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41화.
“다시.”
“사랑해요…….”
다시.
다시 해줘.
태주의 눈빛과 몸 사위가 조급해졌다.
부끄러워진 나정은 한 팔로 눈가를 가렸다. 그러나 태주는 그 팔을 붙잡아 위로 올렸다.
나정은 고스란히 그에게 표정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붙잡힌 손목을 뺄 엄두가 안 났다. 전신에 힘이 풀려 결국은 태주가 이끄는 대로 몸을 내맡겼다.
어느덧 새벽이 되자 방 안의 뜨거웠던 열기도 한 발 물러갔다.
나정은 잠든 태주를 침대 맡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태주 씨.”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나정은 그의 날카로운 콧대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태주 씨……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사랑을 나누는 내내 태주에게서 조바심과 초조함을 느꼈다. 그 감정들은 고스란히 나정에게 전해져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걱정 마요. 나 이제 안 떠나요.”
나정이 조심스레 태주의 얼굴을 쓸었다.
***
엘러퀀스 호텔에서는 매년 자체적으로 사회 빈곤층을 돕기 위한 자선경매 행사를 열었다. 물론 좋은 취지에서 기획한 일이었지만 그 뒤에는 호텔의 대외적 이미지를 환기하기 위한 목적도 분명히 존재했다.
많은 인사들과 스타들, 셀럽들이 매해 이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제주를 찾았다. 물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현오다.”
“차현오 씨 안녕하세요, TV 연예 통신에서 나왔습니다.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야외 연회장은 이미 수많은 기자와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현오는 평소에 보지 못한 말쑥한 슈트 차림으로 기자들을 맞았다. 왁스로 깔끔하게 올린 머리와 슬렌더한 기럭지가 뭇 여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현오 씨, 작품 복귀는 언제쯤 예상하세요?”
“복귀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쏟아지는 민감하고 원초적인 질문에도 현오는 시종일관 형식적인 대답과 웃음을 잃지 않았다.
“최근 증권가에 떠도는 X문서에 대해서 하실 말씀 없으세요? 정말 전 연인이던 톱스타 신지혜씨의 마약 복용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대신 거짓 자백을 했습니까?”
얼핏 현오의 입가가 굳어졌다. 그러나 그는 다시 유려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루머는 루머일 뿐이죠. 애초에 신지혜 그분과 아무 사이 아닙니다. 오죽하면 그분이 광고하시는 커피도 찔려서 못 마시겠어요. 좋아했는데.”
현오가 농담처럼 상황을 넘겼다. 잠시 후 기자들이 다른 먹잇감을 발견하고 물러갔다. 그제야 억지로 끌어올린 현오의 입가도 제자리를 찾았다.
“얼굴 펴, 임마.”
곁으로 다가온 건, 최근 그에게 시나리오를 준 영화감독 오성우였다. 전작이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제2의 봉준호라고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별 볼 일 없던 시절 자신의 입봉작에 무개런티로 출연해준 차현오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차현오는 광고 수입만 300억을 호가하는 스타였고, 오 감독은 그런 현오의 이름을 팔아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너도 복귀 전에 이미지 좀 챙기고 해야지. 안 그래?”
아마 오 감독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선 행사에 얼굴을 비출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현오는 오랜만에 착용한 보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숨이 막혔다.
“영화 크랭크인 전까지, 하여간 사고만 치지 마. 최대한 몸 사리고. 어? 여자 문젠 절대 안 돼.”
“형. 귀에서 피난다.”
“네가 한두 번 말해서 들을 놈이야? 여자 때문에 인생 곤두박질친 놈이, 또 누구한테 쉽게 마음 주고 그러면,”
“주임님?”
그때였다. 저 멀리 나정을 발견한 현오가 그대로 상체를 비틀었다.
하여간 남의 말은 죽어도 안 들어. 뒤에서 오 감독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현오는 가뿐히 무시한 채 나정에게 다가갔다.
“고객님. 오늘 근사하십니다.”
나정이 눈앞의 현오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었다. 현오가 나타나자 주변이 다 환해졌다.
현오는 나정을 내려다보며 가벼이 안도했다. 왠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근사하다는 말 때문인가. 목을 죄는 보타이도 왠지 참을 만한 것 같기도 하고.
“너 보니까 좀 살 것 같아.”
“네?”
“잘 봐. 너 빼고 하나같이 날 이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현오가 두 손가락으로 미간을 사납게 잡아당겼다. 나정은 알 만하다는 듯 그를 격려했다.
“고객님. 긴장하지 마시고 어깨를 좀 더 펴세요. 살짝 웃으시고요.”
나정이 현오의 말려 올라간 소매 깃을 살뜰히 정리해주며 말했다.
“그래도 떨리는데. 네가 옆에 있어주면 안돼?”
현오의 눈동자가 애잔하게 일렁였다. 아마 다른 여자라면 그럼요, 평생 함께 있어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정에겐 아련한 눈빛 따위 통하지 않았다. 몇 개월 동안 하도 써먹었더니 이젠 씨알도 안 먹혔다.
“고객님. 필요하면 언제든 호출해주십시오. 전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그럼 이만.”
“잠깐만.”
현오가 칼같이 돌아서는 나정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강 주임.”
굵직한 중저음이 둘 사이를 갈랐다.
다가온 태주가 곧 나정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자연히 갈 곳을 잃은 현오의 손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홀 테이블 세팅 누가 했습니까?”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테이블 개수가 모자랍니다.”
아. 홀에 배치된 테이블을 빠르게 눈으로 훑은 나정은 재빨리 무전기를 들었다.
“지금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그럼.”
나정은 짧게 고개를 숙인 후 곧장 자리를 벗어났다.
“같이 갑시다.”
흘깃, 현오를 바라보던 태주가 곧 나정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
졸지에 홀로 남겨진 현오는 살짝 이맛살을 좁혔다.
‘이 여자 때문에 어제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내 손으로 파투 냈습니다. 이 정도면 대답이 됐습니까?
’
강나정이 있는 곳마다 언제나 높은 확률도 나타나는 남자. 현오가 멀어지는 태주를 주시하다 곧 시선을 거두었다.
***
자선 행사에 쓸 테이블과 의자를 임시로 빼놓은 물품 창고. 행사 담당자가 아니면, 굳이 이곳에 누군가 들어올 일은 없었다.
“총지배인님. 잠깐만요.”
그래도 이건 아니지. 벽으로 밀려난 나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둘이 있을 땐 이름으로 불러. 그러라고 했잖아.”
태주가 나정의 얼굴을 감싸며 입을 맞췄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그게 네 일일지라도.
잠깐 입술이 떨어졌을 때, 태주는 분명 그렇게 읊조렸다.
혹시 차현오 고객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나정은 눈앞의 태주를 가만히 응시했다.
본가에서 뜨거운 밤을 보낸 이후, 태주와 다른 장소에서도 매일같이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데도 태주는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삼 년 동안 제 옆에 부재했던 나정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묶어두고 싶어했다.
나정은 그런 태주가 때때로 안쓰러웠다. 뭐가 이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걸까. 역시 고재영 때문인가.
“태주 씨. 우리 집에 가서 해요.”
나정이 다시 입을 맞추려는 태주를 제지하며, 가벼운 농담처럼 말했다.
그의 가슴을 다독이는 나정의 손길이 따뜻했다.
불온한 감정에 요동치던 태주의 눈빛도 이내 차차 잦아들었다.
***
“내가 말한 자료는?”
“모두 준비해놨습니다.”
컨벤션 홀로 들어선 여진이 김 비서에게 서류 봉투를 건네받았다.
“기자들은.”
“미리 배치시켰습니다.”
“됐어요. 그만 가봐요.”
준비는 끝났다. 여진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걸음을 내디뎠다.
***
“언제나 고객의 편에서, 고객의 편의를 위해 일하는 엘러퀀스 호텔 강나정 GRO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십시오.”
자선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류층 VIP 고객이었다. 때때로 리핏 게스트(*단골손님)들이 나정을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죽겠다…… 이러다 허리가 남아나질 않겠어.”
허리를 펼새 조차 없이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던 보나가 옆에서 앓는 소리를 했다.
“행사장 붐비는 거 봐. 세상에 이렇게 부자들이 많았어? 또 나만 가난해?”
보나의 한탄에 나정은 슬쩍 웃고 말았다. 확실히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특유의 광채가 났다. 무슨 비밀 얘기라도 나누듯 저들끼리 작게 대화하며 와인잔을 부딪히는 모습은, 나정이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또 다른 세계의 단면 같았다.
“연회팀은 거의 뭐 날아다닌다, 날아다녀. 울 똥준 씨 얼굴 수척해진 거 봐.”
사실이었다. 연회부 직원들은 테이블을 돌며 물을 채우고 음식을 세팅하느라 한시도 쉴 틈이 없었다.
뽀나 씨! 그 와중에 보나를 발견한 송준은 은밀한 손 하트를 발사했다.
“내가 이 맛에 연애한다니까. 너무 귀여워.”
좋아 죽는 보나를 보며 나정은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웃었다.
그때, 컨벤션 홀 입구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하문옥 회장과 여진의 부모님이었다.
놀란 나정은 반사적으로 허리룰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들이 자신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행사장 안으로 멀어졌다.
“네 전 시어머니 정말 차갑다…….”
보나가 옆에서 혀를 내둘렀다. 만약 내가 태주 씨와 다시 만난다는 걸 알면 뭐라고 하실까. 탁, 형광등을 끈 듯 나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텔의 자선 파티는 별다른 문제 없이 식순대로 진행되었다.
사회자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교향악단이 차이코프스키 사이클을 연주했고, 뒤를 이어 요즘 한창 인기를 끄는 발라드 가수도 무대에 섰다.
자선경매가 시작되자, 각계 인사들이 자신의 애장품을 기부했다. 그중에는 최근 해외에서 상을 휩쓴 현대 미술가 주애란의 작품도 끼어있어 잠깐 장내가 술렁거리기도 했다.
“어, 우 총 저기 있다. 되게 바빴나 봐, 한참 안 보이더니.”
나정이 컨벤션 홀 끝에 서 있는 태주를 바라봤다. 그는 홀 전체를 기민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간간이 연회부 직원들을 불러 직접 오더를 내리기도 했다. 나정은 그 모습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시선을 느낀 태주가 고개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