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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31화 (31/60)

전남편이 부임했다 31화.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직원 숙소 앞에 대형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김 비서가 손에든 핸드폰에서 뭔가를 삭제하더니 곧 나정에게 내밀었다.

나정은 자신의 핸드폰을 휙 낚아채며 차에서 내려섰다.

“저희 아가씨의 무례를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뒷좌석 창이 열리며 김 비서가 형식적인 사과를 건넸다.

여진의 작업실에 자신을 감금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다신 엮이지 말자고 전해주세요.”

나정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내 차창 문이 닫히고 세단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하. 입 새로 흰 연기 같은 입김이 피어올랐다.

어느덧 밤이었다. 하루 종일 뭘 한 거지 난. 나정이 한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여진의 작업실에 갇혀있는 동안 빼앗겼던 핸드폰엔 수십 통의 연락이 와 있었다.

[나정아. 어디야. 너 왜 안 와.]

[빨리 와! 우 총이 너 찾아.]

[어떻게 된 거야?]

[죽었냐 기집애야!]

보나의 카톡을 읽던 나정은 이내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찍힌 부재중 목록을 확인했다.

010- 9413- XX31

낯선 번호였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저만치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지금 막 직원 숙소 입구로 들어선 태주였다.

어.

나정이 멈칫하며 그를 쳐다봤다. 태주의 시선도 제게 와 멎었다.

“…….”

“…….”

잠깐 둘 사이에 아슬한 정적이 흘렀다.

나정은 태주가 그대로 자신을 무시한 채 입구로 들어설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태주는 몸을 비틀어 제게 다가왔다.

나정은 긴장한 표정을 추스르며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봤다. 왠지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

이윽고 제 앞에 벽처럼 멈춰 선 태주가 짧게 숨을 골랐다.

“괜찮아?”

난데없는 질문에 나정은 눈을 키웠다.

“네……?”

“괜찮냐고.”

무슨 뜻일까. 나는 이렇게 멀쩡한데. 나정은 말없이 태주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럼 됐어.”

잠깐 나정의 안색을 살피던 태주가 그대로 몸을 돌려 숙소 입구로 들어섰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정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끝내 묻지 못한 한마디가 목에 걸려 대롱거렸다.

당신 혹시 나 때문에 그렇게 젖은 거예요?

하루 종일 날 찾아다녔어요……?

***

첫날 객실 침대에서 콘돔이 발견되며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은 룸쇼는 다행이 마지막 날까지 대성황을 누리며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지난 며칠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건 회식뿐이다. 회식! 회식!”

“아오 저 회식 무새들 진짜. 지들이 뭘 한 게 있다고. 우리가 다 했지.”

보나가 객실부 팀원들을 흘겨보며 투덜댔다.

“우리 연회팀은요? 보나 씨, 연회팀이 물심양면으로 뒤에서 서포트 한 거 알죠?”

등 뒤에서 나타난 송준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이 인간은 왜 맨날 난데없이 나타나서 저렇게 샤방하게 웃고 지랄이람. 사람 떨리게?

보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송준을 따라 생그르르 미소 지었다.

“오늘 회식 소갈비 먹는대요. 우리 법카 한도가 바닥을 칠 때까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자고요.”

“오케이 누가 더 많이 먹나 시합해요.”

두 남녀가 장난스레 팔을 맞대며 크로스를 해보였다.

“어. 우 총이다. 총지배인님!”

보나가 여느 때와 달리 태주를 발견하곤 먼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 바람에 멍하니 곁에 서 있던 나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오늘 팀 전체 회식인 거 아시죠. 총지배인님?”

보나가 프론트로 다가선 태주를 향해 알랑방귀를 뀌었다.

태주는 가타부타 긴 말 없이 보나에게 법인 카드를 내밀었다.

“한도 내에서 자유롭게 써요.”

“감싸합니다!”

보나는 신상 구두를 하사받을 때처럼 두 손으로 법카를 받들었다.

“근데 총지배인님은 회식 참여 안 하세요?”

“내가 빠져주는 게 더 편할 겁니다.”

“아. 어…… 음…….”

보나는 아부에 능하지 못했다.

태주는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같이 가시죠.”

그런데, 옆에서 잠자코 그를 지켜보던 나정이 불쑥 운을 뗐다.

태주의 시선이 그제야 나정을 향해 떨어졌다.

“아뇨. 나 대신 강 주임이 팀원들 인솔해서 다녀와요.”

나정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순간, 태주가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뭐지……? 저 녀석 좀 아파 보이지 않아요?”

“그러게요. 얼굴이 파리한 게…… 누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것 같네. 몸살이라도 났나?”

송준과 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몸살? 나정은 어젯밤 비에 젖은 태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 그래, 그래. 아픈 사람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지. 그나저나 오늘 완전 날이다, 날! 월급날에 소갈비 회식이라니!”

보나의 설레발에 나정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이 월급날이야?”

“응? 응. 20일이잖아.”

20일. 그렇구나. 나정은 열없이 읊조렸다.

11월 20일.

원래대로라면 오늘은 자신과 태주의 결혼기념일이었다.

“나정아. 무슨 생각해? 너 아까부터 정신이 영 딴 데 가 있는 것 같아.”

맞은편에서 열심히 갈비를 흡입하던 보나가 문득 나정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아?”

“어. 당연하지.”

나정은 짐짓 웃어 보였다. 연기가 자욱한 갈빗집은 호텔 직원들에게 맛집으로 정평이 난 곳이었다. 가게 안을 채운 익숙한 얼굴들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술잔을 부딪쳤다.

“보나 씨. 나랑도 한잔해요.”

연회팀과 함께 있던 송준이 어느새 잔을 들고 보나의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래요, 다 같이 짠 합시다!”

다행히 보나는 송준의 대시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곧이어 보나와 송준, 나정의 잔이 허공에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야, 너 왜 자꾸 빼?”

나정이 잔을 그대로 내려놓자 보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떨었다.

“진짜 무슨 일 있구나 우리 나정이?”

“아냐.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

“어디 아파? 너도 우 총처럼 몸살 난 거 아냐?”

태주의 얘기가 나오자 마음 언저리에 욱신, 통증이 일었다.

나정은 젓가락을 들고 억지로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보나 말에 따르면 평소엔 웨이팅이 길어 와보지도 못할 맛집이라는데, 오늘따라 고기에선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물론 태주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태주 때문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우 총 말이야. 지금쯤 숙소에서 혼자 라면 끓여 먹고 있는 거 아냐? 억지로라도 끌고 나올 걸 그랬나…….”

보나가 나정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일차까지만 하고 들어가봐야죠, 내가.”

송준이 옆에서 보나의 잔을 채우며 말했다.

“아까 퇴근할 때 보니까 안색이 많이 안 좋더라고요.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그죠? 우 총 진짜 아픈 거 맞죠?”

“가끔 한 번씩 그래요, 걔가. 스위스에서도 이유 없이 앓을 때가 많았어요. 공황발작도 있었고.”

나정은 송준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기려 애썼다. 하지만 급격히 어두워지는 표정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나정 씨.”

티 나게 동요하는 나정을 기민한 시선으로 관찰하던 송준이 대뜸 말문을 열었다. 아주 부드럽고 은근한 어조였다.

“나 실은 보나 씨랑 좀 더 마시고 싶은데. 괜찮으면 나정 씨가 가는 길에 태주 죽 좀 사다 줄래요?”

“어머. 송준 팀장님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괜히 부끄러워진 보나가 옆에서 손부채질을 했다. 송준은 눈가를 접고 유하게 웃었다.

“바로 옆집이잖아요. 그냥 문고리에 걸어놓고 벨 한 번만 눌러주면 되는데.”

나정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송준이 아예 쐐기를 박았다.

“태주가 아파도 아프단 소리를 절대로 안 하는 놈이거든요. 혼자 고집 피우다 쓰러질지도 몰라요.”

그렇게 걱정되면 송준 팀장님이 직접 가보세요. 나정은 그렇게 말하려 했다. 정말로 그렇게.

“……저도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일찍 들어가보려고요. 죽은 문 앞 에 두면 되는 거죠.”

송준이 미소를 띤 채 끄덕였다.

“아. 혹시 모르니까 현관 비밀번호는 0617입니다.”

나정은 못들은 척, 앞에 놓인 물을 들이켰다.

“보나 씨. 그 두 사람 뭔가 있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북적거리던 갈빗집 내부는 어느덧 한산했다. 나정이 앉아있던 맞은편 자리도 이미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래요? 두 사람이라뇨? 누구……?”

송준과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보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말을 더듬었다.

“강나정 주임님이랑 태주요.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거죠.”

송준은 한 번 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그, 그, 그걸 어떻게!”

반면에 보나의 목소리는 노래방에 온 듯 꽤애액 높아졌다.

동공 지진이 일어난 그녀의 눈을 보며 송준은 자신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태주랑 강 주임님 원래부터 알던 사이죠?”

“헐?”

“설마 사귀던 사이?”

“엄마야……!”

“태주가 한국에 있을 때 기억을 지운 것도, 설마 강 주임님 때문인가?”

“쉿! 조용히 해요. 누가 듣겠어요!”

보나가 재빨리 상추 한 장을 펼쳐 들고 송준의 입을 텁, 막았다.

술에 취해 머리가 투명해진 그녀는 자신이 송준의 의혹에 확신을 심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행여 누가 들을세라, 보나는 한껏 숨을 죽인 채 읊조렸다.

“그 둘이 부부 사이였다는 건, 우리만 알고 있는 시크릿이어야 해요. 절대 어디 가서 발설하지 말라고요……!”

***

직원 숙소. 1003호 앞에 선 나정이 죽이 든 종이가방을 내려다봤다. 이대로 문고리에 걸어두고 가면 되는데, 어쩐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뭘 어쩌려고.”

자조적인 혼잣말이 입 밖으로 툭 굴러 나왔다.

그렇게 몇 분을 마네킹처럼 서있기만 했을까. 오랜 결심 끝에 나정은 벨을 눌렀다. 직접 죽을 건네며 태주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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