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남편이 부임했다-39화 (39/60)

전남편이 부임했다 39화.

잠시 갈등하던 나정은 일단 문고리를 붙잡았다. 철컥, 문은 쉽게 열렸다. 뭐지?

“보나야? 송준 팀장님?”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는데, 머리 위 현관 센서가 자동으로 팟! 하고 켜졌다.

그와 동시에 나정은 동그랗게 눈을 치떴다. 은은하게 켜진 미니 캔들이 현관에서 거실까지 길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식탁엔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거실 천장엔 헬륨을 주입한 펄 풍선이 빼곡히 차있었다.

이 유치한 풍선의 도가니는 다 뭐야? 나정이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풍선은 송준이 아닌 보나의 아이디어였다.

애초에 송준이 도모한 건, 나정과 태주 단둘만의 ‘오붓한 식사’였지만. 보나는 그 뜻을 잘못 해석했다. ‘두 사람의 오붓한 뜨밤’으로.

윽. 나정은 의의로 이런 오글거리는 이벤트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단, 인위적으로 꾸며낸 간지러운 분위기를 잘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보나의 의도를 파악한 나정은 태주가 오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리라 마음먹었다.

식탁 위의 음식이 아직 따뜻한 걸 보면, 분명 보나는 근처에 있었다.

“하여튼 간보나, 못 살아.”

나정이 가볍게 탄식하며 현관문을 안에서 밖으로 열었을 때였다.

벌컥 벌어진 문 틈새로 흠칫할 만큼 위압적인 실루엣이 보였다.

“아…… 어…….”

당황한 나정은 그대로 정지했다.

“왜 여기 있어.”

태주가 의아한 듯 살짝 고개를 젖혔다. 이윽고 현관으로 들어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인위적인 캔들 로드와 천장을 덮은 풍선의 향연이었다.

“그게…… 아무래도 송준 씨랑 보나가 이런 걸 준비한 것 같아요…….”

송준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태주는 눈앞의 상황을 단박에 이해했다.

나정은 멋쩍게 해명을 이어갔다.

“전 절대 모르는 일이고요. 특히 저 풍선. 저 양초 길…… 제가 만들어 달라고 한 거 아니에요. 보나가 일방적으로…….”

순간 태주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스쳤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해명할 필요 없는데.”

“저, 저 그만 가볼게요.”

이건 꼭 대놓고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것 같잖아. 멋쩍어진 나정은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곧 태주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같이 먹지. 저녁 아직일 텐데.”

태주가 식탁 위의 음식을 흘긋 고갯짓했다.

“차려둔 성의가 있는데 무시할 순 없잖아.”

평소에는 잘만 무시하지 않았나요, 남의 성의를. 나정은 그렇게 물으려다,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콩콩- 그때 누군가 현관문을 경쾌하게 두드렸다.

“나정아, 송준 씨 오늘 안 들여보낼 거야. 우 총이랑 좋은 시간 보내!”

네가 말하는 그 우 총, 지금 이 안에 같이 있다고. 나정의 얼굴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좋은 친굴 뒀네.”

곧 머리 위에서 나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저리 치워!”

화실의 캔버스며 석고 모형들이 여진의 손에 깨지고 부서지며 두 동강이 났다.

김 비서를 비롯해 수행 요원이 셋이나 달라붙었지만 여진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제 상반신만 한 석고상을 들어 그대로 바닥에 퍽 내동댕이쳤다.

“아가씨!”

“내버려 둬.”

김 비서가 다른 수행 요원들을 막아섰다. 더 말려봐야 여진은 들을 것 같지 않았다.

J그룹에 자신의 평생을 바친 김우종 비서는, 여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다. 어쩌면 그녀의 아버지인 노성훈 대표보다도 더.

다섯 살일 때부터 지켜봐 온 여진은 본인이 원하는 걸 갖지 못하거나 빼앗기는 상황에 면역이 없었다.

여진의 부모는 그녀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건 뭐든지 해주었다. 바꿔 말하면 돈으로 사지 못하는 사랑, 아이에게 쏟는 헌신과 희생은 없었단 소리였다.

특히 여진의 아버지 노성훈 대표는 성공한 기업인이었으나 가정에는 별로 충실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딸을 가진 아빠는 대부분 딸바보라는 수식어를 얻었지만, 노성훈 대표만은 예외였다. 그는 딸보다 중요한 걸 너무 많이 손에 쥐고 있었다. 아직도 딸의 생일이 봄인지 가을인지 헷갈렸다.

반대로 어머니 이영은 여사는 그런 여진을 안타까이 여겨 해달라는 모든 것을 해주었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수십억 가량의 건물을 증여하고, 여진이 반려견을 품종별로 들이고 버리기를 반복할 때도, 도리어 그녀에게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품종견을 선물했다.

가진 게 많은데도 이상한 허기짐, 묘한 뒤틀림이 생겨난 것은 결국 부모의 공이 컸다. 여진은 몸만 자란 미성숙한 아이와 같았다.

“나정이한테 다시 태주 씰 뺏길 수는 없어. 걔한텐 안 돼…….”

여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녀를 지켜보던 김 비서는 낮은 한숨 끝에 입을 열었다.

“열흘 뒤 엘러퀀스 호텔에서 주관하는 자선 파티가 있습니다. 그날, 우태주 총지배인의 마음을 완전히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태주와 단둘이 식사를 하는 동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송준이 준비한 스테이크는 익기도 적당했고 육즙이 풍부해 입에 들어간 순간 꼭 메쉬드 포테이토처럼 사르르 녹았다.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할까. 송준은 연회부서가 아니라 F&B로 가 쉐프가 됐어야 했다. 나정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였다.

“한 잔 더?”

태주가 와인 병을 손에 쥐며 물었다.

“아뇨,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아요.”

나정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왠지 술에 취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식탁 주변에서 은은한 빛을 내뿜는 미니 캔들도, 천장을 가득 메운 헬륨 풍선도 마냥 유치한 이벤트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태주와 이 공간에 들어와 있으니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어, 이 케이크 성소 베이커리 거네요.”

나정은 괜히 케이크 상자를 매만지며 화제를 돌렸다.

“여기 타르트 케이크 맛있거든요. 미리 예약 안 하면 사기 힘든데.”

“그래?”

의외로 태주가 반응을 보였다. 그가 케이크의 상호를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아직도 단 거 좋아해?”

“네. 똑같아요. 여전히 초딩 입맛이에요.”

나정은 태주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치는 걸 보았다. 왜 이렇게 목이 마르지. 묘한 갈증을 느낀 그녀는 결국 앞에 놓인 와인을 조금 들이켰다.

“자고 갈래?”

뭐? 나정의 고개가 맞은편을 향해 올라섰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태주가 와인으로 입을 축이며 말했다. 원래가 직설적인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나정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솔직히 싫진 않았다. 처음 사귀는 것도 아니고. 이미 한번 살아봤던 남자잖아. 그래서 난 저 남자 품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잖아.

나정은 동요하는 눈빛으로 대답을 머뭇댔다.

그즈음 몸을 일으킨 태주가 식탁 위의 빈 접시들을 나르기 시작했다.

나정은 눈앞의 너른 등판을 말없이 응시했다.

“……자고 갈래요.”

입술 새로 불쑥 본심이 튀어 나갔다.

사실은 태주와 밤새 함께 있고 싶었다. 예전처럼 그를 부둥켜안고 마음껏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들어가자.”

태주가 돌연 그릇을 싱크대에 버려둔 채 다가왔다.

***

태주의 침대는 혼자서 쓰기엔 넓은 사이즈였고, 둘이 눕기엔 조금 빠듯했다.

나정은 그의 품에 안겨 천천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가끔 글자를 쓰듯 단단한 가슴팍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보기도 했다.

“자고 가겠다는 게 정말 잠만 자겠다는 소리였어.”

“네?”

“아냐.”

태주가 제 팔을 베고 누운 나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건 남자에게 가혹한 고문과도 같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나정의 표정이 너무 편안해 보여서 입을 달싹일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이 나요. 꼭 삼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

태주는 알까. 그의 품에선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는 냄새가 났다. 그래서 나정은 이혼 후 일 년 동안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자지 못했다. 태주의 부재는 한때 그녀를 병들게 했다.

“태주 씨.”

“응?”

“……태주 씨.”

“응.”

나정이 이마 위로 떨어지는 중저음에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예전처럼 불러보고 싶었어요…… 신기하다, 꼬박꼬박 대답이 돌아오니까…….”

자그만 머리통이 좀 더 태주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태주는 이 상황이 점점 더 괴로웠다.

나정의 풀어진 눈빛, 졸음에 잠긴 목소리가 귀를 스칠 때마다, 자신의 가운데에 힘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어쩐지 손이 저릿저릿했다.

“…….”

곧 그의 귀에 규칙적으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태주는 열 오른 숨을 내뱉는 대신 속으로 삼켰다. 그러곤 잠이 든 나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강나정.”

나도 불러보고 싶었어.

그가 나정의 잔머리를 쓸어주며 귓불에 살짝 입을 맞췄다.

***

누가 그러던데. 일어났을 때 몸이 너무 개운하면 그건 완전히, 틀림없이 망한 거라고.

“지각……?”

태주의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동으로 나지막한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이내 오늘이 목요일이고, 목요일은 자신의 휴무 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정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왔다. 태주는 출근을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샌드위치다…….”

식탁 위에 랩으로 싸둔 크랩 샌드위치와, 바나나 우유가 보였다.

[더 푹 자. 일어나지 말고.]

벌써 일어났는데…….

나정이 샌드위치에 달라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반듯하게 딱 떨어지는 필체가 왠지 반가웠다. 이윽고 나정이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탁! 꽂아 돌아섰다.

“어……?”

우유를 마시며 화장실로 들어서려는데 문에 달라붙은 포스트잇이 보였다.

[더 자.]

왜 이렇게 못 재워서 안달이지. 내가 그렇게 많이 피곤해 보였나……?

나정은 어딘가에 더 있을 포스트잇을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잠시 후 현관문에 붙어있는 또 다른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퇴근하고 데이트하자.]

왠지 피싯 웃음이 솟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느긋한 아침이었다. 촤락! 거실 커튼을 젖히며 나정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