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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34화 (34/60)

전남편이 부임했다 34화.

태주의 곁에 있고 싶어서, 괜히 그럴싸한 말들을 늘어놓았던 건 아닌지.

“야! 너 아직도 그 소리야?”

보나가 입 안 가득 김치볶음밥을 물고 말했다.

“우태주는 아직 널 사랑한다니까. 내 눈은 정확하다고.”

그때였다. 벨이 울리며 문밖에서 송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나 씨. 안에 있어요?”

“어머! 어머머!”

화들짝 놀란 보나가 재빨리 물티슈로 입가며 얼굴을 문질렀다.

“가서 세수를 해.”

“그럴 새가 어딨어!”

먹다 남은 김치볶음밥을 싱크대에 처박고는, 보나가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누, 누구세요?”

시치미를 떼고 벌컥 현관문을 열자, 한 손에 냄비를 든 송준이 보였다.

“빈 그릇 주러 왔어요.”

“빈 그릇……?”

“그리고 이건 야식. 출출할까 봐.”

송준이 앞으로 내민 건 보나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닭발집의 최애 메뉴였다.

“헛 닭발! 국물 닭발!”

꽥 목소리를 높였다가 다시 정신이든 보나는 재빨리 태세 전환을 시도했다.

“아우 참, 송준 씨. 이렇게 자극적인 음식은 몸에 해로워요. 그리고 밤에 먹으면 얼굴 붓잖아요.”

“보나 씬 부어도 예뻐요.”

“어머. 가뜩이나 생얼이라 민망한데 그런 입에 발린 말씀을.”

“생얼이었어요? 몰랐는데.”

송준이 서글서글 웃어 보였다. 보나는 그런 송준의 앞에서 몸을 배배 꼬았다.

나정은 두 사람이 이제 막 일주일을 넘긴 파릇파릇한 연인 사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보나의 주변이 온통 핑크빛이었다. 사랑에 빠진 여자의 얼굴은 언제봐도 사랑스럽구나. 나정은 내심 쓸쓸해졌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나.

“참. 태주가 죽 고맙다고 전해달래요. 하나도 안 남기고 싹싹 비우더라고요. 입도 짧은 녀석이.”

송준이 난데없는 소리를 하며 씨익 웃었다.

“아. 네.”

나정은 왠지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총지배인님…… 지금 집에 계세요?”

“세상모르고 자요. 그동안 못 잤던 잠을 한꺼번에 몰아 자는 것 같아요. 뭔진 모르겠지만 걱정하던 일이 잘 해결된 모양이에요.”

나정이 다시 호텔에 남기로 하면서 태주의 오랜 불면증이 사라졌다. 송준은 지금 그 말을 빙 돌려서 하고 있는 거였다. 그만큼 당신은 태주에게 아주 중요한 존재라고.

“그렇구나…….”

왜 이렇게 얼굴이 화끈거리지. 나정이 달아오른 뺨을 그러쥐었다. 그 얼굴은 사랑에 빠진 보나와 꽤 닮아있었다.

***

월요일 아침은 유독 다른 날보다 바빴다. 체감상 꼭 그랬다.

“잠깐만요!”

나정이 닫히려는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때만 해도 몇 초 후 벌어질 일을 알지 못했다.

스륵, 다시 문이 열리며 눈이 마주친 사람은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태주였다.

나정은 가벼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아.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태주가 제 인사에 짧게 화답하며 다시 닫힘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두 사람을 태운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지배인님 옆에 있고 싶어요, 저.’

나정은 머릿속에서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그 말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맨정신으로 태주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다.

그냥 호텔에 남겠다고만 얘기하면 될걸. 나정은 뒤늦게 자신의 무모함을 후회했다.

“약.”

그때였다. 태주의 고개가 저를 향해 움직였다.

“네?”

“먹었어.”

“……?”

“먹으라며.”

아. 감기약. 나정은 얼른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네. 잘하셨네요.”

‘잘하셨네요’라니, 말이 좀 웃겼다. 나한테 칭찬받으려고 한 소리가 아닐 텐데. 나정은 왠지 더 민망해졌다.

그때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자연히 태주와 나정은 뒤로 한 걸음씩 물러섰다.

그렇게 얼마나 더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했을까.

뒤로 밀려나다 못해 태주와 완전히 몸을 밀착한 나정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제 더 물러날 곳도 없었다.

직원들로 꽉 찬 엘리베이터는 그 후로도 몇 번 더 문이 열렸다.

“…….”

태주가 제 가슴팍에서 꾸물대는 나정의 정수리를 힐긋. 내려다봤다.

조금이라도 몸과 몸 사이에 틈을 벌리려고 나정은 부단히 애를 쓰고 있었다.

태주는 왜인지 그런 나정이 괘씸했다.

그가 비틀거리는 나정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듯 거머쥐었다.

“!”

놀란 나정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직원들은 전부 무료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정은 살짝 안도했다. 그 순간 고개를 낮춘 태주가 자신의 귀에 나직한 한마디를 불어넣었다.

“샴푸 바꿨어?”

화악.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후 사람들이 각 층으로 흩어졌다. 나정 역시 태주를 뒤로한 채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촤륵 닫히는 문 사이로 태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여전히 먼저 눈을 피하는 법이 없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제자리에 선 나정이 빨개진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

“점심 구내식당 콜?”

“오랜만에 나가서 먹자.”

“좋아! 송준 씨도 불러도 돼?”

“어우, 맘대로 해.”

나정이 보나를 향해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호텔리어들의 점심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서둘러 후딱 밥을 먹고 돌아와 다른 팀원에게 바톤 터치를 해야 했다.

“칼국수 먹을까? 아님, 오므라이스? 그전에 울 자기 여보한테 연락부터 해야겠지?”

“자기든 여보든 둘 중 하나만 해.”

“울 자기 여보 허니 베이비한테 연락해야겠다.”

보나의 설레발은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저렇게 좋을까…… 나정은 문득 태주를 떠올렸다.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맞닥뜨린 이후 다시 태주를 보기 어려웠다. 사용하는 층도 다르고 계급도 다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밥은 먹었을까.

나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좀 봐. 나야말로 설레발이네.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며 다시 걸음을 내디뎠을 때였다.

벨맨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호텔로 들어서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헐? 저거 또 왔어?”

한눈에 여진을 알아본 보나가 인상을 확 구겼다.

“아주 호텔에 출석 도장을 찍는구나 찍어. 네 전 시어머니랑 둘이 영혼의 단짝이야? 왜 맨날 저렇게 붙어 다녀? 어라……? 오늘은 또 뭐 저렇게 달고 온 사람이 많아?”

보나의 말대로, 여진의 주변엔 하 회장뿐 아니라 다른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나정은 노성훈 대표 내외를 한눈에 알아봤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16위인 J그룹의 오너이자 여진의 아버지. 노성훈 대표. 그가 자신의 아내와 딸 여진을 대동한 채 로비를 지나고 있었다.

“뭐 상견례라도 하러 왔나. 분위기가 왜 저럴…….”

말실수를 깨달은 보나가 스스로 입을 합, 다물었다.

나정은 수많은 호위를 받으며 로비를 지나치는 로열패밀리를 잠자코 바라봤다.

순간, 여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나정을 보며 입가를 해사하게 끌어 올리는가 싶더니 이내 여진은 하 회장을 보좌하며 그대로 멀어졌다.

왜 나를 보며 웃었을까.

나정은 그로부터 얼마 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여진이 웃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부탁 좀 하자, 강 주임. 응?”

모든 공간이 프라이빗한 룸으로 이루어진 일식 레스토랑.

호텔 내 부대시설이기는 했지만, 이곳은 엄연히 음식을 서빙하는 웨이터와 웨이트리스가 따로 존재했다. 그런데도 레스토랑의 업무를 총괄하는 황주혁 팀장은 아까부터 막무가내로 나정을 졸라댔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무려 재경가와 J그룹의 상견례 자리라고! 우리가 특별히 더 신경 써야지, 안 그래? J그룹 외동 따님이 콕 짚어 나정 씨를 지목했는데, 난들 어쩌겠어. 그냥 들어가서 음식만 좀 나르면 돼.”

나정은 웃으며 저를 지나치던 여진을 떠올렸다.

‘다른 직원들은 필요 없어요. 모든 음식은 강나정 호텔리어가 직접 서빙 해야 합니다.’

아마도 여진은 그런 식으로 황주혁 팀장을 압박했을 것이다.

“강 주임. 시간 없어. 제발 좀 부탁하자!”

황 팀장이 나정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잠시 후, 나정은 문제의 프리이빗 룸 앞에 서있었다. 안에서 간간이 하 회장과 여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정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떨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여진의 말도 안 되는 요구는 사실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나정이 그러지 않은 건, 여진이 멍청한 행동으로 스스로 자멸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주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자신을 하루 종일 화실에 붙잡아 뒀을 때처럼. 여진은 상식 밖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바닥을 증명하고 있었다. 딱히 상대하지 않고 내버려 둬도 언젠가는 알아서 그 바닥 위에 곤두박질칠 게 뻔했다.

똑똑. 이내 표정을 추스른 나정이 문을 노크했다. 그러곤 음식 트레이를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늦었네요? 기다렸는데.”

문이 열리자, 여진이 반색하며 말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나정은 좌식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곤 식전주와 음식을 차례대로 세팅하기 시작했다.

“너…….”

처음 자신을 알아본 건 하 회장이었다.

“너 나정이 아니니?”

그다음엔 여진의 어머니인 이영은 여사가 아는 척을 해왔다. 옆자리의 노성훈 대표도 나정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다들 아시죠. 나정이. 제 친구이자, 태주 씨 전 와이프. 지금 이 호텔에서 일하고 있어요. 나정아, 인사해.”

여진이 생글 웃었다.

어쩌면 저렇게 맑게 웃을 수 있을까. 나정은 자신을 끌어내리며 진심으로 희열을 느끼는 여진에게 약간의 경외감마저 느꼈다.

그때, 드르륵 문이 열리며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룸 안으로 들어서던 태주가 나정을 발견하곤 설핏 미간을 좁혔다.

“왔어요? 계속 전화했었는데.”

여진이 태주를 반갑게 맞이했다.

“뭐 하는 거야, 여기서.”

그러나 정작 태주의 시선은 여진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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