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27화.
이번 룸쇼는 일반적인 프로모션과 다르게 진행되었다. 미리 초청장을 받은 VVIP고객들과 상위인사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자리였다. 나정이 필두에 서서 그들에게 새로 단장한 스위트 객실과 부대시설을 소개할 예정이었다.
“강 주임.”
객실을 최종 점검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익숙한 중저음이 들려왔다.
“객실 온도 셉업했습니까?”
“네. 현재 22도입니다.”
“침구는.”
“체크했습니다.”
나정이 이집트산 순면으로 만든 침구를 한 번 더 점검했다.
태주와는 하루 종일 사무적인 대화만을 주고받았다.
불과 이틀 전 이 객실에서 있었던 강렬한 입맞춤은 서로 간에 함묵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나정아! 밖에 누가 왔는지 알아!? 어어, 총지배인님도 계셨네요.”
살짝 멋쩍어하던 보나가 나정을 향해 슬쩍 몸을 기울였다.
“밖에 영화배우 차세령 와있다?”
“차세령?”
“응. 이준모도 같이 왔더라. 요새 엄청 핫한 모델. 초청장을 보내긴 했는데 진짜로 올 줄은 몰랐거든!”
보나는 연신 대박! 대박! 을 외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기 봐. 차세령이다.”
“어머 어머.”
얼마 후 라운지로 나온 나정은 보나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았다. VIP 고객들 사이에서 남다른 아우라를 뽐내고 있는 차세령이 보였다.
“강…… 나정 주임님?”
나정의 명찰을 훑은 차세령이 살짝 선글라스를 내렸다.
“행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제 팔로워가 사백만 명인 건 아시죠? 제가 빵빵하게 홍보해드릴게요.”
차세령은 방송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쾌활한 성격이었다. 나정은 제게 친근하게 구는 눈앞의 스타를 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 현오 오빠는 잘 있죠?”
“네 고객님……?”
“스케줄이 있어서 못 보고 간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연락 좀 제때제때 받으라고 꼬오옥 전해주시고요.”
“아. 네.”
고개를 끄덕인 나정이 지인들과 함께 돌아서는 차세령을 바라봤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차현오…….”
자리에서서 현오의 이름을 되뇌던 나정이 곧 핸드폰을 들고 돌아섰다.
-어. 주임님.
직원 휴게실로 통하는 복도. 쏟아지는 햇볕을 등진 채 나정이 핸드폰을 귀에 댔다.
“고객님.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오늘 차세령 씨한테 호텔에 와달라고 부탁하셨어요?”
-부탁까진 아니고.
현오가 한 손으로 눈가를 비비며 픽 웃었다.
-나름 딜이었지. 그 프로모션 홍보해주는 대가로 세령이한테 내 한정판 마이클 조던 블랙토를 넘기기로 했거든.
한정판 블랙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현오가 자신을 도운 게 분명했다.
“감사해요. 차세령 씨랑 그 일행이 홍보해준 덕에 벌써부터 SNS 반응이 뜨거워요.”
-정말 도움이 돼?
현오는 조금 안도했다. 저와의 스캔들로 나정이 호텔에서 곤욕을 치를까 내심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도울 수 있는 게 고작 이런 것뿐이라 좀 멋쩍기도 했지만.
-수고해 주임님. 열심히 해서 쭉쭉 치고 올라가라.
귓전을 울리는 나른한 중저음에 나정은 순간 대꾸할 말을 잃었다. 저 이번 일만 끝나면 호텔 그만두려고요. 차마 그 말이 나오지 않아서 화두를 돌렸다.
“고객님은 안 오세요? 차세령 씨가 고객님 안부를 물어보시던데요.”
-지금은 못가. 나 근신 중이잖아.
“아…….”
나정은 말끝을 흐렸다. 잠깐 정적이 흐르다 현오가 대뜸 물었다.
-갈까?
“네?”
-네가 원하면 갈게.
차현오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나정은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고객님, 아무래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등 뒤에서 나타난 손이 핸드폰을 휙 빼앗아갔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우태주? 나정이 눈동자가 커졌다. 태주의 손에 자신의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아직 행사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데서 한가하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고.”
태주가 핸드폰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언뜻 들리던 차현오의 목소리가 그대로 끊어졌다.
“죄송합니다. 다시 현장 복귀하겠습니다.”
휴식 시간이라 팀원들과 교대로 돌아가며 자리를 비웠을 뿐이다. 그러나 나정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자신을 바라보는 태주의 냉혹한 시선은 변하지 않을 테니.
“핸드폰은 돌려주세요.”
나정이 손을 뻗었다. 자신을 빤히 보던 태주가 곧 통화목록에 있던 차현오의 번호를 삭제해버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나정이 낚아채듯 자신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왜 함부로 손을 대세요?”
“고객과의 소통은 사내 연락망을 통해서만 합니다.”
태주의 몸이 나정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이내 낮고 굵직한 탁성이 나정을 흔들었다.
“차현오와 개인적인 통화까지 주고받는 사이였나?”
“…….”
“정신 차려. 얼빠진 스캔들에 다시 휘말리기 싫으면.”
눈앞에 드리워진 태주의 그림자가 훅 떨어져 나갔다.
나정은 돌아서는 전남편의 등에 대고 불쑥 입을 열었다.
“질투하세요?”
“……뭐?”
태주의 눈자위에 힘이 들어갔다. 나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제 일에 너무 관여하지 마세요. 총지배인님이야말로 저랑 얼빠진 스캔들에 휘말려서는 안 되는 분이니까요.”
***
“오늘 여러분 앞에 선보일 이그제큐티브 객실은 총 다섯 개입니다.”
대리석 복도를 걷던 나정이 라운지 중앙에 걸음을 세웠다. 그러자 팸플릿을 든 VVIP 고객들도 따라서 걸음을 멈췄다.
이미 새롭게 리뉴얼한 인피니티풀과 비즈니스 룸, 그 외 VIP 전용 부대시설을 모두 돌아본 후였다. 이제는 가장 중요한 객실 소개만이 남아있었다.
나정은 멀찍이 선 태주를 힐긋 바라봤다.
태주 옆엔 박한성 상무를 비롯한 임원진 몇 명이 함께 있었다. 나정은 긴장하지 않으려 애쓰며 고개를 바로 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저희 호텔이 새롭게 선보일 프레지덴셜 스위트 객실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프랑스의 건축가 로라 베흐나가 직접 설계에 참여해 화제가 되었던 스위트 객실은, 컨템포러리 클래식 컨셉을 기반으로 한……,”
말을 잇던 나정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었다.
저 멀리,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회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됐어. 여진이만 남고 다들 밑에서 대기해.”
“네.”
수행비서가 하 회장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숙인 후 물러섰다.
나정은 여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다가오는 하 회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헉. 그때 그 불여시?”
보나가 저도 모르게 여진을 손가락질했다가 움찔하며 팔을 원위치했다. 그리고 슬쩍 나정의 눈치를 살폈다.
“또 본다, 우리.”
그사이 나정에게 다가선 하문옥 회장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음성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나정은 하 회장 앞에 고개를 숙였다.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 비식, 입꼬리를 올리는 여진과 눈이 마주쳤다.
“재경 그룹 하문옥 회장 아니야?”
“여기서 하 회장을 볼 줄이야.”
몇몇 사람들이 하문옥 회장을 알아보고 수군댔다.
태주와 함께 있던 박한성 상무도 부리나케 달려왔다.
“뵙게 돼 영광입니다, 회장님!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 회장이 직각으로 허리를 굽히는 박한성 상무에게 눈길을 보냈다가, 곧 멀찍이 서 있는 태주를 응시했다.
“아들 녀석 얼굴이나 볼 겸 왔는데, 늙은이가 초대받지 못한 자리에 눈치 없이 나타난 건가?”
“아닙니다 회장님!”
박한성 상무는 티 나게 굽신거렸다. 굶주린 호랑이 앞에 사슴처럼, 그것은 본능적인 움츠림이었다.
“…….”
태주는 난데없는 어머니의 방문에 반가운 기색은커녕, 노골적으로 미간을 굳혔다. 그의 시선이 잠시 나정에게 가 머물렀다. 어머니가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났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되었다.
팍팍하게 굳어진 아들의 표정을 무시한 채, 하 회장은 나정을 향해 돌아섰다.
“온 김에 객실을 좀 둘러보고 싶은데, 괜찮겠니?”
“그럼요 회장님. 나정이가 안내할 겁니다.”
여진이 재빨리 옆에서 거들었다. 그녀는 아까부터 하 회장 옆에 달라붙어 수족을 자처하고 있었다.
나정은 말없이 하 회장과 시선을 섞었다.
하 회장은 전며느리이자, 이제는 태주의 부하직원인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했다.
네 스스로 호텔을 떠나지 않으면, 나는 힘을 행사할 수밖에 없단다. 하문옥 회장의 눈빛엔 냉혹한 의미가 숨어 있었다.
나정은 살짝 숨을 들이켰다.
“이쪽으로 오시죠, 회장님.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번 룸쇼의 하이라이트인 ‘프레지덴셜 스위트 객실’은 총 6개의 방과 1개의 미팅룸, 2개의 응접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복도 왼편에 개인 사우나와 헬스실이 별도로 마련돼 있습니다.”
“프랑스 니치 퍼퓸 브랜드인 딥디크를 욕실 어메니티로 차용하였습니다.”
객실에 미리 배치된 GRO들이 친절한 미소로 고객들을 응대했다.
나정 역시 여진과 하 회장을 충실히 어드바이스 하고 있었다.
“태주 씬 많이 바쁜가 봐요, 회장님.”
여진이 하 회장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태주는 아까부터 다른 고객들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 회장은 아들의 시선이 때때로 이쪽을 향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강나정 이 아이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 일은 할 만한가?”
난데없는 질문에 나정이 고개를 돌렸다.
“네. 적성에 맞습니다.”
“하기는. 결혼하기 전 전공이 이쪽이라고 했지. 호텔경영학?”
“네.”
시어머니가 그런 걸 기억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나정은 문득 상념에 젖었다.
‘따님을 참 바르게 키우셨습니다.’
첫 상견례 자리에서 아버지 대석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던 하 회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회사에서는 잔혹한 기업가로 정평이 나 있지만, 하나뿐인 며느리에게는 의외로 다정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시어머니. 나정이 씁쓸한 기분에 젖어 다시 하 회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