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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33화 (33/60)

전남편이 부임했다 33화.

친구의 거침없는 패기에 나정은 말을 잃었다.

“너 진짜 대책 없는 거 알지.”

“알아. 안다고…… 그치만 좋은 걸 어떡해?”

오히려 반문하는 보나의 모습에서 나정은 이질감을 느꼈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보나가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러게. 좋은 걸 어떡해. 그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나정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친구야아.”

보나가 자신을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걱정 마. 이 언니 얍삽하게 혼자 연애질 안 한다. 너랑 우태주. 책임지고 팍팍 밀어줄게. 다시 잘 될 수 있게,”

“그러지 마.”

나정은 고개를 저었다. 진심이었다. 누구의 도움 같은 건 필요치 않았다.

태주와 자신의 사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태주와 자신뿐이었다.

***

하루쯤 쉰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칼같이 정시에 나타난 태주를 보며 부하직원들은 일제히 혀를 내둘렀다.

소식을 들은 나정도 태주가 신경 쓰이긴 마찬가지였다. 업무 보고를 핑계 삼아 그의 집무실을 찾은 것도, 어쩌면 일보다 걱정이 앞서서인지도 몰랐다.

똑똑. 가볍게 집무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태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문을 연 나정이 가볍게 고개 인사를 했다. 그러곤 쇼파로 다가가 태주의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태주는 까칠해진 얼굴로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나정은 그의 앞에 자비 없이 쌓여있는 보고서와 투자 제안서를 힐끗 응시했다.

“이번 주 GRO팀 업무 보고서입니다. 특별한 사항은 없습니다.”

높이 쌓인 서류 위에 한 장을 더하며 그녀는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아직 다 나은 것 같지 않은데. 저렇게 몸을 혹사해도 되는 건가.

“두고 가요. 이따 확인할 테니까.”

감기 때문인지, 비음이 섞인 목소리가 낮고 탁했다. 태주의 시선은 아까부터 패드와 서류를 교차로 오가고 있었다.

나정은 선뜻 일어나지 못했다.

손톱 옆의 거스러미처럼 태주가 신경 쓰였다.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눈길이 갔다.

“죽. 잘 먹었어.”

그때였다.

여전히 패드에 시선을 고정한 태주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흠칫 놀란 나정은 이내 차분히 표정을 가라앉혔다.

“남은 건 냉장고에 두고 그때그때 먹을 만큼만 데워 드세요.”

“그럴게.”

짧은 대화를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나정은 시선을 내린 채 엄지손톱을 매만졌다.

“실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알아.”

태주에게서 즉답이 돌아왔다.

지금쯤 강나정의 입에서 나올 말은 뻔했다.

“지난번에 저랑 한 약속 기억하세요?”

이것 보라고. 태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쓰리고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룸쇼가 끝나면 네가 원하는 대로 호텔에서 나가게 해줄게.’

그 약속만 믿고 꾸역꾸역 버텼던 건가.

태주가 입안에서 천천히 혀를 굴렸다. 왠지 쓴맛이 났다.

아침에 먹었던 그 죽은,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서, 사직서는.”

그가 나정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눈이 마주친 나정은 왠지 태주의 표정이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헀다. 하지만 다시 그를 쳐다봤을 때, 거기엔 평소와 같이 팍팍한 태도의 전남편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두고 나가. 원하는 대로 수리해줄 테니까.”

“……아뇨.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나정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저 호텔에서 나갈 생각 없습니다. 그 말씀 드리려고 온 거예요.”

서류를 뒤척이던 손이 일시 정지했다. 태주의 시선이 다시 자신을 향해 움직였다.

나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도망치는 게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 남기로 했어요.”

“…….”

“절 뻔뻔하다고 욕하셔도 좋아요. 돌을 던지시면 맞고, 침을 뱉으시면 그것도 맞죠, 뭐. 총지배인님 마음이 풀어지기만 한다면, 저 이제 뭐든 할 수 있어요. 도망치는 것 빼고 뭐든요.”

돌이켜보면, 늘 상처받는 게 두려워 뒷걸음질 치기 급급했다. 그 바람에 한 번도 태주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우태주가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날 찾아온 이유가 뭘까.

기어코 내 숨통을 조르기 위해? 삼 년 전 그 일을 복수하려고?

정작 우태주는 단 한 번도 복수라는 말을 입에 담은 적이 없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태주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나정에게 고정되었다.

어느 방향으로 튀어 나갈지 모르는 가젤을 주시하며 조바심을 내는 사자처럼 태주는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말아쥔 그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대답해. 네 저의가 뭔지.”

저의 같은 건 없었다.

“한 번쯤은 마음이 가는 대로 해보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

“총지배인님 옆에 있고 싶어요, 저.”

태주와 저 사이에는 더 이상 손 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손을 쓸 수 없다면, 손을 쓰지 않으면 된다. 나정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무너진 태주와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상처받더라도, 도망치는 대신 그의 곁을 지키기로.

“더 이상 나 때문에 아플 일 없을 거예요. 약속해요. 언제든 총지배인님이 나한테 가라고 하시면, 그때 갈게요. 지금은 옆에 있고 싶어요,”

나정은 진심으로 약속했다.

“맘대로 해. 딱히 말린다고 들을 것 같지도 않은데.”

이내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대답이 돌아왔다. 어쨌거나 그건 제 옆에 남아도 좋다는 뜻이었다.

나정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제 입장은 충분히 전달한 것 같으니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대로 문을 향해 돌아섰던 나정이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걸음을 세웠다.

“참. 병원엔 안 가더라도 약은 꼭 챙겨 드세요. 목소리가 잠겼어요. 안색도 안 좋고요. 어차피 제 말은 안 들으시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시는 게 좋겠어요.”

태주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손에 쥔 서류에 몰두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나정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헛헛한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내내 후각을 자극하던 나정의 달콤한 체향이 한꺼번에 쓸려나갔다.

“…….”

태주의 굳어졌던 표정이 비로소 잦아들었다. 꼿꼿했던 자세가 풀어지며 소파 등받이에 툭, 몸이 떨어졌다. 곧이어 옆에 있는 업무용 키폰으로 그가 비서를 호출했다.

“오후 일정 전부 취소해요. 일찍 들어가서 좀 쉬어야겠습니다.”

“웬일이니. 네가 회사로 날 다 찾아오고.”

같은 시각, 화려하게 치장한 여진이 집무 책상에 앉은 하 회장 앞으로 또각또각 다가섰다.

“의외다. 태주 기억이 돌아온 걸 알았으니 비실대며 앓아눕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아플 새가 없었어요, 회장님.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당장 태주 씰 뺏기게 생겼는걸요.”

“일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어. 짧게 끝내자.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사업차 방문한 손님보다 절 더 신경 쓰셔야죠 회장님. 전 한두 번 보고 말 사람이 아니잖아요.”

하문옥 회장의 고개가 여진을 향해 올라섰다.

뭐랄까. 여진의 분위기가 이전과 미묘하게 달랐다. 비틀린 입술엔 그간 보지 못했던 조악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회장님이 저한테 그러셨죠. 영리한 수를 쓰지 못할 바엔 영악하게라도 굴라고.”

“…….”

“전 차라리 악랄해지려고요.”

천천히 사무실을 거닐던 여진이 하 회장이 아끼는 그림 앞에 멈춰 섰다. 벽면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그림은 기괴한 여인의 자화상이었다.

“회장님. 저 회장님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어졌어요. 예전의 나정이가 그랬던 것처럼.”

“얘기가 길다. 손님이 오실 거라고 하지 않았니.”

하 회장의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여진이 웃음기를 거두고 본론을 꺼냈다.

“저 태주 씨랑 결혼하게 해주세요. 아니…… 태주 씨랑 결혼하겠어요. 아시잖아요, 회장님. 제가 얼마나 태주 씨 사랑하는지.”

여진이 하 회장을 향해 돌아섰다.

“태주 씨도 한 번쯤은 자길 죽도록 사랑해주는 여자와 살아봐야 하지 않겠어요?”

자길 죽고 싶게 만든 여자보단, 차라리 내가 낫죠. 여진은 그렇게 덧붙였다.

“저와 태주 씨 결혼.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은 회장님뿐이세요. 도와주세요.”

그녀는 확실히 예전과 달랐다. 궁지에 몰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진 쥐는 고양이를 문다. 여진은 더 이상 하 회장이 두렵지 않았다.

매일 밤, 태주와 나정이 한 침대에서 뒹구는 꿈을 꾸었다. 욕정에 가득 찬 태주의 눈. 뜨겁게 번지는 숨소리. 그것들은 전부 나정을 향해있었다.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것, 여진은 그게 미치도록 두려웠다.

“절 식구로 맞이한다는 게 무슨 의민지는 회장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저희 아버지가 평생을 일궈 오신 J그룹, 회장님 소유가 되는 거예요. 저희 결혼.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비즈니스 아닌가요?”

다시 한번 여진이 하 회장의 허락을 갈구했다.

“내가 아들 인생 갈아 넣어 장사나 하는 사람처럼 보이니?”

“아뇨. 그럴 분 아니라는 것 잘 압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강나정 따위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셨던 거겠죠?”

하 회장의 낯빛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회장님. 이미 겪어보셨잖아요. 태주 씨가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어디까지 곤두박질치는지.”

여진의 눈에 독과 악이 가득 찼다.

“적어도 저랑 결혼하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태주 씬 절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

“으이그. 이것아. 잘 생각했어! 이제 맘 확실히 정한 거지? 다시 일 관둔다, 때려친다 그런 소리 하기만 해.”

김치볶음밥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던 보나가 티비 앞에 멍하니 앉아있는 나정을 연신 쪼아댔다.

“보나야. 나 잘한 걸까. 내가 호텔에 있으면. 그 사람 결국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나정이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마음이 왔다 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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