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35화.
“뭘 하는 거냐고 묻잖아.”
아뜩한 눈빛이 나정을 관통했다.
좌식 테이블 위에 접시를 세팅하던 나정은 이 룸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수치심을 느꼈다.
전남편과 다른 여자의 상견례 자리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제 꼴이 초라했다. 여진의 수준 낮은 조롱쯤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무시할 수 있었지만, 태주는 그럴 수 없었다. 모른 척 무시하기엔 자신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찼다.
“강나정.”
“네. 총지배인님.”
나정은 순순히 대답했다. 곧 태주에게서 자신을 찌르는 말들이 가차 없이 날아들 것이다.
‘꼭 이런 자리에서 그런 꼴을 하고 있어야겠어?’
‘이 정도로 미련한 여자였나?’
‘나한테 동정이라도 사고 싶은 거야?’
나정은 태주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마음을 정비했다.
그러나 한참 만에 돌아온 말은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미안하다.”
나정을 비롯한 모든 시선이 태주에게 가 멎었다.
태주는 나정에게 무례했던 이 방 안의 사람들을 대신해 사과한 거였다.
흠. 하 회장이 헛기침을 하며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정은 착잡한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지금 이 방안에서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되레 언성을 높이는 사람은 여진뿐이었다.
“태주 씨가 뭔데 나 대신 사과를 해? 나정인 이 호텔 직원이야. 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정일 사용했을 뿐이고. 그게 잘못이야?”
태주는 대꾸하지 않았다. 행동의 옳고 그름을 설명하기 위해 애쓰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아예 여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명백한 투명인간 취급. 태주는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여진을 더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강 주임은 그만 나가봐요.”
태주의 말투가 다시 사무적으로 변했다.
나정은 몸을 일으켰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태주와 이렇게 시선을 나누고 있는 게 힘들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한 후 그녀가 프라이빗 룸을 빠져나갔다.
미닫이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남겨진 사람들의 귓전을 울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제일 먼저 말문을 연 건, 여진의 아버지 노성훈 대표였다.
“어떻게 애들 상견례 자리에 이혼한 전 와이프가 나타날 수 있는 겁니까. 거기다 보란 듯이 음식을 서빙하질 않나…….”
“따님께 직접 물어보세요. 왜 나정이를 자리에 부른 건지. 저도 마침 궁금하던 찹니다.”
말을 잇는 하 회장의 표정이 선득했다.
태주의 곁을 맴도는 나정이 영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런 자리에 불러 모욕을 줄 생각은 없었다.
평소의 하 회장이었다면 당장 이 상견례를 엎었을 테지만, 그녀는 한 번 더 여진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일단 앉으렴.”
태주는 어머니의 채근에도 미동 없이 서있었다. 선이 굵고 진한 눈썹에 힘이 들어갔다.
하 회장은 한 번 더 아들을 재촉했다.
“너 때문에 일부러 귀한 시간 내서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다. 적어도 네 아내 될 사람 부모님께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겠니?”
순간 태주는 제 안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여진이랑 결혼 안 합니다.”
입술 새로 진정성 있는 한마디가 떨어졌다. 태주의 메마른 눈빛이 여진과, 그녀의 부모를 차례로 훑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따로 마음에 둔 여자가 있습니다.”
“…….”
“…….”
“따님이 평생 제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도 괜찮다고 하시면, 오늘 이 상견례에 성실히 임해드리죠.”
노성훈 대표의 미간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오늘은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몸을 일으킨 노성훈 대표가 하 회장을 향해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태주를 싸늘히 노려보던 여진 역시 부모님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태주. 넌 결국 나랑 결혼하게 될 거야. 난 강나정을 없애서라도 널 갖고 말 거니까.
잠시 후, 텅 빈 공간에 하 회장과 태주만이 남아있었다.
“잔말 말고 여진이랑 결혼해.”
하 회장의 입에서 권유가 아닌 명령이 떨어졌다.
“한 번 네가 원하는 여자랑 살아봤으면 됐다. 두 번 짼 내 뜻에 따라.”
“그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으세요?”
태주는 무심하게 뇌까렸다.
하 회장은 냉혹하고 사리 판단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여진과의 결혼을 제게 강요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취하는 것뿐이다.”
강나정이라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여진이가 필요했을 뿐이야. 하 회장이 그렇게 덧붙이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
“노여진, 너 다 알고서도 태주랑 결혼하겠다고 한 거냐?”
돌아오는 동안 내내 화를 억누르던 아버지는, 결국 자택에 들어섬과 동시에 자신을 한 대 칠 기세로 언성을 높였다.
여진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대꾸했다.
“다 알고 있었어요. 강나정이 그 호텔에서 일한다는 것도, 태주 씨가 다시 그 애한테 푹 빠졌다는 것도.”
노성훈 대표는 잠깐 말을 잃었다.
그는 딸과 절친한 사이였던 나정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나정과 여진 사이에 얽혀있는 삼 년 전 그날의 진실까지도.
“네가 그런 짓까지 했는데도 둘이 다시 만나는 걸 보면…… 결국 그 둘이 인연인 거다. 그만 포기해.”
“저 예정대로 태주 씨랑 결혼해요.”
노성훈 대표는 기가 찼다.
“나정이한테 최소한의 미안한 마음도 없는 거냐? 넌 그 애 인생을 망쳤어! 아무 문제 없던 부부를 네 손으로 갈라놨다고!”
“…….”
“만약 강나정이 네가 한 짓을 알게 되면, 대체 그 후폭풍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괜찮아요. 세상 사람들 다 알아도 태주 씨만 모르면 돼.”
여진의 눈빛이 혼탁했다. 태주에 대한 사랑은 이미 집착으로 변질한 지 오래였다.
노성훈 대표는 딸의 폭주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직감했다.
***
“나정아, 간만에 차현오 호출.”
“…….”
“나정아?”
보나가 나정의 어깨를 흔들었다. 흠칫 정신이 든 나정은 재빨리 이어셋을 귀에 꽂았다.
“누구 호출이라고?”
“차현오.”
“아, 응. 다녀올게.”
뭐야. 쟤 왜 또 멍해? 보나가 멀어지는 나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호텔 별관으로 가는 길. 걸음이 자꾸만 늘어졌다. 나정은 어제의 일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었다.
상견례까지 한 걸 보면…… 정말로 여진이랑 결혼이라도 하려는 건가.
나정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래. 내가 신경 쓸 게……,
“주임님.”
누군가 뒤에서 자신의 어깨를 짚었다.
“고객님…… 오늘은 얼굴 안 가리셨네요?”
나정이 차현오를 돌아보며 짐짓 밝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생각보다 인기가 없더라고. 무슨 무슨 아이돌 스캔들에 내 기사는 완전히 묻혔지, 뭐.”
현오가 머리칼을 가볍게 헝클이며 웃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호텔 별관에 딸린 야외 테라스에 마주 앉아있었다.
나정은 현오가 건넨 영화 시나리오를 곤혹스러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그러니까, 여기 써진 대로 대사를 읽기만 하면 되나요?”
“응. 입만 좀 맞춰줘.”
입을 맞춰달라는 말은 시나리오를 읽으며 그때그때 상대역의 대사를 쳐달라는 뜻이었다.
나정은 테라스 정원 입구에 서 있는 가드 두 명을 힐긋 바라봤다.
“근데 저분들은.”
“사비로 고용했어. 또 같이 있는 사진이라도 찍히면 네가 곤란해지잖아.”
현오가 시선을 시나리오에 내다 꽂은 채 말했다.
“실은, 이거 내 복귀작이야.”
“네?”
“예전처럼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비중 있어.”
“아…….”
자숙 중인 차현오에게 어느 영화감독이 시나리오를 준 모양이었다.
“그렇게 떠들썩하게 사고를 쳐놓고 다시 복귀한다고. 인생 참 편하게 사네. 그렇게 생각했지?”
“아닙니다. 고객님.”
나정은 조금 뜨끔해졌다.
“괜찮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현오가 피식 웃으며 시나리오를 넘겼다.
그 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얀 원형 테이블 위로 정오의 햇살이 어른거렸다.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모르지. 아마 이게 마지막일지도.”
더듬더듬 국어책을 읽는 자신에 비하면 현오의 연기는 매우 훌륭했다. 괜히 배우가 아니구나. 꼭 눈앞에서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라, 나정은 잠시 멍해졌다.
“뭐 해?”
“아. 네, 어디까지 했죠?”
행여 몰입을 방해할까 싶어 후다닥 시나리오를 넘기던 나정은, 문득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태주를 발견했다. 그는 다른 고객을 배웅하고 있었다.
우람한 피지컬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는 블랙 슈트와 왁스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는 오늘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
순간 태주의 시선이 이쪽을 향한 것 같았다.
흠칫한 나정은 다시 손에 든 시나리오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 어디였지…….”
여기. 현오가 시나리오의 아랫부분을 짚어주었다.
나정은 가까운 곳의 태주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대사를 읽기 시작했다.
“난 아는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요. 그게 내가 당신을 붙잡지 못하는…… 붙잡지 못하는 이유예요…… 그렇다고 우리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은 안 해요.”
천천히 읊조리던 나정은 이내 다음 대사를 보고 낮게 숨을 골랐다.
“오늘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당신만을……,”
휙, 갑자기 시야에서 시나리오가 사라졌다.
등 뒤로 다가선 태주가 빼앗아 든 시나리오를 눈으로 훑었다.
“그만하시죠. 이런 짓.”
날이 선 시선이 현오를 향했다.
“강나정 주임한테 민폐입니다.”
“민폐?”
“이런 식으로 엮여서 강나정에게 득이 될 게 없다는 소립니다.”
현오는 살짝 웃었다.
“그럼 그쪽이 대신 상대역 좀 해줄래요?”
태주의 미간이 적나라하게 일그러졌다.
“내 직원한테 사심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