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43화.
“쇼킹하네. 여기 호텔 총지배인이 재경 그룹 외아들이었어? 어쩐지 오늘 기레기들이 많이도 왔더라. 다 이유가 있었구만.”
오 감독이 현오의 옆에서 연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재경 그룹 3세가 같은 호텔 부하직원과 깜짝 결혼 발표를 했다. 이보다 더한 이슈가 어딨겠나 싶었다.
“어쨌든. 현오 넌 당분간 몸 잘 사리고. 괜히 호텔 밖으로 나다니지 말고, 알겠지? 얌마…… 내 말 듣고 있냐? 야, 차현오.”
“어. 듣고 있어.”
현오가 멀거니 선 채 대꾸했다.
“넌 또 뭐가 그렇게 심각하냐. 하여튼 나 간다. 연락할게.”
오 감독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몸을 돌려세웠다.
“…….”
현오는 멀어지는 오 감독을 배웅할 생각조차 않고 그저 서있었다.
자꾸만 같은 장면이 눈앞을 어른댔다.
‘결혼합니다. 상대는 우리 호텔 GRO팀에 근무하는 강나정 사원입니다.’
현오는 짧은 숨을 들이켰다. 왠지 기분이 묘했다.
친구처럼 생각했던 강나정 주임에겐 따로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근데 왜 내 마음이 이렇지. 현오가 한 손으로 욱신한 가슴을 눌렀다. 꼭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승부가 갈린 기분이었다.
같은 시각 여진은 엘러퀀스 호텔을 나서는 하 회장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버지 노성훈 대표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치욕적인 상황에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이제 믿을 건 하문옥 회장뿐이었다.
“잠깐만요. 회장님!”
차에 오르려는 하 회장을 막아선 채 여진은 숨을 골랐다.
“이렇게 가시면 안 돼요. 다시 들어가세요. 가서 태주 씨 막아주세요. 지금도 강나정이랑 같이 있을 겁니다. 회장님이 직접 나서주시지 않으면,”
“네가 그랬니.”
귀에 와 박히는 하 회장의 음성이 서늘했다.
“재경 그룹 전직 법무팀장과 접촉해서 내 뒤를 캔 게 사실이야?”
여진의 눈동자가 출렁 내려앉았다. 알만하다는 듯 하 회장의 낯빛도 굳어졌다. 비서가 전달한 내용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여진이 재경 그룹의 비리를 캐 태주를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려 한다고.
“나를 빌미로 내 아들을 협박해?”
“회장님! 아닙니다. 전 절대……!”
조급해진 여진은 맨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하 회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적어도 네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난 내 회사를 키우진 않았다. 못 믿겠으면 갖고 있는 그 증거들 들고 곧장 검찰로 가렴. 명명백백히 한번 따져보자. 여진아.”
“회, 회장님.”
“그런데 그 증거란 게 워낙 허접해서 재판까지 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잘못했습니다, 회장님! 제가 태주 씨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바닥에 닿은 무릎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여진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여진아.”
곧 정수리 위로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태주와 네 결혼.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어. 시간을 두고 다시 천천히 생각해보자.”
몸을 돌린 하 회장이 비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다시 생각하자는 말은 없던 일로 하겠다는 뜻이다. 그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하 회장은 절대로 두 번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회장님!”
여진이 멀어지는 세단을 향해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
“GRO팀 강나정 말이야. 이제 호텔은 그만두는 건가?”
“하여튼 차현오랑 그런 스캔들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우태주 총지배인이야?”
“어떻게 재경 그룹 외아들을 꼬셨지?”
“얼굴은 예쁘장하잖아.”
깜짝 결혼 발표가 있은 후, 나정은 어딜 가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강 주임님. 아까 2101호 고객님이 자쿠지 서비스 예약하신 거요, 시간 변경하신다고.”
“아. 응.”
물론 대다수의 직원들은 나정과 태주의 관계에 대해 말을 아꼈다. 엄밀히 말해서 결혼은 총지배인의 개인사인데, 함부로 입을 놀려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인간들이나 가십에 열 올리는 거지. 애초에 호텔 규정엔 사내 연애 금지조항은 없거든? 누구 말마따나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보나가 쿨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웬일로 기자들이 코빼기도 안 보이니? 지금쯤 호텔에 진을 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냐?”
하긴, 좀 이상하긴 했다.
태주와 자신의 기사가 인터넷 포털 1면을 장식하긴 했지만, 기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후속 보도는 내보내지 않았다. 나정의 뒤를 쫓아다니며 질문 세례를 퍼붓지도 않았다. 직원들의 수군거림만 없다면, 호텔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태주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고, 나정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이었다.
“나 호출. 다녀올게.”
이윽고 나정이 씩씩하게 프런트를 벗어났다. 일과 사생활은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업무에 충실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이를 봐달라는 말씀이십니까?”
임무에 매진하고자 했던 결심은, 생각지도 못한 고객의 요청 앞에서 보기 좋게 무너졌다.
“내가 강주임이니까 믿고 부탁하는 거예요. 우리 애가 워낙에 까탈스러워야지. 고용하는 시터마다 하루를 못 견디고 내뺀다니까? 딱 한 시간만. 응? 나 어깨가 뭉쳐서 그래. 마사지 받는 동안만 좀 맡아줘요.”
“고객님. 호텔에 육아 지원 서비스가 별도로 마련돼 있습니다. 원하시면 그쪽으로……,”
“모르는 사람한테 어떻게 애를 맡겨?”
여자의 언성이 높아졌다. 나정은 즉각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러시면……,”
“자, 부탁 좀 할게요!”
여자가 나정의 품에 세 살배기 사내아이를 덥석 떠안긴 후, 도망치듯 돌아섰다.
우와아앙! 그와 동시에 귀를 가르는 울음소리가 객실 안에 울려 퍼졌다.
“우, 울지 마. 착하지……?”
당황한 나정이 재빨리 품 안의 아이를 얼렀다.
“으아앙. 엄마. 엄마! 흐아아앙.”
“울지마, 아가야. 응? 어디 갈까? 저기 갈까?”
“우르르 까꿍? 울렐렐레!”
“이거 봐라. 아저씨 얼굴 웃기지?”
아이의 울음은 벌써 삼십 분째 끝없는 돌림노래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보나와 송준까지 합세해 달래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3층에 키즈 놀이방 있잖아. 거기 데려가는 건 어때?”
“그게, 자리를 옮기면 더 자지러지게 울더라고…….”
특이하게도 아이는 엘리베이터 앞을 떠나지 않으려 했다.
“엄마. 엄마.”
아이가 직원 엘리베이터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가리키며 흐느꼈다. 하도 울어 눈가가 짓물렀다. 나정은 그런 아이를 안고 어르느라 진이 다 빠졌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갈라지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초, 총지배인님!”
“……강주임?”
햇빛을 머금은 태주의 눈동자가 살짝 수축했다.
“여기서 뭐 ㅎ……,”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빠빠. 빠빠.”
아이가 갑자기 발버둥을 치는 바람에 나정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아찔한 순간, 다행히 태주가 한 손으로 나정의 허리를 받쳤다. 다른 손으로는 아이를 떠안았다.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빠빠. 빠빠.”
태주 품에 안긴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연신 옹알이를 했다.
“빠빠? 지금 아빠라고 하는 건가?”
“아빠면 어떻고 파파면 어때요, 똥준 씨. 애가 울음을 그쳤다는 게 중요한 거죠.”
송준과 보나가 음흉한 시선으로 태주를 바라봤다.
당신이 그 아이를 맡아줘야겠어. 두 사람의 눈빛, 아니 나정까지 세 사람의 눈빛이 촉촉하게 빛났다.
잠시 후, 태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한 팔로 아이를 떠안고 있었다.
띠계. 띠계! 아이가 관심을 보이는 바람에 차고 있던 메탈 시계까지 풀어 주었다.
보나와 송준은 멀찍이서 태주의 굴욕(?)적인 순간을 핸드폰에 담았다.
“강주임.”
“네!”
“……도와주죠. 나 좀.”
태주답지 않게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아이를 안은 자세가 어딘지 모르게 서툴고 엉성했다. 떨어뜨리지 않으려 자꾸 몸에 힘을 주니 더 그랬다.
나정은 그만 제풀에 웃고 말았다.
“아기가 총지배인님을 좋아하는데요?”
태주가 품 안의 아이를 힐긋 응시했다. 꼭 말아쥔 주먹이 인형 손 같았다.
“너무 작습니다.”
곧이곧대로 소감을 말하는 그를 보며 나정은 한 번 더 미소를 머금었다.
‘태주 씨. 우리도 아이 가질까?’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요즘은 결혼도 늦게, 아이도 늦게 갖는 게 추세라지만, 나정은 예전부터 아이사랑이 각별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에 자신의 어린 시절은 어딘가 늘 위축돼 있었다. 엄마 없이 자란 애들은 티가 나. 언젠가 여진이 농담처럼 던진 말은 그대로 가슴에 박혔고, 그때부터 나정은 엄마 의 부재를 티 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옷도 더 깨끗이 빨아 입고, 머리도 신경 써서 묶었다.
그래서일까. 나정은 제 아이에게 꼭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태주와 자신의 사이엔 오래도록 아이가 없었다.
그날 밤. 자려고만 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잡념에 나정은 연신 뒤척였다.
자꾸 아이를 안은 태주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로 다시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우리도 다른 부부처럼 아이를 낳고, 키우고, 서로 복닥이며 살아가게 될까.
나정이 벽을 보고 돌아누웠다. 왠지 마음이 심란했다.
지잉.
그때 침대맡에 놓아둔 핸드폰이 울렸다.
[잘 자]
태주에게서 짤막한 톡이 날아와 있었다. 그는 늦은 시간까지 호텔에 남아 있었다.
피식 웃은 나정이 답장을 전송했다.
[톡이 너무 딱딱해요. 태주 씨 목소리로 읽혀요.]
그 후 핸드폰은 한참이나 조용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다시 태주에게서 톡이 날아왔다,
라이언이 들고 있던 하트 바구니를 바닥에 와르르 쏟는 이모티콘이었다.
이걸 고르느라 오래 걸린 거야?
풋. 푸하하. 나정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