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이 부임했다-29화 (29/60)

전남편이 부임했다 29화.

“나도 듣는 얘기가 많아. 차현오뿐만 아니라 다른 고객과도 더러운 성추문으로 엮여있다며? 역시. 나정이 넌 참 여전해?”

“입 다물어.”

순간 여진을 몰아세운 건 나정이 아니었다.

“내 직원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내쉬는 날숨엔 억누른 분노가 배여 있었다.

여진이 나정과 제 사이를 가로막은 태주를 빤히 올려다봤다.

직원? 정말 강나정이 직원일 뿐이야?

가슴 저편에서 배신감이 차올랐다. 저토록 감정이 앞서는 태주의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나정의 일에 매번 평정심을 잃는 그가 미치도록 미웠다.

“그거 알아, 태주 씨?”

여진은 자신이 악수를 두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나정이 말이야. 바람 나서 차버린 전남편이랑 얼마 전부터 다시 만나는 모양이야. 그냥 놓치기엔 꽤나 아쉬웠나 봐. 하긴 남자 없인 몸이 달아 하루도 못 사는 애니까. 애초에 전남편을 선택한 이유도 사랑이 아니었ㅇ……,”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거센 손길이 여진의 멱살을 그러쥐었다.

“아는 척 함부로 지껄이지 마.”

“!”

“너 따위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야.”

태주의 선득한 눈동자가 좌우로 거세게 흔들렸다.

윽, 여진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태주 씨!”

나정은 저도 모르게 태주의 팔을 붙잡았다. 여진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이러지 마요! 이건 아냐. 태주 씨!”

흐트러진 태주의 눈빛이 나정을 향해 내려섰다.

“그만해요. 응?”

나정은 한 번 더 애원했다. 자신이 태주를 딱딱한 호칭 대신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상태였다.

“…….”

태주의 시선이 잠깐 동안 나정에게 붙박였다. 나정은 내내 차갑기만 했던 태주의 표정이 한순간 느슨해지는 걸 보았다. 그동안 한 번도 지어준 적 없던 표정이었다.

이윽고 여진의 멱살을 그러쥐었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다신 쓸데없이 호텔에 들락거리지 마. 여기 네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 놀이터 아냐.”

여진에게 마지막 통첩을 던진 후, 태주가 상체를 비틀어 돌아섰다.

나정의 시선이 그런 태주를 하염없이 좇았다.

“……끝난 게 아니었구나. 너희 둘.”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하 회장의 입에서 적요한 혼잣말이 흘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여진은 하 회장의 등 뒤에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앞서 걷는 하 회장에게서는 이렇다 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란히 스위트 객실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을 벗어나는 내내, 그리고 미리 대기시켜둔 차에 올라타기 직전까지도 하문옥 회장은 여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여진아.”

“네, 회장님.”

차에 오른 하 회장을 향해 여진은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창문 밖에 죄인처럼 선 그녀를 하 회장은 온기 없이 내리훑었다.

“객실에서 있었던 일. 네가 꾸민 짓이니?”

순간 말문이 막힌 여진은 황급히 둘러댈 말을 찾았다.

“회장님, 말씀드렸다시피 전 그 일과 아무 관련 없습니다. 제가 설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성인용품을 제 손으로 거기 뒀을까요. 아무리 나정이가 미워도 그런 짓은 못 합니다. 전 정말 모르는……,”

“추하다, 여진아.”

하 회장의 한마디가 오함마처럼 여진을 내려쳤다.

“영리하지 못할 거면 영악하게라도 굴어야지. 보는 내 얼굴이 다 뜨겁더구나. 어떻게 그렇게 미련한 수를 써?”

“회장님. 전…….”

여진의 말이 꺼진 불씨처럼 중간에서 잦아들었다. 이제 와 변명을 한다 한들 하 회장에게 통할리 만무했다.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벌써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는지 모른다. 여진은 더욱 깊이 수그렸다. 행여 하문옥 회장의 눈 밖에 날까 두려웠다. 어떻게든 하 회장을 구워삶아 반드시 태주를 제 손에 넣어야 했다. 그때까진 이 여자가 죽으라면 죽는시늉도 할 수 있었다. 여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일은 제가 책임지고 덮겠습니다, 회장님. 어차피 영상 증거도 불충분한 데다, 태주 씨도 행사 책임자인 강나정의 입장을 고려해 더 이상 문제를 걸고 넘어지진 않을 겁니다.”

말을 마친 후 하 회장의 표정을 살폈다. 도저히 저 늙은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 태주 기억이 돌아온 건 알고 있니.”

순간 여진의 고개가 바로 섰다.

“네……?”

“몰랐다곤 하지 마라.”

하 회장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이었다.

“태주가 그 앨 대하는 표정만 봐도 알겠더라. 애초에 연고 없는 제주도에 내려온 이유도 다 강나정 때문이겠지.”

차 창밖의 여진은 넋이 나간 듯 말을 잇지 못했다. 하 회장은 가볍게 혀를 찼다.

“여진아 헛수고 마라. 네가 아무리 악을 써도 맺어질 사람들은 어떻게서든 맺어진다.”

“…….”

“태주 네 짝 아니다. 그만 포기해.”

“회장님…… 저 태주 씨 사랑해요. 나정이한테 뺏길 수 없어요.”

하 회장이 가소롭다는 듯 실소했다.

“뺏기다니. 애초에 태주를 가진 적이나 있었니?”

여진의 낯빛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이윽고 지잉, 창이 닫히며 하 회장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 앞에서 너무 뻐기지 마세요, 회장님. 우태주 기억이 온전하다는 거. 나도 알고 있었어.”

끝끝내 모른 척하고 싶었을 뿐이지.

남겨진 여진이 까득, 이를 갈았다.

***

아버지에게 스무 살 생일 선물로 받은 제주도 집은 혼자 지내기에는 너무 컸다.

식탁에 앉은 여진이 평온한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런데 칼날이 무뎌진 탓일까. 나이프가 잘 들지 않았다.

점차 고기를 써는 여진의 칼질이 과격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나이프로 접시를 부술 듯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여진은 기어이 식탁 위의 모든 그릇을 한 팔로 쓸어버렸다.

발밑에서 요란하게 접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여진은 접시룰 치울 생각도 않고 한참을 미동 없이 앉아있었다.

“강나정.”

그 이름을 가만히 혀로 굴려보았다. 한때는 살갑던 이름이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하는 이름.

‘이러지 마요! 이건 아냐. 태주 씨!’

태주의 팔을 붙잡고 자연스럽게 그를 제지하던 나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태주에게 닿았던 나정의 손을 마디마디 가위로 잘라버리고 싶었다. 이건 단순히 미워하는 감정을 넘어선 증오였다.

삼 년 전의 태주는 아내를 정신없이 사랑했다. 현재의 태주는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자신이 얼마나 절절히 나정을 갈구했는지. 어떤 식으로 밤마다 나정을 안았는지. 사랑한다는 말이 당연해졌을 즈음엔 또 어떤 말로 나정의 몸을 뜨겁게 만들었는지.

“!”

여진이 저릿한 아픔에 검지 손톱을 내려다봤다. 피가 나도록 잘근잘근 물고 있었는데도 몰랐다.

싱크대 수전 앞으로 간 여진은 흐르는 물에 상처를 갖다 대며 생각했다.

우태주의 기억을 다시 지울 수 없다면, 강나정을 그의 시야에서 치워버리면 된다고.

***

“나정아. 너 고객 픽업하러 언제 가?”

“지금 다녀오려고. 여긴 네가 좀 맡아줘. 금방 올게.”

“오키.”

룸쇼 이틀째 날. 배우 차세령의 적극적인 홍보 덕분일까. 행사장이 어제보다 훨씬 붐볐다.

한 시간 전 갑작스런 고객의 픽업 요청을 받은 나정은 의전차량을 몰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이곳이 관광도시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야자수들을 지나, 동쪽 해안도로를 한참 더 달려 도착한 곳은 전면이 숲으로 우거진 독채 건물이었다.

보통의 경우 고객을 픽업하는 장소는 공항 입국장이었다. 나정은 의아한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곧이어 장미 덩굴로 뒤덮인 아치형 대문이 철컹, 열렸다.

잠시 후 신발을 벗고 전면이 모두 새하얀 화실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정은 비로소 자신을 부른 고객과 대면할 수 있었다.

“왔니? 앉아.”

제 몸보다 큰 캔버스 앞에서 붓질을 하던 여진이 돌아보지도 않고 인사를 건넸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웃음기 없이 던진 말에 여진은 아랑곳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내 작업실이야. 나 그림 그리는 거 좋아했잖아. 태주 씨 따라 스위스 머물면서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여전히 재밌어 그림은.”

“날 부른 이유가 뭐야?”

“몰라서 묻니?”

여진이 데생 붓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태주 씨 기억 돌아왔다는 거. 왜 숨겼어?”

나정은 짧게 동요했다.

“무슨 소리야.”

“잡아뗄 생각 마. 이미 회장님도 알고 계셔.”

“뭐?”

“웃기지. 널 보는 태주 씨 눈빛이 확실히 다르긴 한가 봐.”

“…….”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그 눈빛을 애달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구차하다고 해야 하나. 나정아, 넌 어떻게 생각해?”

“미안하지만 여기서 너랑 노닥거릴 여유 없어 난.”

나정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벌써 가게?”

멈칫, 나정은 걸음을 세웠다. 들어 올 땐 보이지 않던 가드 두 명이 입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여진이 대답 대신 나정의 코앞으로 다가섰다.

“나정아. 난 말이야. 마음만 먹으면 널 영원히 이 방에 가둬둘 수도 있어. 여기 이 그림들처럼, 너도 방안의 풍경 중 하나가 되는 거지.”

여진이 연하게 웃었다.

“내가 원하면 지금 당장 네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고, 절벽에서 널 밀어버릴 수도 있어. 이 자리에서 내가 널 죽인대도 어차피 난 오늘이랑 다를 바 없는 내일을 맞게 될 거야. 내 뒤에 J그룹이 있는 한.”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원하는 거. 여진의 눈빛이 새삼 진지해졌다.

“시험해보고 싶어. 네 모가지가 정말로 부러지면 우태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 표정은 평소처럼 애달플지. 아니면 구차할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

@굴리글리 공금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