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36화.
“난 저스트 프렌드쉽이고. 사심은 그쪽이 있는 것 같은데.”
“…….”
“말해봐. 주임님이랑 무슨 사이예요?”
두 남자의 시선이 아뜩하게 부딪쳤다.
나정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태주를 바라봤다.
태주의 입은 한참이나 열리지 않았다. 그는 대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엔 늘 침묵을 지켰다.
적어도 같은 팀 동료라든지, 아끼는 부하직원이라든지, 그런 대답을 해주길 바랐던 걸까. 나정은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즈음 태주가 상체를 비틀었다. 그리고 몇 걸음을 내딛다가 다시 충동적으로 몸을 돌려 돌아왔다.
“이 여자 때문에 어제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내 손으로 파투 냈습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
“나정아, 이거 봐. 너어어무 예쁘지?”
보나는 아침부터 한껏 들떠 있었다. 송준에게 선물 받은 팔찌 때문이었다.
“생전에 어머니가 아끼시던 거래. 평생을 함께할 여자가 생기면 주라고 하셨다나? 어우 난 몰라!”
“예쁘네.”
나정은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보나와 송준은 알콩달콩한 연애를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진도가 살짝 빠르긴 했다. 선 잠자리 후 연애를 시작한 것도 모자라, 돌아가신 어머니의 팔찌까지 선물하다니.
이러다 갑자기 속도위반 결혼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나정은 내심 무서워졌다.
“흥, 근무시간에 하고 다니기엔 너어어무 화려한 거 아냐? 우 총이 보면 가만 안 있을걸?”
“가만 안 있으면 지가 어쩔 건데? 여기가 호텔이지 학교야? 액세서리도 내 맘대로 못 하는…….”
동료와 대화를 나누던 보나가 흡, 눈을 키웠다. 비서를 대동한 채 걸어오는 태주가 레이더에 잡혔다.
기세 좋게 떠들어 댈 땐 언제고, 보나는 팔찌를 감추기 위해 재빨리 소매를 끌어내렸다.
“뭡니까?”
프런트 앞에 멈춰선 태주가 어색하게 제 눈치를 보는 보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 불편해요?”
“아, 아닙니다, 총지배인님! 급하게 전달하실 용무라도 있으신가요?!”
보나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컸다. 태주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운을 뗐다.
“경화 리조트 현장 답사. GRO 팀에선 누가 가기로 했습니까?”
“아, 그거. 저랑 강나정 주임님이 가기로 했는데요.”
보나가 옆에 있던 나정을 휙 끌어당겼다.
그제야 태주의 시선의 나정을 향해 떨어졌다. 나정 역시 그를 올려다봤다.
‘이 여자 때문에 어제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내 손으로 파투 냈습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며칠 전 그 일이 있고 난 후, 이상하리만큼 태주와 부딪치는 일이 적어졌다.
혹시 태주가 일부러 자신을 피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눈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강나정 주임 말고 다른 대체 인력 없습니까?”
“……다른 팀원들은 일정 변경이 어려워서요. 제가 가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어쩐지 태주의 대답이 떨떠름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짧게 훑더니, 이내 상체를 비틀었다.
“뭐야? 왜 또 찬바람이 쌩쌩 불어? 너 혹시 우 총한테 뭐 실수 한 거 있어?”
나정이 멀어지는 태주의 뒷모습을 말없이 눈으로 좇았다.
***
“와, 눈 좀 봐! 12월에 눈을 보긴 보는구나. 이제야 진짜 겨울 같네!”
제설작업이 한창인 스키장 슬로프 위에서 보나가 크게 양팔을 벌렸다.
새롭게 개장을 앞둔 경화 리조트는 엘러퀀스 호텔과 파트너십 전략 관계를 맺고 있었다. 개장을 2주 앞둔 시점에서 호텔의 Brand Standard를 공유하기 위해 태주와 각 부서 담당자들이 현장 답사를 나온 것인데, 정작 보나는 답사고 뭐고 마냥 놀러 온 기분에 취해 있었다.
“아직 오픈 전이라 휑하네. 우리가 꼭 여기 전세 낸 것 같아요. 송준 씨.”
“추워요. 이거 둘러요.”
“그럼 송준 씬요. 송준 씨도 춥잖아요.”
“그럼 손잡아줘요.”
“어머, 난 몰라.”
꽁냥거리는 눈앞의 연인을 보며 나정은 작게 한숨지었다.
“나, 나정아. 우리 리프트 타고 위에 올라가 보자. 여기 되에게 좋다 그치??”
그런 나정의 눈치가 보였는지 보나가 다시 후다닥 옆에 달라붙었다.
“우리 여기 일하러 왔어.”
“잠깐만 올라갔다 오자는 거지. 나 스키장 진짜 오랜만이란 말이야. 자 빨리!”
보나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정을 이끌었다. 목적지는 저 앞에 보이는 리프트 승강장이었다.
“보나 씨랑 나정 씨, 참 보기 좋은 우정이야. 꼭 우.리.처.럼. 안 그래?”
혼자 남겨져 있던 송준이 어느덧 제 옆으로 다가선 태주를 향해 말했다.
태주의 시선은 꺄르륵 웃으며 멀어지는 두 여자를 좇아 움직이고 있었다.
송준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합치고 싶으면 가서 솔직하게 말해. 합치자고.”
“뭐.”
“나 다 알아. 너랑 나정 씨 관계.”
태주는 입을 다물었다.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어차피 나정과의 관계를 필사적으로 숨길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굴지 말고, 가서 너답게 표현해. 너 나정 씨랑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 한국 들어온 거 아냐?”
삼 년 전 나정과 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헛소리 마. 잘해볼 생각 없으니까.”
태주가 송준을 등지고 돌아섰다.
저렇게 솔직하지 못해서야. 남겨진 송준이 쯔쯧 혀를 찼다. 제설 기계가 뿜어낸 인공눈이 햇빛을 머금고 반짝거렸다.
몇 시간 후, 태주와 직원들은 리조트의 부대시설을 돌며 운영 전반에 대한 메뉴얼을 점검했다. 나정과 보나도 언제 들떴었냐는 듯 바쁘게 현장을 돌았다.
꼬박 반나절을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닌 후에야, 그들은 가오픈한 직원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때울 수 있었다.
“이게 점심이야, 저녁이야…….”
“하여간 우 총, 정말 징한 남자야. 이건 뭐 현장 답사를 나온 건지 압수수색을 나온 건지. 한두 시간만 슬쩍 보다 갈 줄 알았는데 벌써 해가 졌다, 해가 졌어.”
“어으, 삭신이야…….”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졌다.
나정은 태주에 관한 얘기를 애써 귀 뒤로 흘리며 젓가락을 움직였다.
“초, 총지배인님! 여기요, 여기 자리 있어요!”
그때 송준과 보나가 슬쩍 눈빛을 교환하더니 멀리 있는 태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의 속셈은 뻔했다. 어떻게든 나정과 태주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것이다.
곧 식판을 든 태주가 고개를 비틀었다.
왜였을까.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정은 켁,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괘, 괜찮아? 나정아!”
보나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정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등에서 식은땀이 확 솟구쳤다.
“무. 물 가져올게!”
보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나정의 앞에 물컵을 탁 내려놓았다.
태주였다.
나정은 인사할 새도 없이 일단 물부터 꼴깍꼴깍 들이켰다.
“총지배인님,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 비었습니다.”
그 사이 태주는 옆을 지나쳐 다른 동료들이 있는 자리에 몸을 앉혔다.
“나, 나정아. 괜찮아?”
“어…….”
잠시 후 나정은 머쓱한 얼굴로 빈 컵을 내려놓았다.
저 멀리, 무심한 얼굴이 보였다. 밥을 먹다 한 번쯤 눈이 마주칠 법도 한데 태주는 단 한 번도 나정과 시선을 섞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의도적인 무시였다.
하하. 송준과 보나가 맞은편에서 멋쩍은 듯 웃었다.
“…….”
그럼 그냥 지나쳤으면 될걸.
나정이 손안의 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그러곤 다시 태주를 응시했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저 사람도 나만큼 혼란스러운 게 아닐까.
태주는 나정을 완전히 미워할 수도, 온전히 사랑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갇힌 것 같았다.
적어도 나정의 눈에는 그가 화가 난 게 아니라, 꼭 괴로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어떡해, 내 팔찌! 대체 어딜 간 거야……?”
리조트 로비. 부산하게 이곳저곳을 들쑤시던 보나가 제자리에서 울상을 지었다.
“벌써 삼십 분이나 뒤졌는데 안 나오는 거 보면, 여기 없는 거야.”
“그럼 어떡해. 대체 어디서 흘린 거야…….”
삼십 분 전, 비로소 손목의 허전함을 눈치챈 보나는 정신없이 팔찌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만 포기해. 이 넓은 데서 어떻게 찾아.”
“안 돼. 그거 돌아가신 송준 씨 어머님 거라고. 송준 씨한테 선물 받자마자 잃어버렸다는 말을 어떻게 해? 난 못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래!”
보나가 울먹이며 제 머리를 헝클었다. 나정은 살짝 마음이 약해졌다.
“일단 흩어져서 찾아보자.”
“정말?! 흑, 미안해 나정아. 괜히 너까지…….”
“난 스키장 쪽으로 가볼 테니까 넌 구내식당부터 돌아봐.”
다시 혼자서 스키장을 찾았을 땐, 이미 해가 완전히 기운 후였다.
야간조명이 켜진 설원을 막막하게 바라보던 나정이 위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던 직원과 마주쳤다.
“혹시 분실물 나온 거 있나요? 여자 팔찐데…….”
딱히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그런데 직원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 혹시 그건가?”
“보셨어요?”
“확실한 건 아닌데. 리프트 타는 곳에 뭔가 반짝이는 게 떨어져 있긴 했어요. 저 위에서 봤어요.”
직원이 슬로프 정상을 가리켰다.
나정은 이 소식을 보나한테 알리기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핸드폰은 배터리 부족으로전원이 나가 있었다.
어쩌지. 고민도 잠시, 결국 직원의 말을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얼른 다녀오지 뭐. 나정이 리프트 승강장으로 향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현장 답사를 무사히 마친 태주가, 떠나기 전 리조트 실무진과 악수를 주고받았다.
“보나 씨. 뭐 찾아요?”
그 와중에 바쁜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던 보나는 송준의 질문에 움찔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가 찔리는 게 생기자 대뜸 목소리부터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