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40화.
“이제 와? 계속 기다렸는데.”
재무팀과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태주는 소파에 앉은 여진을 보고 우뚝 걸음을 세웠다.
“그렇게 질린다는 듯이 보지 마. 할 얘기 있어서 온 거니까.”
여진이 곁에 서 있던 플래너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플래너는 재빨리 협탁 위에 웨딩 책자와 팸플릿을 펼쳐놓았다.
“웨딩홀은 내가 골랐어. 드레스도 알아서 셀렉할게. 우리 쪽 답례품은 프랑스산 와인이랑 초콜릿 생각 중이야. 태주 씨도 정해지면 알려줘.”
“이런 얘긴 내 어머니랑 해. 어차피 실현 가능성은 없겠지만.”
태주의 입에서 예상했던 말이 떨어졌다. 여진은 가볍게 실소했다.
“나 드레스 보러 가야 해. 잠깐 얼굴이나 보자고 온 거니까 기분 망치지 말아줘.”
“그럼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태주의 눈빛은 건조했다. 어떤 생명체도 저 눈빛에 닿으면 금세 말라 죽어 버릴걸. 여진은 냉소적인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그만 갈게. 아…… 근데 이 말은 해야겠다.”
여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돌았다.
“만약 고재영이 깨어나면 말이야. 그때도 나정이가 태주 씨 옆에 있을까?”
“…….”
“걔가 진심으로 태주 씰 사랑했다면, 왜 삼 년 전에 이혼을 택했겠어?”
여진은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곧 남편이 될 사람에게 이 정도 어드바이스는 당연한 거였다.
“정신 차려. 태주 씬 고재영의 대타일 뿐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즐기다 알아서 빠져나와.”
여진이 그대로 몸을 돌려세웠다.
“너도 그만해.”
“뭐?”
“나랑 결혼해서 강나정의 대타로 인생을 낭비하고 싶은 게 아니면.”
여진의 눈동자가 조여들었다. 그녀가 태주를 노려보다 휙, 집무실을 벗어났다. 곁에서 안절부절 눈치를 보던 플래너도 꾸벅 인사를 해보이곤 사라졌다.
“…….”
텅 빈 집무실에 아슬한 정적이 깃들었다. 태주가 주먹을 꽉 쥐었다가 폈다.
“김 비서님. 저예요. 생각이 바뀌었어요. 지난번에 말씀하신 자선 파티. 네. 참석해야겠네요. 재경 그룹 비자금 관련 의혹, 로비 내역, 샅샅이 조사해서 나한테 보고해요.”
또각또각 호텔 로비를 벗어나던 여진이 잠시 걸음을 세웠다.
우태주. 걜 선택한 걸 후회하게 해줄게.
넌 결국 네 입으로 내게 결혼하자는 말을 하게 될 거야.
***
“그래서 저녁에 우리 둘이 뭘 할지 생각해봤는데요…… 막막하더라고요. 데이트를 너무 오랜만에 해봐서 그런가.”
미리 틀어둔 히터 덕분에 차 시트가 따뜻했다. 보조석에 앉은 나정은 아까부터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저녁은 벌써 먹었고, 영화를 보러 가자니 딱히 끌리는 영화가 없기도 하고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정은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태주가 한 손으로 핸들을 쥐며 물었다. 나정은 속내를 들킨 듯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태주 씨랑 꼭 가보고 싶은 데가 있긴 한데. 혹시라도 불편해하진 않을까 걱정돼요.”
“쓸데없는 걱정이야.”
짧은 한마디로 나정을 안심시키고는 태주가 액셀을 밟았다.
“아니…… 나정이 너…….”
농장에서 딴 노지 귤을 트럭에 옮겨 싣던 대석이 나정과 ‘전 사위’를 보고 눈을 키웠다.
너무 놀라서 쓰고 있던 밀짚모자가 바람에 휭 날아가는데 잡을 생각도 못 했다.
“아니…….”
대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만남이었다. 태주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흠잡을 데라곤 없는 깍듯한 인사였다.
“…….”
대석이 뭔가를 말하려다 다시 입을 다물었다. 묻지 않아도 이미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함께 서있는 나정과 태주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었다.
그때, 곁으로 다가온 태주가 귤 박스를 들어 트럭에 싣기 시작했다.
대석은 연신 허리를 굽혔다 펴는 태주를 예의주시했다.
“힘들 텐데.”
“아닙니다. 아버님.”
자연스럽게 옛 호칭이 나왔다. 대석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이내 태주와 함께 박스를 나르기 시작했다.
나정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오래도록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
“자, 들게.”
대석은 기분이 썩 좋았다. 술상 맞은편에 앉은 태주에게 연신 잔을 권했다.
“네.”
태주는 빼는 법 없이 두 손으로 술을 받고, 고개를 뒤로 돌려 잔을 비웠다. 그렇게 둘 사이에 몇 번이나 술병이 오갔다.
나정은 슬슬 태주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괜히 무리하지 마요. 담금주라 독해요.”
“괜찮아.”
“괜찮긴. 조금만 마셔도 훅 간단 말이에요.”
“안 그래.”
무표정하던 태주가 설핏 웃었다.
저들끼리 작게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대석의 눈에는 왜 그리 애틋해 보였는지 모르겠다.
“고맙다. 태주야. 아니…… 미안하다.”
쓴 술을 들이켠 대석의 입에서 난데없는 말이 떨어졌다. 태주는 그 사과의 의미를 잘 알았다.
“한 잔 받으시죠.”
다시 대석의 잔이 채워졌다. 그렇게 두 남자는 한동안 또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더 이상 많은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우 서방!”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얼큰하게 취한 대석이 창고에서 꺼내온 앨범을 펼쳐 보였다.
“봐라, 너희 같이 찍은 사진. 나정이 네가 버린 걸 내가 다시 주워다 앨범에 보관하고 있었지.”
“세상에, 이걸 다 가지고 있었어?”
“그럼. 이건 너희 결혼식 때 찍은 사진. 그리고 이건 우 서방이 처음 결혼 허락받으러 왔을때…….”
대석이 말을 잇는 사이, 나정은 앨범 속 사진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렇구나. 태주 씨랑 함께한 기억이 이렇게나 많구나. 왠지 마음이 찡해졌다.
그러다 문득, 한 곳에 시선이 멈췄다.
거기엔 태주와 자신, 그리고 재영이 나란히 찍은 사진이 꽂혀 있었다.
나정은 그 사진의 배경이 어딘지 확실히 기억했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재영이 자신과 태주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네며 먼저 사진기를 들이댔었다.
탁. 나정은 자신도 모르게 앨범을 덮었다.
“왜, 더 안 봐?”
“다음에.”
나정은 말끝을 흐렸다. 태주 씨가 봤을까. 왠지 그의 표정을 확인하는 게 겁났다.
늦은 밤, 술에 취한 대석이 태주의 등에 업혀 방으로 옮겨졌다.
완전히 정신 줄을 놓은 대석은 요란하게도 코를 골았다. 저번에 이어 또다시 태주와의 대작에서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태주는 대석과 달리 얼굴색도, 정신도 멀쩡했다.
“당분간 술 먹자는 얘긴 안 하시겠어요.”
나정이 잠든 대석을 바라보다, 곧 태주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술상을 치우고 손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그 사이 시간은 자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번 주무시면. 절대 안 일어나시잖아.”
그때였다. 태주의 입술 새로 뜻 모를 한마디가 불거졌다.
“네?”
왜 그렇게 눈빛이 뜨거워요……? 하마터면 나정은 그렇게 물을 뻔했다.
“강나정.”
일순 제게 다가선 태주가 놀랄 새도 없이 깊이 입을 맞춰왔다.
갑자기 왜 이러지?
나정은 커다란 눈을 깜박이다 이내 천천히 입술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다. 적나라한 숨결이 오가며 서로의 타액이 하나로 엉겼다.
“방으로 가자.”
태주가 강한 힘으로 나정을 안아 들었다.
풀썩. 이윽고 두 사람의 몸이 싱글 침대 위로 떨어졌다. 핑크색 벽지가 발린 나정의 방은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이미지였다.
이 비좁은 공간에서 위험한 페로몬을 내뿜고 있는 건 오직 태주뿐이었다.
“허락해줘.”
태주가 제 두 팔 아래 누운 나정에게 입을 맞추며 읊조렸다.
“하게 해줘.”
좀 더 직접적인 말로 다시 허락을 구했다,
나정은 순간 몸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훅 치솟는 것을 느꼈다. 태주와 이혼 후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왠지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대답해. 널 가져도 된다고 말해.
태주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나정의 귓불을 베어 물었다.
난데없는 쾌감에 나정은 어깨를 크게 떨었다. 동시에 태주의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등속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툭, 후크가 풀어졌다.
“내가. 내가 벗을게요.”
나정은 제 몸이 얼마나 뜨거워졌는지 태주가 눈치채는 게 싫었다. 그래서 스스로 천천히 윗옷을 탈의했다.
태주의 시선이 그런 제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왜일까. 처음이 아닌데 꼭 처음처럼 떨렸다.
이윽고 태주도 상의를 탈의했다. 군살 없이 탄탄한 흉곽이 달빛을 받고 빛났다.
“읍,”
그가 깊숙이 입술을 포개왔다. 두 사람의 입에서 뜨거운 날숨이 터질 때마다 방 안이 열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태주는 나정의 몸 구석구석을 탐미했다. 본능에 충실한 그를 나정은 더는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얼마 후 강렬한 기운이 그녀에게 불어 넣어졌다. 욱신한 아픔과, 홧홧한 열감이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전신이 긴장될 정도의 쾌감이었다. 하마터면 그만하라고 외칠 뻔했다.
하지만 그 섬광 같은 순간이 지나가자 전기처럼 짜릿짜릿한 기분이 온몸을 휘감았다. 빠른 속도로 나정의 전신이 달아올랐고 무자비할 정도로 아찔한 감각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종아리로 허벅지로 배꼽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 감각이 머리끝까지 도달했을 때, 나정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왔다.
“사랑해요, 태주 씨.”
사랑해요.
그 순간 태주는 아까 앨범에서 봤던 재영의 사진을 떠올렸다.
‘만약 고재영이 깨어나면 말이야. 그때도 나정이가 태주 씨 옆에 있을까?’
‘걔가 진심으로 태주 씰 사랑했다면, 왜 삼 년 전에 이혼을 택했겠어?’
잠시 멈췄던 태주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주 씨…… 태주 씨 잠깐, 웃,”
“다시 말해봐.”
“응……?”
“사랑한다고. 다시.”
나정은 금방이라도 정신을 놓을 것 같았다.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