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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25화 (25/60)

전남편이 부임했다 25화.

기억을 지우고 일 년. 그래 처음 일 년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늘 같은 여자가 나오는 꿈이었다.

처음엔 형체가 희미했던 여자는 점차 윤곽이 뚜렷해졌다. 태주는 그 여자가 자신을 버린 아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정아.

꿈에서 깰 때면 항상 부르짖던 이름이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습관처럼 입안에 밴 이름.

“궁금했어. 왜 네 꿈을 꿀 때마다 이가 악 물리도록 화가 치미는 건지.”

밤마다 자신을 괴롭히던 악몽은 끝내 발작으로 이어졌다. 눈앞이 탁 꺼지며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결국 스위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약물치료를 받았다. 거기다 최면요법까지 더해 태주는 끊어진 기억을 복원했다. 물론 되찾은 기억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도 나정과 좋았던 추억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네가 날 물 먹이고 내 친구와 놀아났다는 거야.”

절대로 남편이 떠올리지 않길 바랐던 기억이 돌아왔다.

“이딴 사직서 쪼가리나 달랑 던져두고 도망갈 생각은 접어요. 강 주임.”

“…….”

“내가 놓기 전까진 강 주임은 아무 데도 못 가니까.”

나정은 차가운 숨을 가까스로 내쉬었다.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일을 관둬?!”

먼지가 켜켜이 쌓인 비품실에서 추계 유니폼 수량을 확인하던 보나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나정아. 우 총이랑 얘기된 거야? GRO팀은 우 총 직통이잖아.”

“얘기했어. 관두겠다고.”

“뭐래? 그러래?”

안 되는데, 내가 바란 건 이런 게 아닌데?? 보나가 초조한 침을 삼켰다.

“호오옥시 며칠 전에 우 총이 너 본가 데려다준 날, 무슨 일 있었어?”

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에서 알 수 있었다. 둘 사이에 사건이 있었다는 걸.

“호오오오오옥시 우 총 기억이 돌아왔다거나, 애초에 널 지운 적도 없었다거나…… 맞지?”

짐짓 굳어지는 나정의 얼굴을 보고 보나는 확신했다. 역시 내 촉이 맞았어! 오예! 그러나 기쁨도 잠시, 다시 미간이 구겨졌다.

“근데 왜 일을 관둬? 그럼 안 되지! 너 아직 우 총한테 미련 있잖아!”

“맞아.”

나정은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은 하루도 잊어본 적 없다. 이혼 후에도 나정은 태주의 공백을 느끼지 못했다. 잘 때도, 먹을 때도 태주는 늘 공기처럼 보이지 않게 제 곁에 머물렀다.

“나정아. 이렇게 도망치는 건 아닌 거 같아. 그때 보니까 웬 불여시 한 마리가 우 총 주변에서 얼쩡대는 것 같던데.”

보나는 여진을 떠올렸다. 호텔 로비에서 자신이 친히 어깨빵을 하사했던 그 단발머리녀. 손목에 두른 시계가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이던 그 불여시. 나보단 못 하지만 얼굴도 예쁘던데.

“너 그러다 우 총 놓친다. 우 총이 다른 여자한테 새장가 들어도 정말 괜찮아? 응??”

“괜찮지 않아서 나가려는 거야.”

“그니까 바보야! 네가 다시 낚아채야지, 내가 도와줄게.”

보나의 눈빛이 과한 의욕으로 활활 타올랐다.

“보나야. 나 그 사람 옆에 있을 자격 없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 좋은 사람 아냐.”

“뭐라니. 너처럼 성실하고 착하고 거기다 남자 문제까지 없는 애가 어딨다고,”

“남자 문제 때문에 그 사람이랑 헤어진 거야.”

순간 보나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바람을 피웠다고? 나정이 네가?”

잠깐 정적이 감돌았다. 나정은 다시 운을 뗐다.

“내가 여기 있으면 우태주 그 사람 병나. 내 얼굴만 봐도 속이 뒤집혀서 미치고 팔짝 뛸 거야.”

“잠깐. 잠깐만.”

보나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난 삼 년간 곁에서 지켜본 나정은 바람을 피울 위인이 못 됐다.

“과거에 너랑 우태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태주가 제주도까지 내려온 건 결국 너 때문이잖아.”

보나가 검지로 나정의 명찰을 꾹 찌르며 말했다.

“만약 네가 사라지면, 그때야말로 우 총은 미치고 팔짝 뛰게 될걸?”

***

갑자기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몇 시간 전 자신의 사직서를 보란 듯이 쓰레기로 만들었던 태주는, 이번엔 갑작스러운 프로젝트 추진으로 모두를 당황시켰다.

“차주 내로 VIP 고객을 타깃으로 한 룸쇼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새로 리뉴얼한 스위트룸 객실과 인피니티풀 위주로 홍보하고 세부사항은 강나정 주임 통해 나한테 전달해요.”

열다섯 명의 GRO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태주의 목소리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중 몇몇은 수첩에 뭔가를 끄적이기도 했다. 태주에게 밉보였다간 언제 모가지가 날아갈지 몰랐다. 물론 나정만은 차라리 얼른 모가지가 날아갔으면 싶었다.

“강나정 주임.”

“네.”

나정이 제게 꽂힌 태주의 시선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대답했다.

“이번 기획의 전반적인 프로세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강 주임이 맡아 진행합니다. 물론 최종 컨펌은 내가 합니다.”

“아뇨. 전 이번 기획에서 빠지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에이 무슨 소리예요! 룸쇼는 지난 회의 때 강 주임님이 내신 아이디어잖아요! 당연히 주임님이 맡아주셔야죠!”

보나가 옆에서 분위기를 몰아갔다. 나정아. 이 언닌 네가 이대로 호텔을 떠나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어.

“그럼 잘 부탁해요. 강 주임.”

나정의 대답은 들어보지도 않고 태주는 곧장 회의를 끝내버렸다.

‘난 널 놔줄 생각이 없어.’

순간 오한이 든 나정이 책상 아래에서 손을 주물렀다.

그날 이후, 룸쇼의 성공적인 성사를 위해 나정은 만사를 제쳐두고 발로 뛰었다. 야간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태주는 언제나 은근한 시선으로 그런 자신을 압박하고 옭아맸다. 도망갈 궁리조차 못 하도록 과도한 업무를 할당할 때도 있었다. 그럴수록 나정은 더욱 악착같이 일에 매달렸다. 태주 앞에서 죽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프로모션이 끝나면 제 사직서, 제대로 수리해주세요.”

룸쇼 D-2일.

오픈을 앞둔 스위트룸에서 객실 컨디션을 점검하던 태주가 고개를 비틀었다.

방이 여섯 개나 되는 이곳에 태주와 자신, 단 둘뿐이었다. 나정은 긴장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예정대로 그만두겠다고요.”

“그 얘긴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일방적으로 끝내신 거죠. 전 총지배인님 밑에서…… 아니 전남편 밑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습니다.”

태주의 눈썹이 구겨졌다. 거대한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그의 눈동자를 호박색으로 물들였다.

나정은 아무렇지 않게 침대로 가 구겨진 시트를 정리했다. 일에 집중하자.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

태주는 허리를 굽히고 시트를 정리하는 나정의 모습을 성마른 눈으로 응시했다.

‘태주 씨, 내가 잘못했어.’

돌연 눈앞으로 어떤 잔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 침대에서 그 자식이랑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안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태주 씨뿐이야…….’

태주가 한 손으로 머리를 쥐었다. 눈앞이 핑 돌았다. 나정의 목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머릿속을 울려댔다.

‘정말이라니까.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야.’

‘고재영이랑은 그냥 몸만 섞었을 뿐이야.’

‘아니. 사실은 나……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 같아.’

‘이제 꺼져줘, 태주 씨.’

끊임없이 밀려오는 목소리가 정말 나정의 것이 맞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악하게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총지배인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신……,”

환청 속에서 비틀거리던 태주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강나정.”

“!”

다음 순간, 그가 나정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미안해.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태주 씨뿐이야…….’

“사랑하는데 그런 짓을 해?”

자신을 벽으로 몰아붙인 태주가 거친 호흡으로 읊조렸다. 당장이라도 입술을 포갤 듯 가까워진 콧날이 위압적이었다.

그의 두 팔 안에 갇힌 나정은 가까스로 숨을 삼켰다.

“왜 이래. 비켜요.”

“대답해. 네가 날 사랑한 게 맞는지.”

“총지배인님!”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진심이었던 적이 있는지. 말해.”

태주는 집요했다. 아뜩한 눈빛이 나정에게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태주 씨.”

나정은 한참 만에 입술을 달싹였다.

태주의 낯빛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이곳에 온 뒤로 나정은 한 번도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준 적이 없었다.

“다 끝난 일이에요. 이제 우리 아무 사이 아냐. 정신 차려요.”

다 끝난 일. 태주가 속으로 그 말을 되뇌어보았다. 왠지 실소가 솟았다. 누구 맘대로 끝을 내.

“말했을 텐데. 내가 놔줄 때까진 넌 여길 못 벗어난다고.”

태주가 한 손으로 나정의 목덜미를 쥐었다. 처음부터 입을 맞추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피해 고개를 돌리는 나정을 보는 순간, 머리 안의 퓨즈가 끊어졌다. 그가 나정의 입술을 뜨겁게 감쳐물었다.

읍! 나정은 본능적으로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도리어 커다란 손아귀가 자신의 양 팔목을 붙잡았다.

머리가 쭈뼛할 정도로 농밀한 감촉이 입안을 파고들자 나정은 질끈 눈을 감았다. 벗어나려 애쓸수록 두 사람의 몸이 가쁘게 밀착되었다.

‘이딴 사직서 쪼가리나 달랑 던져두고 도망갈 생각은 접어요. 강 주임.’

태주의 혀가 자신을 샅샅이 훑었다.

‘내가 놓기 전까진 강 주임은 아무 데도 못 가니까.’

긴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듯 나정의 척추뼈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안 돼.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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