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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30화 (30/60)

전남편이 부임했다 30화.

집무실에 앉아 결재서류를 넘기던 태주가 깊어진 눈가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요즘 피로감이 상당했다. 바이오리듬이 엉망이 된 게 불면증 때문인지 아니면 강나정 때문인지 헷갈렸다.

태주 씨. 좀 쉬어가면서 해.

우리 영화 보러 갈까? 아님 좀 걸을래?

태주 씨. 이 원피스 어때?

나 좀 봐봐.

태주 씨.

나 좀 봐.

머릿속을 울리는 나정의 목소리는 언제나 실제처럼 또렷했다.

나정이 정말 옆에 있는 것 같았다. 손을 뻗으면 얼굴을 쓸어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태주가 목을 죄는 타이를 한 손으로 느슨하게 끌렀다. 그러곤 의자에 등을 기대는데, 지잉.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태주는 움직임을 멈춘 채 번호 뒷자리를 응시했다. 0411. 틀림없는 0411이었다. 태주가 그 번호를 나직하게 읊조렸다.

강나정은 유난히 0411이라는 숫자를 좋아했다.

‘4월 11일. 핸드폰 뒷자리를 우리가 처음 만난 날로 바꾸면, 매년 잊지 않고 이날을 기념할 수 있을 거야.’

나정과 자신이 4월 11일을 기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번호를 바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나정은 제게 이혼을 요구했다.

“…….”

잠시 상념에 젖어있던 태주가 이윽고 나정이 보내온 사진을 눌렀다.

아무런 단서 없이, 그저 가파른 해안절벽이 찍혀있는 사진이었다.

[지금 여진이랑 같이 있어요. 무서워요. 좀 와줘요.]

사진 아래 사족처럼 달라붙은 메시지까지 확인한 후, 태주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서류의 세부사항을 검토하거나, 보완할 지점에 따로 체크 표시를 해두기도 했다. 완벽주의 성향답게 태주는 메뉴얼 하나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차칵. 차칵.

그런데 어느 순간,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공사장의 소음처럼 태주를 흔들기 시작했다.

바쁘게 서류를 넘기던 손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차칵.

차칵.

태주는 초침 소리가 몹시 거슬린다고 생각했다. 신경 쓰였다. 조바심이 났다. 참을 수 없었다. 아니,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가야 했다. 와달라고 했으니까.

무섭다고 했으니까.

이윽고 걸쳐둔 재킷을 집어 든 태주가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제주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해안절벽이 있었다. 그중에서 사진과 일치하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태주는 몇 번이나 차에 올랐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여보세요? 초, 총지배인님……?

“강나정 주임, 현장 복귀했습니까.”

-아뇨, 아직……

태주가 귀에서 핸드폰을 떼어냈다. 그리고 다시 나정의 번호를 눌렀지만 삼십 분 전과 마찬가지로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음이 들려왔다.

“…….”

태주는 다시 천천히 사진을 관찰했다. 순간, 사진 속 눈에 익은 데크 길이 보였다. 해안절벽을 따라 꼭대기까지 길게 이어진 길이었다. 그가 차에 시동을 걸고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송악산 둘레길에 위치한 바다 절벽.

태주는 사진 속 장소와 꼭 같은 벼랑에 올라서 있었다.

처음 호텔을 나설 때만 해도 맑게 개었던 하늘은 어느덧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솨아, 그러다 갑자기 머리 위로 비가 쏟아졌다. 제주도에선 원래 소나기가 흔했다. 태주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강나정,”

퍼붓는 빗줄기 사이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순간 안도의 한숨 같은 것이 입 새로 흘렀다.

태주가 절벽 끝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나정. 이윽고 한 번 더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돌린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마주친 사람은 나정이 아니었다.

“태주 씨가 여기 절대로 나타나지 않길 바랐는데.”

비에 흠뻑 젖은 여진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너 뭐야.”

태주의 검은 머리칼에서도 쉼 없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뭐냐고.”

거듭되는 채근에도 여진은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왜 왔어, 태주 씨. 고작 사진 한 장에 일까지 내팽개치고 여기까지 달려와야 했어?”

“강나정 어딨어.”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 태주 씨가 그 정도로 미련한 인간은 아닐 거라고. 그런데.”

빗소리에 묻힌 여진의 목소리는 어쩐지 서글펐다.

“아직 나정일 사랑하는구나.”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이 여진을 짓눌렀다.

“강나정. 지금 어딨어.”

태주의 관심은 오직 나정 뿐이었다. 빗물이 여진의 뺨을 때렸다 그게 꼭 눈물처럼 보였다.

“걱정 마. 나정이한테 이상한 짓 할 생각 없으니까. 그럼 태주 씨, 나 미워할 거잖아.”

태주의 낯빛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나 정말 걔 죽이고 싶었어.

여진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핸드폰을 귀에 댔다.

“김 비서님 저예요. 나정이 돌려보내세요.”

성의 없는 한마딜 던진 후, 다시 태주를 바라봤다.

“나정이 지금 내 작업실에 있어. 손끝 하나 다친 데 없이 멀쩡해. 애초에 내 목적은 걔가 아니라 태주 씨였으니까.”

“…….”

“태주 씨 마음이 알고 싶었어. 말도 안 되는 사진 한 장에 낚여서 여기까지 나정이를 구하러 와줄까 궁금했어. 그런데…… 역시 알아보지 말 걸 그랬지.”

태주는 명백히 강나정을 사랑했다. 그게 애정이 아닌 애증일지언정.

“자길 배신한 아내를 삼 년이 지나도록 놓지 못하고 있다니. 정말 대단한 순애보야.”

노골적인 비아냥에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나 태주 씨 기억 돌아온 거 알아.”

“…….”

“뭐 상관없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정이는 어차피 과거에 매여있는 인연일 뿐이니까.”

걘 절대 태주 씨의 현재가 될 수 없으니까.

“태주 씨. 나한테 기회를 줘. 마음까진 달라고 안 해. 기회만 줘.”

머리 위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이젠 서로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넌 삼 년이나 날 속였어.”

돌연 태주의 입이 열렸다.

“내가 강나정과 어떤 사이였는지 알면서도 넌 우연을 가장해 나한테 접근했어.”

“태주 씰 사랑해서 그런 거야! 난 태주 씨한테 이혼한 아내의 친구가 아니라, 그냥 여자이고 싶었어.”

“너 한 번도 나한테 여자였던 적 없어.”

태주가 가차 없이 말했다. 확인사살을 당한 여진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다신 강나정 건드리지 마. 너 때문에 이런 식으로 그 여자랑 엮이는 거 불쾌하고 기분 더러우니까.”

태주가 몸을 돌렸다.

그의 뒷모습이 빗속에 완전히 잠겨 사라질 때까지, 여진은 멀거니 절벽 위에 서 있었다.

“거짓말. 누구보다 강나정이랑 다시 엮이길 바라는 주제에.”

허탈한 혼잣말이 흐르는 빗물에 씻겨 사그라졌다.

속옷까지 흠뻑 젖은 몸은 보이지 않는 손 수십 개가 아래에서 끌어당기기라도 하는 듯 무거웠다. 제대로 서 있기가 벅찰 만큼.

‘어디까지 가.’

‘우산 없으면 정류장까지 같이 쓰고 가.’

문득 여진의 눈앞으로 오래전 잔상 하나가 지나갔다.

왜인지 그날따라 몸이 좋지 않아서, 수업 도중 홀로 본과 동을 빠져나오던 참이었다.

‘어…… 나정이 기다려요? 아직 수업 끝나려면 멀었는데. 한 시간은 더 있어야 해요.’

하얀 우산을 머리 위에 드리운 태주와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 여진은 인사도 생략한 채 나정의 이름부터 꺼냈다.

그때도 태주는 흠잡을 데 없이 멋진 사람이었지만 딱히 사심 같은 건 없었다.

일 년 넘게 예쁜 사랑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의 남자친구.

비가 올 때면 꼭 학교까지 나정을 데리러 오는 자상한 남자. 태주에 대한 감상은 그것뿐이었다.

‘어디까지 가.’

‘네?’

‘우산 없으면 정류장까지 같이 쓰고 가.’

‘…….’

평소였다면 거절하고 돌아섰을 텐데. 그날은 유난히 몸이 좋지 않은 데다, 비까지 퍼붓고 있었다.

‘그럼, 저 앞까지만 부탁해요.’

머리 위 엉성한 손 우산을 거두며 태주의 우산 속으로 뛰어든 그 날. 버스 정류장은 끽해야 몇 분 거리에 있었고. 태주는 나정의 친구인 제게 허용범위 안의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었다.

설마, 그 짧은 찰나에 묘한 감정이 피어날 줄은 정말 몰랐다.

‘오늘도 차는 일부러 두고 왔어요?’

‘응.’

‘우산도 하나뿐이고요?’

‘보다시피?’

우산 밑에서 나란히 걸으며 두 사람은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정과 있을 때는 좀 더 잘 웃고 말도 많았던 것 같은데. 여진이 태주의 옆얼굴을 흘깃 관찰했다.

흐음…… 이렇게 생겼구나.

‘비 오는 날 차를 두고 나오는 건 그렇다 쳐도, 굳이 매번 우산 하나를 둘이서 나눠 쓰는 건 좀 불편하지 않아요?’

길어지는 침묵이 신경 쓰여서, 괜히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불편하다고 생각해. ’

‘그런데 왜 나정이가 하자는 대로만 해요?’

‘불편해도 좋으니까’

태주에게서 담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진은 곧 수긍했다. 그렇구나. 좋아하면 불편한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구나.

얼마 후 정류장에 다다른 여진은 태주와 간단한 목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곤 태주가 손톱만큼 작아질 때까지 자리에 서서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가방을 열자, 안쪽에 휴대용으로 들고 다니는 미니 우산이 보였다.

왜 우산이 없는 것처럼 거짓말을 했을까. 여진은 스스로에게 의문을 느끼며 버스에 올라탔다.

“우태주…….”

옛 기억을 회상하던 여진이 가만히 태주의 이름을 되뇌었다.

처음부터 당신이 내 남자였다면, 이렇게 나 혼자 비를 맞는 일은 없었을 텐데.

흠뻑 젖은 몸에 오한이 일었다.

갖고 말 거야, 우태주. 반드시 가질 거야. 빗속에 홀로 남겨진 여진이 축축한 입술을 말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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