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24화.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내내 얼이 빠져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태주의 차는 집 앞에 세워져 있었다.
“이런데도 날 모른다고요? 내가 당신 아내였다는 걸 정말 몰라?”
태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경멸이 섞인 표정으로 일관했다. 아니 그건 경멸이 아니었다. 혼란과 분노, 미련, 증오, 집착, 그런 것들이 찰흙 덩어리처럼 엉겨서 태주 속에서 굴러다녔다.
“그래요.”
나정은 고개를 짐짓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눈빛에서 생기가 꺼졌다.
“……그럼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이제 당신이랑은 상관없는 거야.”
정면을 향해 몸을 돌려세웠다. 나정은 망설임 없이 곧장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밤바다는 섬찟할 정도로 차고 축축했다. 발목과 무릎이 차례로 물에 잠겼다.
“뭐 하는 거야.”
나정은 멈추지 않았다.
“강나정.”
좀 더 깊이,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강나정!”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내가 무서운 건 우태주 당신이야. 나정은 열기 없이 읊조렸다.
나는, 당신한테 다시 미움받는 게 무서워.
검은 바닷물이 어느새 허리춤까지 찼다. 나정은 태연했다. 아니 그건 처연함에 가까웠다.
한 걸음 더 내디디려는데, 순간 강한 파도가 나정을 내리쳤다.
중심을 잃은 나정이 맥없이 쓰러졌다.
이대로 물에 잠겨 흔적도 없이 사라지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찰나, 거센 손아귀가 자신을 물속에서 끌어냈다.
“너 미쳤어!?”
비틀대던 나정이 눈앞의 태주를 마주 봤다.
태주의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자신의 양어깨를 거머쥔 그의 손에 우악스럽게 힘이 들어갔다. 검은 머리칼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거봐. 또 이렇게 구하러 오잖아.
“이래도 내가 누군지 몰라요……?”
나정을 붙잡은 태주의 손끝이 떨렸다. 흔들린 스노우볼처럼, 낮게 침잠돼있던 감정들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마구 떠다녔다.
“……너 미쳤어.”
그가 나정의 목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나정도 그를 받아들였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두 사람 사이에 질펀하고 깊숙한 호흡이 오갔다.
마치 삼 년 전으로 시간을 돌린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태주가 벌어진 입안을 무섭도록 파고들었다.
제 얼굴을 움켜쥔 그의 두 손이 축축했다.
키스에선 짠맛이 났다.
집요하게 입안을 훑는 숨결에 나정은 파르르 눈을 감았다.
***
홀딱 젖은 채 집으로 돌아온 나정은 내리 이틀을 앓았다.
호텔엔 연차를 쓰고, 침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조차 뜨지 않았다. 눈을 뜨면 태주가 보였다. 반지를 내던지는 태주가. 자신을 붙잡기 위해 바다로 뛰어드는 태주가. 그리고 뜨겁게 입을 맞춰오는 태주가.
우태주. 분명히 전남편은 삼 년 전 기억을 지웠다. 그건 확실했다.
어떻게 자신하냐고.
삼 년 전 태주가 스위스로 떠나던 날, 나정은 아무도 모르게 공항에 갔었다.
그냥 멀찍이서 가는 모습만 보려고 했다. 그렇게라도 태주를 보지 않으면 정말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이거, 그쪽이 떨어뜨린 것 같은데.’
먼저 말을 건넨 건 태주였다. 나정은 얼결에 그가 내미는 팔찌를 받아들었다.
작년 생일날 태주가 제게 선물한 팔찌였다. 팔찌에 매달린 작은 하트모양 참이 반짝거렸다.
왜 그 순간 팔찌가 저절로 풀어진 걸까. 왜 하필 태주가 그걸 집어 든 걸까.
아니.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정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태주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연기가 아니었다. 태주의 눈빛에 증오나 원망은 서려 있지 않았다.
정말 날 잊었구나.
나정은 받아든 팔찌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잖아 제게서 멀어지는 태주의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히 그때 기억을 지운 게 맞는데…….”
침대에 웅크린 누운 나정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결론은 하나였다. 지운 기억이 다시 되돌아왔다고밖엔 볼 수 없었다.
지난 삼 년간 우태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몇 번을 뒤척이던 나정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득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 후로 쭉 시체처럼 잠만 잔 것 같다. 보나에게 여러 번 연락이 왔지만 받지 않았다.
“나정아. 자니?”
대석은 아침저녁으로 나정의 방을 찾았다.
“아빠. 그 사람이 날 알고 있었어.”
돌아누운 나정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대석이 침대 맡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태주 씨가 날 기억해. 그래서 날 미워해.”
날 미워하면서…… 정작 날 밀어내지는 못해.
“나정아. 이참에 좀 쉬는 게 어떻겠냐.”
대석이 딸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빠 농장도 더 잘 되고 있고. 너 하나 먹여 살릴 정도는 아직 돼. 응?”
이참에 아빠랑 같이 귤이나 팔러 다닐까? 대석이 애써 던진 농담에 나정은 힘 빠진 소리로 웃었다. 투둑 떨어지는 눈물은 재빨리 손으로 훔쳤다.
그 후 꼬박 사흘을 더 앓고 나서. 나정은 방에서 나왔다.
깨끗하게 몸을 씻고, 머리 망을 하고, 대석이 다려둔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마지막까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 주임님!”
여느 직원들처럼 출근 시간에 맞춰 호텔에 들어섰을 때. 몇몇 아는 얼굴들이 인사를 건넸다.
나정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태주가 있는 30층으로 올라갔다.
“어서 오십……,”
리셉션 데스크에 서있던 안내원이 나정을 보고 흠칫했다. 차현오와의 스캔들로 호텔 내 유명인사가 된 까닭이었다.
“사직서 내러 왔는데요.”
“아…… 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티 나게 당황하던 안내원이 수화기를 들고 총지배인실을 연결했다.
“총지배인님, 지금 밖에 GRO팀 강나정 씨 와 계신데요. 네. 네. 들어오시랍니다.”
나정이 가볍게 고개 인사를 한 후 마호가니 목으로 만들어진 문 앞에 멈춰 섰다.
문에 달라붙은 황금색 도어 사인을 잠시 바라보다, 이윽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 와요.”
제게 사무적인 인사를 건네는 태주를 보며, 나정은 안 본 새 그가 좀 마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입니까.”
태주의 목소리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처럼 잠겨있었다.
그러나 나정은 안색이 안 좋아 보인다든가, 잠을 통 못 잔 거냐는 등의 선을 넘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런 질문을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품에서 꺼내든 사직서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태주의 집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뭡니까.”
서늘한 시선이 사직서 위로 내려앉았다.
“저 그만두겠습니다.”
나정은 차분하게 의사를 표명했다.
태주는 책상 위의 사직서 대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천천히, 느릿하게.
“반려하겠습니다.”
“아뇨. 그대로 수리해주세요. 어차피 뭐라고 하시든 제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그만둘 겁니다.”
나정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어쩌죠.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은데.”
찌이익. 나정의 눈앞에서 사직서가 둘로 찢어졌다.
몸을 일으킨 태주가 곁으로 다가왔다.
나정은 눈앞에 꼭 벽이 세워진 것 같은 위압감을 느꼈다.
“그래서. 몸은 좀 괜찮아요? 며칠 쉬다 온 사람치곤 안색이 안 좋은데.”
“…….”
“잠을 통 못 잔 건가.”
선을 넘는 질문들이 나정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나정은 흔들리는 눈빛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몸은 괜찮습니다.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니 사직서부터 수리해주ㅅ……,”
“그 전에. 난 강 주임이랑 아직 못한 얘기가 많은데?”
태주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나정이 회사를 나오지 않은 지난 일주일 동안, 태주는 잠자코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사실은 나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자신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자신과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고 난 후에. 적어도 태주는 나정이 크게 동요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나타난 나정은 대뜸 무미한 얼굴로 사직서를 내밀었다.
그 하얀 봉투가 제 책상에 올라오는 순간 속이 뒤집어졌다. 일그러진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강나정은 다시 제게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날 일이 걸려서 그래요? 그 키스 때문에?”
앞뒤 다 자르고 태주는 곧장 그날 얘기를 꺼냈다.
“어차피 몸을 섞은 것도 아닌데 굳이 일까지 관둬야겠습니까?”
태주는 일부러 아픈 말을 골라 나정을 찔렀다.
“그날 일은, 실수였어요. 잊어주세요.”
이내 나정에게서 더 아픈 말이 돌아왔다. 왜 아픈지는 몰랐다. 태주는 욱신거리는 손끝을 미세하게 말아쥐었다.
그리고 다시 나정의 입이 열렸다.
“우태주 총지배인님의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전 말씀드린 대로 여길 나갈 겁니다.”
“달라질 게 없는데 왜 도망칩니까?”
태주가 적나라하게 비꼬았다.
나정은 차라리 솔직해지기로 했다.
“더는 버티기가 힘들어서요.”
이렇게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내가 죽겠어서.
“사직서는 다시 작성해서 인사과에 제출하겠습니다.”
더 이상 남은 말도, 나눌 말도 없었다. 나정이 몸을 돌려 문손잡이를 붙들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려는 순간, 등 뒤로 다가선 태주가 열린 문을 다시 쾅 하고 닫았다.
“똑똑히 들어, 강나정.”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한 손으로 문고리를 쥐고, 다른 손으론 나정의 등을 받친 채, 태주가 지껄였다.
“미안하지만 난 널 놔 줄 생각이 없어.”
이렇게 쉽게 놔 줄 거였으면, 애초에 널 찾지도 않았어.
“……기어이 옆에 두고 피를 말려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태주는 그렇게 묻는 나정이 뻔뻔하다고 생각했다.
넌 내 지난 삼 년이 어땠는지 모르겠지.
나정의 등을 받치고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태주의 눈앞으로 어떤 잔상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