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38화.
“네. 맞습니다.”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그게.”
나정은 말문이 막혔다.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밥이 안 넘어갈 것 같아서요. 그렇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결재받을 서류가 있어서요.”
태주가 제게 건네진 파일철을 펼쳐보았다. 그의 입가에 언뜻, 웃음이 스쳤다.
“그다지 급한 건 아닌데. 이것 때문에 왔어요?”
나정은 잠깐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역시 솔직한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사실은 어제 일 때문에 왔어요.”
“어제 일……?”
“리조트에서요. 총지배인님이랑 저. 그 일에 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그 일이라는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거지?”
“그거.”
“그거?”
태주는 일부러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나정은 긴장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키스요. 우리 어제 했던 그 키스에 대해서. 확실히 해두고 싶어요.”
기어이 직접적인 단어를 입에 올리는 나정을 보며, 태주는 다시 짧게 웃었다.
왜 자꾸 웃는 거지? 나정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계속 모른 척하시면, 저 좀 불안해요. 무섭다고요.”
이번엔 웃는 대신 태주가 몸을 일으켜 나정에게 다가왔다.
“정말로 이 상황이 무섭고 불안한 건 나예요. 강 주임.”
“…….”
“꿈인지 현실인지 믿기질 않아서, 너한테 섣불리 손을 대기가 어렵다고.”
나정은 조바심을 내는 태주의 표정을 마주 봤다.
“전 지난 삼 년 간 한 번도 총지배인님을 잊어본 적 없어요. 그러니까 불안해하지 마요.”
태주의 한 손을 끌어다 제 얼굴에 갖다 댔다. 동시에 태주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젠 안 참을 거예요.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 안 하고, 총지배인님만 볼 거예요.”
“태주 씨라고 불러, 둘이 있을 땐.”
그가 몸을 기울여 나정의 목에 입을 맞췄다. 으읏. 나정은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곧 커다란 두 손이 자신의 허리춤을 붙들었다.
“섣불리 손대기 어렵다면서요.”
코앞에 대고 그렇게 읊조리자, 태주는 어쩐지 더욱 조바심을 냈다.
“삼 년이나 기다렸어.”
“…….”
“더는 못 기다려.”
그가 깊이 호흡을 섞기 위해 나정을 끌어당겼다. 강한 손길에 나정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
일순 멈칫한 태주는 눈을 감은 나정을 내려다봤다.
오목한 이마와, 감긴 눈꺼풀, 얄쌍한 코. 그리고 입술.
엄지로 나정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쓸다가, 이내 태주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의 조심스러운 입맞춤에 나정은 눈을 떴다.
곧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태주의 입가가 보였다.
삼 년 전의 그 사람으로 돌아왔어. 내 남편이었던 우태주로, 나정의 눈이 연하게 일렁였다.
“잠깐만요,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ㄷ……,”
“비켜!”
그때였다. 문밖에서 날카로운 여진의 외침이 들려왔다.
“이 손 안 놔? 얻다 손을 대!”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틀림없는 여진이었다.
나정이 태주와 밀착했던 몸을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며 여진이 들어섰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여진을 따라 들어온 비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짧은 시간 얼마나 많은 폭언을 들었을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만했다.
“강나정? 네가 왜 여기 있어?”
기민한 여자의 촉 같은 거였다. 집무 책상 앞, 어정쩡한 자리에 마주 서 있는 태주와 나정의 모습은 여진의 눈에 지나치게 외설적으로 보였다.
“뭐야 두 사람? 뭐냐고!”
태주가 나정의 손을 거머쥐었다. 그 어떤 말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여진은 가슴에 칼이 꽂힌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둘이, 그렇게 된 거야……? 결국 날 배신한 거야?”
부릅뜬 눈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현실감각을 상실한 듯 눈앞의 태주와 나정이 진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배신? 애초에 너랑 내가 무슨 사이이긴 했나?”
태주가 역으로 물었다. 무감정한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자존심이 상했다. 여진은 입안의 살을 세차게 짓이겼다.
지금까지 태주의 홀대를 참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여자들에게 벽을 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정이 손을 빼려고 할 때마다 태주는 도리어 그녀를 붙든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여진은 참을 수 없는 패배감에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었으면.그랬으면 눈앞의 저 두 사람을 죽여서라도 떼어 놨을 텐데.
***
카페는 한산했다. 언젠가 이 자리에서 여진에게 비웃음을 산 적이 있었다.
‘나 지금 태주 씨랑 결혼 전제로 사귀고 있어.’
‘나정아. 정말 내가 널 배신했다는 걸 모르겠니?’
자신을 깔보고 무시하던 그 날의 여진은 지금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진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태주 씨랑 정말 다시 만나는 거야?”
먼저 입을 연 건 여진이었다.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오히려 나정이 친구 애인을 빼앗은 나쁜 년 같았다.
“그래. 다시 만나.”
나정은 짧게 대답했다. 커피를 쥔 여진의 손이 움찔거렸다.
“내가 널 따로 보자고 한 건, 한때 친구였던 너한테 마지막 충고 정도는 해주는 게 도리일 것 야 같아서야.”
충고? 이런 상황에서도 여진은 나정을 비웃었다.
“정신 차려. 너 강나정이고 난 노여진이야. 어떻게 네가 나한테 충고를 해?”
나정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간 도를 넘는 네 행동에 내가 무대응으로 일관한 건, 너 스스로 네가 한 짓에 부끄러움을 느끼길 바랐기 때문이야. 근데 내 생각이 틀렸어. 넌 최소한의 미안함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애야.”
여진의 낯빛이 일그러졌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너겠지. 그래서 삼 년 전에 남편 친구랑 놀아난 거잖아?”
다른 자리에 있는 사람들까지 들을 수 있도록, 여진은 고의로 데시벨을 높였다.
“참 뻔뻔해. 이제 와서 네가 버린 전남편한테 다시 빌붙고 싶니? 그러다 고재영이 깨어나면? 다시 고재영한테 갈 거 아냐? 아. 아닌가? 설마 또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저울질하려나? 그편이 더 남자들을 안달 나게 할 테니…… 꺅!”
여진의 비명 소리가 카페를 흔들었다.
나정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여진의 정수리에다가 마저 부었다.
“미쳤어?! 뭐 하는 짓이야!”
머리칼에서 갈색 액체가 뚝뚝 흘렀다. 여진은 어린아이가 열 경기를 하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정은 아랑곳없이 빈 커피잔을 탁! 내려놓았다.
“내가 널 봐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까불어.”
여진은 뭔가를 쏘아붙이려다 그대로 입술을 깨물었다.
고재영의 얘기가 나오면, 나정은 언제나 눈빛부터 위축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영원히 더러운 과거에 발목 잡힐 줄 알았던 강나정이 달라졌다.
“뻔뻔해. 더러워.”
여진은 더욱 오기가 나 지껄였다. 그러나 나정은 휘둘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좋아. 만약 태주 씨가 똑같은 말을 하면서 나한테 헤어지자고 한다면, 난 군말 없이 받아들일 거야.”
“…….”
“하지만 태주 씨가 날 필요로 한다면. 난 언제까지고 그 사람 옆에 머물 거야.”
“강나정!”
여진의 앙칼진 외침에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힐긋댔다.
“소리 지르지 마. 목 나갈라.”
나정은 마지막까지 차분했다. 그녀를 쏘아보던 여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출렁거렸다.
***
“똥준씨!”
“뽀나씨!”
퇴근 후 팀원들 눈을 피해 호텔과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재회한 보나와 송준은, 서로가 그토록 애틋할 수 없었다.
부둥켜안은 채 한동안 둥가둥가 애정표현을 지속하던 두 사람은 길거리를 지나가던 노인의 혀 차는 소리를 듣고서야 맞붙었던 몸을 떨어뜨렸다.
“근데 웬 케이크예요?”
“아, 이거요. 나정이 주려고요.”
송준의 차를 타고 숙소로 들어가는 길. 보조석에 앉은 보나는 딸기 타르트 케이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정이가 여기 베이커리 케이크를 좋아해서요. 굳이 예약까지 해서 샀다니까요?”
“나정 씨 뭐 축하받을 일 있어요?”
“헉! 아, 아니에요!”
흠칫한 보나가 티 나게 부정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눈치 백단 소송준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혹시. 태주도 관련 있는 건가?”
“헉, 그걸 어떻게……?!”
“어제 스키장에서 태주랑 나정 씨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데.”
“허얼?!”
“설마 달밤의 설원에서 둘이 사랑의 맹세라도 주고받았나?”
“…….”
“아님. 키ㅅ……?”
“대박! 대박! 어떻게 알았어요, 둘이 키스한 거?! 혹시 봤어요?”
아니, 보진 않았는데. 송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핸들을 돌렸다.
“보나 씨랑 있으면 어떻게 자꾸 알게 되네요.”
“그래요? 진짜 신기하네.”
송준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좋은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니까 보나 씬, 그 두 사람을 축하해주고 싶은 거죠?”
“네. 이따 나정이랑 저녁 먹으면서 소소하게 케이크나 자르려고요”
“케이크는 태주랑 자르게 하는 거 어때요?”
“넹?”
“다 큰 성인인데. 좀 찐하게 축하해줘야죠?”
무슨 소린지 영문을 몰라하는 보나를 보며, 송준이 씩 웃었다.
몇 시간 후. 나정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섰다.
하. 집에 들어가자마자 따뜻한 물에 몸부터 담가야지. 상상만으로도 벌써 몸이 노곤해졌다.
그러나 막상 1004호 현관 앞에 다다랐을 때, 요주의 인물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나정아. 옆집으로 와. 다 같이 저녁 먹자.]
갑자기 웬 저녁? 나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1003호 앞에 멈춰 섰다. 안에서는 별다른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보나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들릴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