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37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던 송준은 이내 나정의 부재를 깨달았다.
“근데 나정 씨는요?”
“나, 나정이요?”
“연락해봐요. 이제 집에 가야지.”
남의 속도 모르고 왜 저렇게 멋지게 웃어. 보나는 쭈뼛쭈뼛 핸드폰을 꺼내 귀에 갖다 댔다. 곧이어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음이 귓전을 울렸다.
“어…… 꺼져있는데요?”
그즈음 리조트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던 태주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
“나정 씨 전화 아직도 안 받아요?”
“네. 얘가 어딜 간 거야…….”
보나가 초조한 듯 리조트 휴게실을 왔다 갔다 했다.
“혼자서 호텔 복귀한 거 아닐까요?”
“말도 없이 그럴 리가 없지. 차도 그대로 있고…….”
날은 이미 저물었고,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던 다른 직원들도 점차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게 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괜히 팔찌 찾겠다고 나정이 앞에서 오두방정 떨어서. 미안해요, 송준 씨.”
“괜찮아요,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일단 나정 씨부터 찾아봐요.”
개장을 앞둔 리조트 주변은 공사 중인 부지나 허허로운 들판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딱히 여자 혼자 갈 만한 곳도 없었다.
“아직 통화 안 됩니까?”
그때였다. 다른 직원들과 나정을 찾으러 나갔던 태주가 휴게실로 복귀했다.
보나는 주춤하며 고개를 저었다. 커다란 손이 그런 보나의 어깨를 잡아챘다.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이 어딥니까.”
“어…… 리조트 로비요. 거기서 전 구내식당으로 내려갔고, 나정인 스키장 쪽으로…….”
“스키장. 확실해요?”
태주의 눈동자가 조여들었다.
“거기엔 없을 거예요. 리프트 점검 때문에 아까 입구 막아놨거든요.”
리조트 직원의 말을 무시한 채, 태주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총지배인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강나정!”
눈 덮인 슬로프는 이미 흑막 같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첨탑의 조명도 꺼진 상태였다.
“강나정……!”
한 번 더 가파른 외침이 설원을 울렸다. 소리는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고 그대로 아득히 퍼져나갔다.
우웅. 귓전을 울리는 바람이 꼭 동물의 울음소리처럼 들렸다.
슬로프 중앙에 홀로 서 있는 태주는 하얗다 못해 시린 배경 속의 작은 점 같았다. 그만큼 무력했다.
“…….”
태주가 지그시 아랫입술을 물었다 뗐다.
몇 시간 전 구내식당에서 본 게 강나정과의 마지막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사레가 들려 콜록대던 나정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태주는 시선을 끌어내렸다.
그럴 리가 없는 걸 아는데, 이상하게도 묘한 공포심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왠지 이대로 영영 강나정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강나정은 달아난 거야.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등허리를 달라붙었다.
‘도망치는 게 방법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여기 남기로 했어요.’
그렇게 말해놓고.
‘총지배인님 옆에 있고 싶어요, 저.’
그렇게 안심하게 만들고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버린 거야.
“……강나정.”
넌 절대 나한테서 벗어날 수 없어.
달빛을 머금은 설원이 은은하게 빛났다. 제설 기계가 공중에 내뿜는 인공 눈은 진짜 하늘에서 내리는 진눈깨비 같았다.
“…….”
목소리가 꽉 막혀 태주는 더 이상 나정의 이름을 외칠 수도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벗어날 수 없는 건 나정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강나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조롱하고, 모욕하고, 상처줄수록, 이상하게도 아픈 건 늘 자신이었다.
돌아와.
제발.
태주가 주먹을 그러쥔 채 읊조렸을 때였다.
“총지배인님……?”
오른쪽 다리를 절뚝이며 슬로프를 내려오던 나정이 멈칫, 걸음을 세웠다.
그녀를 발견한 태주가 눈을 키웠다.
“여기서 뭐 하세요? 혹시 저 때문에…….”
나정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주의 표정이 처참했다.
“죄송해요. 실은 사고가 좀 있었어요. 뭘 좀 찾으려고 정상에 올라갔는데, 갑자기 리프트가 멈추는 바람에, 그래서 걸어 내려오다 하필 또 발을 접질려서요.”
왜 이런 얘기를 두서없이 늘어놓고 있는 걸까. 횡설수설하던 나정은 이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태주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너 정신 나갔어?’
금방이라도 그렇게 고성을 지르며 멱살을 끌어당길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다른 직원들까지…….”
말을 잇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태주의 그림자가 졌다.
“총지배인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한 손아귀가 자신을 끌어당겼다.
이윽고 나정은 자신이 태주의 품 안에 안겨있음을 깨달았다.
지난 삼 년간 그토록 그리워했던 태주의 체취가 흠씬 느껴졌다.
“……태주 씨.”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태주에게선 한동안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눈 덮인 슬로프 위로 제설기 돌아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못 하겠다.”
한참 만에 낮고 무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주는 나정을 안은 두 팔에 좀 더 꽉 힘을 주었다.
“못 하겠어. 널 밀어내는 거.”
“…….”
“눈에서 안 보이면 미칠 거 같아.”
“…….”
“미워하려고 그렇게 기를 썼는데.”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주가 나정의 어깨 위에 이마를 갖다 댔다.
“강나정.”
“…….”
“제발 나 좀 봐줘.”
절절한 목소리는 어느덧 삼 년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나정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서있었다. 태주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피하지 마.”
빨갛게 언 손이 나정의 뺨을 감쌌다. 태주가 그대로 입을 맞추려 고개를 기울였다.
나정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돌렸다.
“내가 삼 년 전에 당신한테 한 짓…… 용서할 수 있어요?”
태주에게 묻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 일, 영원히 당신을 괴롭힐 거야. 날 볼 때마다 고재영이 떠오를 테고, 그럼 태주 씨는 지옥에서 살게 될 거예요.”
“상관없어. 이제 그런 거.”
너랑 헤어진 지난 삼 년이 내게는 이미 지옥이었어.
태주의 뜨거운 입술이 곧 나정을 집어삼켰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참았던 감정들이 여과 없이 분출되었다. 열 오른 타액이 서로를 넘나들었다.
태주가 나정의 목을 좀 더 빠듯이 끌어당겼다. 고개를 옆으로 젖히자 언뜻 볼 우물이 패였다 사라졌다. 깊숙이, 그는 나정의 숨결을 빨아들였다.
더 이상 원망이나 증오심은 남아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몰랐다.
난 널 사랑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어. 태주는 정신없는 입맞춤으로 그 말을 대신했다.
나정아! 총지배인님! 멀리서 두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곧 꿈결처럼 그 소리가 멀어졌다.
나정은 감은 눈을 파르르 떨며 태주의 한 팔을 붙잡았다. 이제 놓지 않을 거야. 이번엔 절대, 도망치지 않을 거야.
***
“나정아. 아니 나정 님.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언제든 미천한 저에게 주문만 하세요.”
보나는 아침부터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또 빌었다.
“나정 님. 저 어제 반성 많이 했어요. 괜히 입방정이나 떨어서 나정 님을 위험에 빠뜨리질 않나. 저 때문에 발목까지 접질리시고. 정말이지 전 친구 자격도 없는……,”
“그만해. 아까부터 못 들어주겠다.”
출근 준비를 하던 나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보나는 아랑곳없이 아부를 계속했다.
“저 때문에 발목까지 접질리시고. 아…… 이건 했구나. 어쨌든 미천한 제 팔찌까지 찾아주시고. 또,”
“그만하랬다.”
나정이 가볍게 보나를 밀치며 화장대에 앉았다. 잠깐 망설이더니, 그녀는 평소에 바르지 않던 화사한 립스틱을 골랐다.
“엥. 웬일이야, 맨날 칙칙한 것만 바르고 다니더니.”
드디어 본래대로 돌아온 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잘 보일 사람이라도 있어? 그런 걸 다 바르고…… 어?! 너 설마!”
보나가 오버스럽게 입을 틀어막았다.
“어제 그 리조트에서 우 총이랑 뭔 일 있었지! 그치?!”
이미 그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었다.
그도 그럴 게, 어젯밤 나정을 찾았을 때 그녀는 우 총과 함께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보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 혹한 추위에도 나정의 얼굴에 열기가 가득했다는 것을.
“너 혹시 우 총이랑 키스했어?”
“풉!”
나가기 전, 현관 앞에서 선식을 마시던 나정은 하마터면 입에 있던 액체를 전부 뿜을 뻔했다.
“흐응. 그렇구나. 그렇게 돼버렸구나.”
보나가 제 눈은 못 속인다는 듯 음흉하게 웃었다.
나정은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누르며, 재빨리 현관을 벗어났다.
***
“분명히 전달한 거 맞아요?”
얼마 전 톱스타 하연주의 결혼으로 유명세를 탄 웨딩홀은 여진이 보기에도 흠잡을 데 없이 근사했다. 채플 형태의 홀 외관은 자연광을 머금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왜 수많은 스타들과 정계 인사들이 이곳에서 식을 올리는지 알 것 같달까.
문제는, 우태주였다.
김 비서를 통해 미리 스케줄을 전달했음에도, 보란 듯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정 연락이 안 되시면, 오늘은 신부님 먼저 투어를 해보시고 다음에 같이 오셔서……,”
“입 닥쳐.”
여진이 제 앞에서 쩔쩔매는 플래너를 노려보다 휙 몸을 일으켰다.
“안 오면 내가 직접 쳐들어가는 수밖에.”
그녀가 새빨개진 눈으로 웨딩홀을 나섰다.
“저…… 총지배인님 좀 뵈러 왔는데요.”
리셉션 데스크에 앉아있던 비서가 나정을 흘끔 보더니, 곧 키폰을 연결했다.
“총지배인님. GRO부서에서…… 아. 네.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랍니다.”
나정은 가볍게 묵례를 하고 총지배인실로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무 책상에 앉아있는 태주가 보였다.
손깍지를 끼고 그 위에 턱을 얹은 태주는 제게 다가오는 나정을 별스럽지 않게 응시했다.
“지금 GRO팀 점심시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