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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42화 (42/60)

전남편이 부임했다 42화.

화, 화이팅. 눈이 마주친 순간 나정은 입을 작게 달싹였다. 저곳까지 들릴 리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태주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가 얕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섰다. 나정도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

“…….”

한편 하 회장은 멀리서 두 사람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내보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곁에 앉아있던 노성훈 대표가 나정을 흘긋 보며 말했다.

“애들 결혼 문제도 있고…… 아무래도 전 강나정 저 친구가 맘에 걸립니다. 회장님도 아시겠지만, 언론에서 한번 물어뜯기 시작하면ㅇ…….”

“태주가 어디 내 말을 잘 듣는 아들이어야 말이지.”

하 회장이 완곡하게 말을 잘랐다.

“일단은 두고 볼까 합니다. 애들 문제는 애들이 알아서 하겠지요.”

“아…… 예. 회장님.”

노성훈 대표가 속으로 마른 침을 삼켰다. 여진이 그새 무슨 사고를 친 건 아닐까, 벌써부터 간담이 서늘했다.

노 대표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여진은 어느새 태주의 곁에 서있었다.

“잠깐 나 좀 봐.”

“할 얘기 없어.”

“내가 있어서 그래.”

“여기서 해.”

태주가 여진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정말 여기서 해? 후회할 텐데?”

여진이 손에 쥔 서류 봉투를 까닥, 까닥, 흔들었다. 그제야 태주의 고개가 자신을 향해 움직였다.

“그렇구나. 뭐든 태주 씨 약점이 될 만한 걸 내가 손에 쥐고 있어야만 관심을 주는구나?”

여진의 의미심장한 한마디가 태주를 찔렀다.

***

“내일 아침, 재경그룹 비자금 관련 폭로가 터질 거야.”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현재 공실로 비워둔 부서 회의실이었다.

창가 앞의 여진이 버튼을 눌러 블라인드를 내렸다. 서서히 회의실의 명도가 낮아졌다.

“무슨 소리야.”

한참 만에 태주의 입이 열렸다. 여진은 그의 앞에 서류를 내밀었다.

“받아. 그동안 회장님이 조직적인 분식회계를 통해 비자금을 조성해왔다는 증거야. 차명계좌에서 수십억에 달하는 돈이 발견됐어. 문제는 그런 차명계좌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거지.”

여진이 서류 하나를 더 내보였다.

“이건 비자금 거래 내역이야. 손에 넣느라 힘들었어.”

“노여진.”

“정계인사들, 언론, 심지어 검찰까지. 회장님의 돈이 닿지 않은 곳이 없던데? 이거 터지면 굴비 엮듯 줄줄이 잡혀들어가는 꼴이 볼만하겠어.”

여진이 까르르 웃었다. 태주의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이걸 나한테 들고 온 이유가 뭐야.”

“몰라서 물어? 나 지금 협박하는 거잖아.”

쌍꺼풀 없이 가로로 긴 여진의 눈이 아래로 휘어졌다.

“선택해. 낳아주고 길러주신 어머니의 등에 칼이 꽂히도록 내버려 둘지. 아니면, 이번 일 태주 씨 선에서 덮을지.”

“…….”

“밖에 와 있는 기자들 앞에서 나랑 결혼하겠다고 얘기해. 그럼 이 서류, 태주 씨 보는 앞에서 전부 불태워줄게.”

***

시간이 지날수록 행사의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잠깐 짬이 난 보나는 그새 동료들의 눈을 피해 송준과 꽁냥대고 있었다. 문제는 테이블 밑으로 그들이 마주 잡은 손이 너무 잘 보인다는 거였다.

나정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으려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종일 서있었던 다리가 콕콕 쑤셔왔다.

“주임님.”

그때 슈트 차림의 차현오가 다가섰다. 그에게서 시원한 스킨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안 힘들어? 종일 뛰어다니던데.”

“괜찮아요.”

나정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저보다는 고객님이 바쁘신 것 같던데요.”

사실이었다. 자신을 알아보고 밀려드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어주느라 종일 나정에게 말을 붙일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기자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어 일부러 좀 거리를 두기고 했고.

“여기 뭐 묻었어.”

“네?”

“아니. 이쪽.”

“여기요?”

“아니. 여기.”

현오가 검지로 나정의 볼을 푹 찔렀다. 그의 눈빛에 장난끼가 가득했다.

“뭐 하시는 거죠.”

“볼 찌르기? 귀여운 게 보고 싶어서 그래. 난 귀여운 걸 보면 스트레스가 풀리거든.”

나정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을 쳐냈다. 현오가 피식 웃었다.

오늘 종일 모르는 사람들과 친한 척 안부를 주고받았더니 속이 거북했는데, 이상하게도 나정을 보니 경직됐던 마음이 풀어졌다.

“주임님.”

다시 나정을 향해 웃으며 말을 잇는데, 등 뒤에서 돌연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잘 어울리네. 두 사람.”

고개를 돌린 나정이 곧 비아냥거리는 여진과, 그 옆의 태주를 발견하고 살짝 눈을 키웠다.

왜 태주 씨가 노여진이랑 같이……?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여진이 제게 다가왔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니까. 아직도 한 남자로는 만족이 안 되니?”

“…….”

나정은 동요하지 않고 태주를 바라봤다. 그러나 태주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손에 못 보던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이제 공연의 마지막 식순을 남겨두고 있는데요. 그전에 엘러퀀스 호텔의 우태주 총지배인님을 자리에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시선이 태주에게 와 멎었다. 그러나 태주는 미동하지 않았다.

뭐지. 나정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사회자가 다시 한번 태주에게 나와달라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

하 회장과, 노성훈 대표 내외, 그 밖의 시선들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태주에게 고정됐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다녀와.”

여진이 해사하게 웃으며 태주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채갔다. 태주를 압박하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우태주 총지배인님? 앞으로 모시겠습니다.”

사회자가 재차 태주를 채근했다. 웅성웅성.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높아졌다.

일순간 태주가 고개를 세웠다.

“끝까지 가볼래. 나랑?”

입술 새로 낮고 굵직한 말이 떨어졌다.

태주의 짙은 시선은 여진이 아닌, 나정을 향해있었다.

그는 나정에게 시선을 붙박은 채 대답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끝까지 가겠냐니……

나정은 무슨 말이든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침대에서 자신을 안을 때, 뜨겁게 입을 맞출 때, 태주는 뭔가에 쫓기듯 조바심을 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태주의 눈동자는 묘한 초조함에 휩싸여있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불안해하지 않을까.

다음 순간, 나정은 말없이 태주의 손을 붙잡았다.

끝까지 가요. 그리고는 말 대신 맞잡은 손으로 마음을 전했다.

여진과, 현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고정됐다. 멀찍이 서있던 보나와 송준까지 경악하듯 동시에 입을 벌렸다. 나정은 도리어 맞잡은 손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이윽고 태주가 먼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곤 클로징 멘트를 하기 위해 단상으로 나갔다.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었다. 오늘 중대한 발표가 있을 거라고 여진 쪽에서 미리 말을 흘렸기 때문이었다.

“재경 그룹 계열사가 아닌 엘러퀀스 국제 호텔에 부임한 이유가 뭡니까?”

“얼마 전 J그룹과 상견례를 진행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J그룹 노여진 씨와 결혼을 앞두고 계십니까!?”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질문에 태주는 짧게 입을 열었다.

“이 자리는 사담을 나누기 위해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간단하게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한마디만 해주세요!”

기자들은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았다. 더 이상의 소란을 방지하기 위해 태주가 입을 여는 쪽이 더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나정은 곤란한 상황에 휩싸인 태주를 멀찍이서 바라봤다.

그때, 태주의 고개가 자신을 향했다.

몇 초간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섞었다. 대화가 오가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들렸다.

나정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곧 태주의 입이 열렸다.

“결혼합니다. 상대는 우리 호텔 GRO팀에 근무하는 강나정 사원입니다.”

그가 짧고 굵게 팩트를 전달했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 상대는 더더욱 갑작스러웠다.

***

“미안해.”

혹시 모를 기자들의 출입에 대비해 총지배인실 앞엔 보안요원이 서있었다.

“뭐가 미안해요?”

나정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태주가 제게 미안할 일은 없었다.

“그런 자리에서 결혼 얘기 꺼낸 거.”

태주의 목소리가 아뜩하게 가라앉았다.

나정은 그의 손위에 제 손을 포갰다. 마디가 길고 곧은 태주의 손가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몸의 열기가 전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정은 태주의 손에 제 온기를 더했다.

“끝까지 가자면서요. 난 처음부터 그럴 각오로 태주 씨랑 다시 시작한 건데.”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는 평온했다.

태주는 나정의 얼굴을 예민하게 훑었다. 자신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치는 표정이 있을까 봐서. 하지만 나정은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생각해보면 태주 씨가 나보다 가진 게 많으니까, 잃을 것도 훨씬 더 많아요. 다시 결혼하면 손해 보는 건 태주 씬데?”

나정은 농담처럼 웃으며 상황을 넘겼다. 그게 더 태주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오래전 나정과 결혼할 당시, 태주는 모든 과정을 철저히 비공개로 진행했다. 나정의 이름, 학벌, 출생 배경. 어떤 것도 언론에서 함부로 물어뜯지 못하게 미리 손을 썼다.

재벌가에 입성한 신데렐라. 흔한 헤드라인 한 줄조차 태주는 용납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정은 세간의 시선과 편견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기자들은 곧 알아낼 것이다. 나정과 태주가 과거에 어떤 사이였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곧 나정을 흠집 내기 위한 기사가 쏟아질 테고, 태주는 상상만으로 신경이 곤두섰다. 한 손으로 지탱한 이마에 푸른 핏줄이 섰다,

“나 정말 괜찮아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카메라 세례도 받아보고, 꼭 드라마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어요.”

말은 농담처럼 했지만 나정도 앞으로의 길이 순탄치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가 태주와 시선을 맞추며 담대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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