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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26화 (26/60)

전남편이 부임했다 26화.

나정은 있는 힘을 다해 태주를 밀어냈다. 짝! 이내 서릿한 마찰음과 함께 태주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정지 버튼을 누른 듯 객실 안의 공기마저 순환을 멈췄다.

“미친놈.”

후려친 태주의 뺨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나정은 얼얼한 손을 꽉 쥐었다. 여기서 한 대 더 뺨을 올려붙인대도 속이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결국 당신이 원하는 게 이런 거였어? 이런 식으로 나한테 복수하는 거야?”

태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정은 속에서 뭔가가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태주가 미운 건지, 태주가 가엾은 건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줄게.”

나정이 입고 있던 유니폼 재킷을 벗었다. 까만 재킷이 객실 바닥에 툭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걸까. 태주의 시선이 짧게 흔들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정은 멈추지 않고 와이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끄르기 시작했다.

머잖아 새하얀 속옷 사이로 봉긋한 곡선이 드러났다. 아랑곳없이 다시 네 번째 단추를 끄르려던 찰나였다.

태주가 제 손을 낚아챘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면 재미없잖아.”

메마른 한마디가 면전에 날아와 꽂혔다. 일부러 상처를 주기 위해 한 말이라면 대성공이었다. 나정은 가슴에서 욱신한 통증을 느꼈다. 단추를 풀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돼?”

“…….”

“삼 년 전 그 일,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거 알아. 내가 당신한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도 알아.”

“……”

“그러니까 말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차라리 무릎이라도 꿇을까. 당신 앞에 납작 엎드려서 죽는시늉이라도 해?”

떨리는 목소리로 태주를 채근했을 때였다.

“다시 돌아와줘.”

뭐? 나정의 눈이 조여들었다. 온몸의 장기가 발밑으로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었다. 동요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멍하니 태주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말하면 네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어.”

다시 열린 태주의 입에서 냉담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그렇구나. 나정은 돌연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나정은 재빨리 고개를 내렸다. 그래서 그 순간 태주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보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손목을 쥐고 있던 커다란 손에 힘이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너한텐 고재영이 있잖아. 안 그래?”

뒤이어 낮게 까라진 한마디가 들려왔다.

고재영. 매번 나정을 긴장시키는 이름이었다. 자신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이름.

“룸쇼가 끝나면 원하는 대로 호텔에서 나가게 해줄게.”

“…….”

“그 자식 옆에서 어디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봐.”

태주가 어깨를 스치며 곁을 지나쳤다. 이윽고 객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며 정적이 나정의 몸을 휘감았다.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다리가 그제야 풀썩 자리에 스러졌다.

***

장기 환자가 머무는 병실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깔끔했다. 하루 종일 볕도 잘 들어서, 삼 년째 시체처럼 누워만 있는 재영은 언뜻 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나정이 재영을 향해 의미 없는 인사를 건넸다. 일 년 만에 마주한 재영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감긴 눈꺼풀엔 작은 떨림조차 일지 않았다.

“자요?”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질문을 던졌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정은 병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곳은 바깥세상과 완벽히 단절된 것 같았다.

삼 년 전, 자신과 떠난 밀월여행에서 전복 사고를 당한 재영은 계절이 열 번이나 바뀌도록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나 아침 비행기 타고 왔어요. 비번이라 오늘 출근 안 하거든요. 서울은 따뜻하네요.”

꼭 친구에게 수다 떨듯 말을 건넸다. 당연한 얘기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잠깐 침묵하던 나정이 내내 입안에서 굴리던 말을 꺼냈다.

“전남편이 한국에 들어왔어요. 나에 대한 기억이 돌아왔대요. 그래서 복수하고 싶은가 봐요.”

태주를 떠올리자 문득 입술이 뜨거워졌다.

나정은 침대에 누운 재영을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일 년 만에 보는 얼굴인데도.

이렇게 눈앞에 있는 재영보다, 눈앞에 없는 태주를 떠올릴 때 더 가슴이 시큰했다.

“이상하죠.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땐 왜 그랬을까요.”

눈앞으로 재영과 몸을 섞던 순간이 지나갔다.

태주와 사랑을 나누던 침대에서, 자신은 재영과 호흡을 나눴다. 급하게 벗은 옷가지가 바닥을 나뒹굴었고, 방 안은 순식간에 더운 열기로 가득 찼다. 귓불을 자극하던 다른 남자의 신음소리. 나정은 기억을 지우려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여길 어디라고 와?”

그때였다. 병실로 들어서던 초췌한 몰골의 한영숙이 침대맡의 나정을 보고 눈을 치떴다.

“안녕하셨어요.”

나정은 몸을 돌려 인사를 건넸다. 한영숙의 눈에는 그런 나정이 악랄하디 악랄한 괴물처럼 보였다.

“네가 여길 왜 와! 무슨 염치로 와!? 한 번만 더 나타나면 너 죽이고 나도 콱 혀 깨문다 그랬지!”

한영숙의 반응은 격했다. 예상했던 바였다. 나정은 욕설을 내지르는 한영숙 앞에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삼 년 전 사고 당시, 생명이 위독했던 재영과 달리 자신의 부상은 가벼웠다. 마주 오던 탑차와 충돌하려는 순간, 재영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은 덕분이었다. 그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나정은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한영숙 앞에서 늘 벙어리가 되었다.

“천하의 몹쓸 년! 네가 내 아들 잡아먹은 거야! 너만 아니었으면 우리 재영이 저렇게 안 됐어!남편도 있는 애가 왜 멀쩡한 내 아들을 꼬여내. 왜!”

그 후로도 절절한 고성이 얼마간 병실을 울렸다.

“이거 받으세요. 다신 오지 않겠습니다.”

나정이 음료수 상자를 내밀었다.

“이딴 건 뭐하러 들고 와!”

한영숙이 나정의 손을 뿌리쳤다. 덕분에 상자가 퍽 소리를 내며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주스 병이 깨진 건지, 상자 밖으로 노란 액체가 콸콸 흘러나왔다.

나정은 말없이 휴지곽을 들고 주저앉았다. 휴지를 뽑아 흥건한 주스를 닦고, 깨진 음료수병을 맨손으로 치우기 시작했다.

한영숙은 그 모습을 보며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나정이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아들이 좋아했던 여자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했다.

“…….”

한편 태주는 벌어진 문틈 새로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날렵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가 너만 보면 속이 뒤집어져! 다신 오지 마, 절대!”

한영숙이 눈물을 훔치며 병실을 나섰다. 아들의 친구였던 태주를 미처 알아보지 못한 채, 그녀가 복도를 가로질러 사라졌다.

잠깐 동안 한영숙에게 머물렀던 태주의 시선이 다시 나정을 향해 움직였다.

나정은 여전히 병실 바닥을 치우고 있었다. 그 옆으로 핏기없이 누워있는 고재영이 보였다.

차라리 너희 둘이 한 게 사랑이었으면 내가 좀 덜 아팠을까.

태주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눈빛에 스며있던 약간의 온기마저 사라졌다.

강나정과 고재영이 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 더러운 욕정이었지.

“……고재영.”

태주는 그 이름을 낮게 되뇌어보았다.

일어나지 마. 절대로.

“거기 누워있는 편이 훨씬 덜 고통스러울 거야.”

그가 나정과 재영을 버려둔 채 돌아섰다.

***

“네. 김 비서님. 오랜만이네요.”

제주 애월읍에 위치한 화실. 창밖으로 탁 트인 바다와 해안도로가 보였다.

캔버스 앞에 앉아있던 여진이 붓을 내려놓고 스피커폰 버튼을 터치했다.

“아버진 잘 계시죠? 다음 주중에 한 번 찾아뵌다고 전해주세요.”

아버지의 최측근인 김 비서는 오래전부터 집안의 골치 아픈 일을 대신 해결해주던 인물이었다.

여진 역시 아버지뻘인 그를 신뢰했다. 스위스에서 태주에게 여자가 붙으려고 할 때마다, 저 대신 여자들을 처리한 것도 김 비서였다.

-오늘 고재영 씨 병원에 강나정이 다녀갔답니다.

그런 김 비서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붓을 잡으려던 여진의 손이 멈칫했다.

“누가 다녀갔다고요? 강 나정?”

-한영숙 씨와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방 쫓겨난 모양입니다.

“그래요……?”

여진은 침착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초조한 낯빛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일 년 내내 얼굴 한 번 안 비추던 애가, 왜 갑자기 거길 간 거지? 여진이 손톱을 물었다.

“김 비서님.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고재영이 다시 깨어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행히 기다렸던 대답이 돌아왔다. 하, 여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재영은 삼 년 전 사건의 키를 쥔 인물이었다. 절대로 깨어나서는 안 되는.

***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환영합니다. 고객님.”

클럽 라운지는 룸쇼를 보기 위해 모여든 VVIP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GRO들이 무료로 제공되는 최고급 와인을 쟁반에 받쳐 열심히 고객 사이를 돌아다녔다.

“우리 이번 프로모션 첫날부터 완전 대박 조짐이 보이지 않니?”

들뜬 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아, 이번 기획 잘되면 다음 인사고과에서 너 승진할지도 몰라. 우리 GRO팀, 물론 우 총이 임시로 돌봐주곤 있지만, 아직 팀장 자리 공석이잖아.”

보나는 시시때때로 나정에게 승진이니, 인사고과니 하는 말을 나불거렸다. 어떻게든 나정의 퇴사를 막기 위한 나름의 눈물겨운 노력이었다.

“그러게. 네 말대로 대박 났음 좋겠다.”

나정은 가볍게 웃었다. 물론 목표는 승진이 아닌 퇴사였지만. 그녀가 눈앞의 현장을 기민한 시선으로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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