태주는 한동안 자리를 지키다 방을 나섰다.

나정을 기다리지 않고 이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가 나무로 된 거실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었을 때였다.

딸랑딸랑.

살짝 열린 나정의 방문 틈새로 어떤 소리가 새어 나왔다.

“…….”

자리에 멈춰 선 태주는 홀린 듯 그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곧이어 한 손을 뻗어 방문을 밀었다.

딸랑딸랑.

그건, 천장에 매달린 자개 모빌에서 나는 소리였다.

하얀 조개껍데기가 허공에서 부딪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태주는 시선을 거뒀다. 그러곤 방에서 나가려는데, 문득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순간 태주의 눈동자가 조여들었다.

태주가 손을 뻗어 스웨이드 재질의 하얀 반지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화장대 구석에 자리한 케이스는 마치 새것처럼 깨끗했다. 그 안에 든 반지도 마찬가지였다.

“…….”

3캐럿쯤 돼 보이는 다이아 반지. 그게 결혼반지라는 건 누구라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반지를 내려다보는 태주의 시선이 얼음장처럼 식었다. 얼기설기 엮인 무수한 감정들이 눈동자 안에서 터지듯 피어올랐다.

***

“아빠, 자……?”

나정이 요란하게 코를 고는 대석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나하게 취한 대석은 이미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대석 옆에 숙취해소제를 내려놓은 나정이 방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술상은 있는데 태주가 보이지 않았다.

집 앞에 세워진 마세라티가 그대로인 걸 보면, 다시 호텔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거실 한가운데 멍하니 서있던 나정은 문득 불어오는 밤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대문 밖으로 어둠에 잠긴 협재 바다가 보였다.

나정은 뭐에 홀린 듯 다시 신발을 주워 신고 집을 나섰다.

협재 바다는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었다.

모래사장을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사박사박 소리가 났다. 나정은 빛 한 줌 없는 해변을 크게 둘러보았다. 머지않아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태주였다.

태주는 멀거니 선 채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잠긴 비양도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정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왠지 다가가면 안 될 것 같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와중에도 바다는 계속해서 철썩거리며 성난 소리를 냈다.

다시 고개를 든 나정이 결심이 선 듯 태주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세요.”

그렇게 물었을 때, 바다에 고정되었던 태주의 고개가 비소로 움직였다.

얕은 날숨을 내쉬는 그의 입술 새로 새파란 입김이 피어올랐다.

“왜 여기 계세요. 추워요, 그만……,”

말을 잇던 나정이 일시 정지하듯 움직임을 멈췄다.

태주가 들고 있던 반지가 반짝였다.

검지 끝에 걸려있는 건 분명 자신의 결혼반지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태주와 자신의 결혼반지.

“그걸 왜 가지고 있어요?”

목소리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남의 방에 멋대로 들어간 거예요?”

나정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태주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정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눈으로 좇았다.

“아직 못 잊은 거였어?”

“뭐라고요?”

“네 전남편 말이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따위 반지를 아직까지 간직할 리가 없잖아.

“내가 네 전남편을 닮아서 불편하고 껄끄럽다며.”

한마디 한마디 끊어 뱉는 태주의 눈빛이 탁했다.

“사실 넌 나한테 흔들릴까 봐 무서웠던 거야. 그래서 그렇게 기를 쓰고 날 밀어냈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반지 이리 줘요.”

나정이 손을 뻗었다.

태주는 그 손을 강하게 낚아챘다. 그리고 지그시 시선을 내리자 손목에 아로새겨진 희미한 흉터가 보였다. 꽤 깊게 그은 듯했다.

태주는 그 흉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혼 후에 죽으려고 했다며.”

“이거 놔요.”

“그럴 거면 왜 헤어진 거지?”

그렇게밖에 못 살 거면, 왜?

빛 꺼진 눈동자가 순수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반지 내놔요.”

손목을 비틀어 빼낸 나정이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태주는 애초에 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아랑곳없이 반지를 던져버렸다.

“뭐 하는 거야!”

철썩대는 파도 소리에 서릿한 외침이 고스란히 묻혔다.

반지를 집어삼킨 바다가 눈앞에 검은 장막처럼 넘실거렸다. 나정은 망연자실했다.

“네가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알면, 전남편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 이렇게 말했을 거야. 태주가 낮게 뇌까렸다.

“위선 떨지 말라고.”

그 순간 높은 곳에서 추락한 계란처럼, 나정의 마음속에서 뭔가가 탁하고 터졌다.

“이제 그만 해요.”

돌아서던 태주가 나정을 응시했다. 다시 나정의 입이 열렸다.

“모르는 척 당신 비위 맞추는 것도 이제 지쳤어.”

“…….”

“언제까지 잡아뗄 생각인데.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해요?”

나정이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나를 완전히 밀어내지도 못하고, 지독하게 미워하지도 못하고. 복수하러 왔으면 복수만 해요. 이렇게 사람 간 보면서 괜히 미적대지 말고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알아듣게 설명해.”

끝까지 잡아떼겠다고? 나정은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내 집은 어떻게 알고 날 데려다줬어요?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