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32화.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안에선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나정은 두어 번 더 벨을 눌렀다가, 송준의 말을 떠올렸다.
‘아 혹시 모르니까. 현관 비밀번호는 0617입니다.’
“……0617.”
나정은 조심스레 도어락 숫자를 눌렀다. 곧이어 익숙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계세요? 안에 안 계세요?”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태주의 구두가 보였다. 잠깐 망설이던 나정은 곧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 겸 주방의 불이 꺼져있어 사방이 어두웠다.
“총지배인님?”
거듭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나정은 살짝 초조해졌다.
그때, 열린 문틈 새로 도란도란 사랑을 속삭이는 남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은 자석에 이끌리듯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벌어진 틈새에서 좀 더 또렷한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뭐에 홀린 듯 천천히 방문을 열었다.
“……총지배인님.”
제일 처음 시야에 들어온 건 침대에 푹 잠겨있는 태주였다. 그 옆엔 포장이 뜯어진 감기약 캡슐과 물컵이 놓여있었다.
아마도 태주가 켜두었을 노트북에선 희미한 빛과 함께 영화 속 남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침대로 다가선 나정은 식은땀에 흠뻑 절은 태주를 말없이 응시했다.
“불러도 모를 만큼 아픈데, 병원도 안 가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태주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간간이 입술 새로 뜨거운 날숨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는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앓고 있었다.
나정의 눈이 연하게 떨렸다.
대뜸, 입에서 의도치 않은 말이 튀어 나갔다.
“우리 오늘 결혼기념일이에요. 알아요?”
태주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어루만지려 손을 뻗었다가, 차마 용기가 안 나 나정은 고개를 숙였다.
“왜 이런 날 아프고 그래요?”
왜 이런 날, 나랑 같이 봤던 영화를 혼자 봐요……?
나정의 시선이 노트북에 가 멎었다. 플립이라는 영화였다.
문득 머릿속에 태주와 자신이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드라마처럼 운명적인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직도 나정의 가슴에 선명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플립 한 장이요. L열 8번 자리로 주세요.”
평소에는 집과 거리가 있어 찾지 않던 낡은 시네마관이었다.
이곳에선 사람이 적은 심야 시간에 종종 옛날 영화를 틀어주곤 했는데, 나정이 오늘 여기 온 이유도 가장 좋아하는 인생 영화를 좀 더 큰 화면으로 보고 싶어서였다.
“손님 죄송하지만 L열 8번 자리는 이미 예약이 되어있어서요. 다른 자리는 어떠세요?”
직원의 말에 나정은 내심 놀랐다.
나 말고도 재상영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이 또 있다고?
나정은 잠시 고민했다. L열 8번 자리는 자신의 지정석이었다. 어느 상영관을 가든, 항상 그 자리를 예매했다. 너무 뒤에 앉으면 자막이 잘 안 보였고 앞자리는 왠지 집중도가 떨어져 영화에 몰입이 안 됐다. L열 8번 자리가 아니면 안 돼. 이건 일종의 징크스였다. 나정은 제 지정석을 빼앗아간 이름 모를 인간에게 야속함을 느꼈다. 그 때문일까. 괜히 오기가 나서 직원에게 말했다.
“그럼 옆자리로 주세요. 바로 옆자리요.”
삼십 분 후, 텅텅 빈 상영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정은 자신이 좋아하는 L열 8번 자리를 차지한 남자를 발견했다.
이 늦은 시간까지 야근에 치이다 온 걸까. 슈트 차림의 남자는 한 팔로 턱을 괸 채 스크린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정은 조심조심 옆자리에 몸을 앉혔다.
그것이 태주와의 첫 만남이었다.
흠흠. 나정이 헛기침을 했다. 옆자리에 앉은 덩치 큰 남자가 신경 쓰여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영화가 시작되며 그녀는 태주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플립은 미성숙한 소년과 소녀의 첫사랑을 다룬 영화였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화면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안 돼…… 안 된다구…….”
영화가 초반부를 넘어갈 무렵, 나정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렀다.
주인공 소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무화과나무를 어른들이 베어버리지 못하도록 가지에 앉아 버티는 장면이었다.
나정은 영화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에서 옆에 둔 녹차 프라푸치노를 집어 들고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때, 문득 태주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움직였다.
나정의 손에 들려 있는 건 틀림없는 자신의 녹차 프라푸치노였다.
그러고 보니 나정의 좌석 오른쪽 홀더에도 똑같은 녹차 프라푸치노가 꽂혀 있었다.
“…….”
자신과 음료 취향이 놀랍도록 똑같은 옆자리 여자는 아까부터 영화에 홀딱 심취해 있었다.
태주는 간간이 낮은 소리로 한숨을 쉬거나,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나정을 무심코 지켜봤다.
상영관의 어둑한 조명 탓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나정은 중간중간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도저히 울 만한 구간이 아닌 데서도 그랬다.
태주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나정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미 전부 꿰고 있는 영화의 내용보다, 나정의 표정이 다음 장면에서 어떻게 바뀔지가 더 궁금했다.
“어떤 사람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나정이 영화 속 노인의 대사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따라 했다. 이 영화를 한두 번 본 게 아닌 듯했다.
“또 어떤 사람은 광택 나는 사람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빛나는 사람을 만나지…… 하지만 모든 사람은 일생에 단 한 번 무지개같이 변하는 사람을 만난단다.”
“…….”
“네가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땐 더 이상 비교할 수 있는 게 없단다…….”
천천히 대사를 따라 읊던 나정은 문득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태주와 눈이 마주쳤다.
아뿔싸. 그제야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 없이 자꾸 떠들어서…….”
태주의 날카로운 눈빛에 압도돼 살짝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이거, 갚아요.”
굵직한 동굴 목소리가 제게 툭 밀려왔다.
태주가 다 마신 녹차 프라푸치노 컵을 손에 든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나정은 설명할 수 없는 묘한 형태의 감정을 느꼈다. 왠지 영화 속 노인의 대사가 귓전을 맴돌았다.
얼마 후, 나정과 태주는 자연스레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이듬해엔, 평생 함께하겠노라는 사랑의 서약 아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걸었다.
나정은 태주와의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었다.
적어도 그 사랑이 태주를 병들게 할 줄은 몰랐다.
“나정아…….”
침대 맡을 지키고 선 나정이 끙끙 앓는 태주를 내려다봤다. 마른 입술 새로 제 이름이 흐릿하게 불거졌다.
무슨 꿈 꿔 태주 씨? 그 꿈에선 우리 아직 행복해……?
나정의 뺨을 타고 눈물이 빠르게 떨어졌다.
***
밤새 꼬박 앓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블라인드 사이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거실로 나온 태주가 대리석 식탁 위에 놓인 하얀 냄비에 시선을 두었다.
다가가 뚜껑을 열자 낯익은 냄새가 났다. 태주의 눈빛에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꿈이 아니었나.
냄비에 든 게살 죽을 섣불리 어쩌지 못하고 태주는 한동안 바라만 봤다.
인기척이 없는 걸로 봐서 송준은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밤새 옆을 지키고 수없이 자신의 이마를 짚어보던 그 손은, 송준의 손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
태주가 국자로 죽을 퍼 그릇에 담았다. 그러곤 홀로 식탁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죽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 맛이었다. 텅 빈 집안에 숟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하게 울려 퍼졌다.
***
“헛, 깜짝이야! 나정아. 아직 집에 있었네……?”
살금살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던 보나가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펄쩍 뛰었다.
출근 준비를 마친 나정은 안절부절못하는 보나를 머리부터 주우욱 훑었다.
“옷이 어제 입은 그대로네.”
“어, 어?”
“너 어디서 잤어?”
“호, 혼자 잤어! 정말이야! 나 정말 순결해! 아니 결백해!”
횡설수설하는 보나의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어디서 잤냐고 물었어. 누구랑 잤냐고 물은 게 아니라.”
“그, 그래? 그랬구나…….”
티 나게 시선을 회피하던 보나가 식탁 위의 종이 가방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이거 죽 아니야? 요 앞 죽집에서 산 거지? 왜 어제 우 총 안 갖다줬어?”
“그냥. 그렇게 됐어.”
잠깐 동요하던 나정은 다시 표정을 바꾸고 보나를 추궁했다. 이게 어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려고.
“너 솔직히 말해. 어제 혹시 송준 팀장이랑…….”
“쉿!”
누가 들을세라 보나는 재빨리 나정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이내 어깨를 추륵 늘어뜨렸다.
“이건 너만 알고 있어. 실은…… 내가 어제 술김에 송준 팀장을 덮쳤어.”
“뭐?!”
어우 난 몰라. 보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우리…… 이제 어쩌죠?’
오늘 아침, 송준과 한 침대에서 눈을 뜬 보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을 이불로 가린 채 간밤의 자신을 저주했다.
‘어쩌긴요. 이제 보나 씨가 나 책임져야지.’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송준은 한술 더 떠 제게 정식교제를 요구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내가 자기 스타일이었다나, 뭐라나…….”
보나는 머쓱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참, 내가 먼저 덮쳐놓고 이제 와 모른 척하기도 그렇고…… 사람의 도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네 말의 요지가 뭔데. 송준 팀장이랑 연애라도 하겠다고?”
“내가 내숭 떨 나이는 아니잖아. 실은 송준 팀장이 밤일을 잘하더라고.”
“야, 간보나!”
“왜, 너 은근히 속궁합 잘 맞는 남자 찾기 힘들다?”
보나는 차라리 대놓고 뻔뻔해지기로 했다.
“솔직히 나도 송준 팀장 마음에 들어. 그만하면 훤칠하지. 성격 좋지. 에이, 만날래. 만날 거야. 만나보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