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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44화 (44/60)

전남편이 부임했다 44화.

그리고 행복감에 젖어 눈을 감았다. 태주 씨만 생각하자. 다른 건 신경 쓰지 말자. 또 한 번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날 밤, 나정은 아주 기묘한 꿈을 꾸었다.

‘나 임신이래. 8주.’

꿈속에서 나정은 어떤 남자와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나정이 남자에게 초음파 사진을 내밀었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는, 그 사진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그 순간. 나정은 눈을 떴다.

숨 막히는 적막 속에 어둠에 잠긴 방 안이 보였다.

뭐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다.

나정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

“왜 못 들어간다는 거야!?”

여느 때와 달리 데스크가 소란했다. 태주의 비서가 여진과 눈싸움을 하며 팽팽히 대립했다.

“총지배인님의 특별지시가 있었습니다. 당분간 외부인은 출입금집니다.”

“내가 그냥 외부인이니?”

조악한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비서들 사이에서 여진은 이제 유명했다. 올 때마다 갑질을 일삼고 입만 열었다 하면 직원들에게 막말을 쏟아내는 J그룹 안하무인 공주님.

“특히 노여진 씨의 경우 절대 들여보내지 말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비서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진은 초조한 듯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어떻게든 태주를 봐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하 회장은 자선 파티 이후 자신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비켜. 잠깐이면 되니까.”

“안 됩니다.”

보안요원들이 여진을 앞을 막아섰다. 코앞에 있는데 만날 수조차 없다니. 여진은 자존심이 상해 미칠 것 같았다.

“우태주. 지금 실수하는 거야…….”

당신과 강나정의 과거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바로 난데. 여진의 눈자위가 희번득하게 빛났다.

그 후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나날이 흘렀다.

태주는 나정의 앞에서 다시 결혼 얘기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건지, 진짜로 결혼할 생각은 없었던 건지. 나정은 조금 헷갈렸다. 하지만 굳이 태주 앞에서 어떤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를 믿기로 했다.

“나정아! 너, 너 이거 봤어……? 기사 났어! 너랑 우 총!”

위태위태하게 이어지던 평온함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달음에 프런트로 달려온 보나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곧 나정의 시야에 굵직한 헤드라인이 들어왔다.

[ 재경家 예비 신데렐라의 민낯 ]

기사엔 나정과 태주가 삼 년 전 어떤 관계였는지, 어떻게 파경을 맞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서술돼 있었다.

외도. 남편의 친구. 밀회. 그리고 고재영이라는 이름까지. 기사는 적나라했다. 펜촉으로 나정을 발가벗겨 매스컴에 먹잇감으로 내던진 수준이었다.

“댓글은 보지 마.”

보나가 다시 핸드폰을 빼앗았다.

“다른 기사엔 우 총이 너 때문에 기억을 지웠다고, 그런 디테일한 얘기까지 언급했더라고.”

나정은 잠자코 시선을 내렸다. 이런 식으로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고 기사를 내보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오랜 친구를 떠올렸다.

***

60평 남짓한 화실에 잔잔한 뉴에이지가 흘렀다. 캔버스 앞에 앉은 여진은 오랜만에 자유로운 기분으로 작업에 몰두했다.

“아가씨. 하 회장님 전화입니다.”

“줘봐.”

여진이 핸드폰을 귀에 댔다.

“네. 회장님.”

-너!

일순 불벼락이 떨어졌다.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인데. 여진은 슬쩍 웃었다.

-네가 기사 낸 거야? 감히 내 아들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앞에 안줏거리로 만들었어, 네가?

“회장님. 잘못 짚으셨습니다.”

여진이 태연하게 손톱을 매만졌다.

“저도 왜 그런 기사가 터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한 짓이 아닙니다, 회장님.”

-노여진!

“너무 심려치 마세요. 이번 일로 이미지의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건 강나정입니다. 태주 씬 제가 알아서 구제할 테니 안심하세요.”

여진이 핸드폰을 소파로 휙 내던졌다.

아. 살 것 같아. 내내 목에 걸려있던 가시가 툭 빠진 것 같았다.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기사가 난 지 고작 반나절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여론은 나정을 사정없이 물어뜯기 바빴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신데렐라에서, 한순간 더러운 불륜녀가 되어버렸다.

여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잠시 떨리는 눈을 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김 비서님.”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괴물 같아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김 비서는 짧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봐요. 김 비서님도 나정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아버지 말처럼, 내가 걔 인생을 망친 거라고?”

김 비서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게 강나정 씨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겠죠.”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여진은 깔깔대며 웃었다. 김 비서는 불편한 표정을 애써 감췄다.

“정말 기사에 나온 불륜녀가 강 주임이에요?”

프런트를 둘러싼 대여섯의 사모들이 취조하듯 나정에게 캐물었다.

그중에는 사교계의 큰손으로 불리는 우송건설의 안주인, 최영옥 여사도 끼어있었다.

“세상에.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정말인가 보네.”

최 여사가 다른 고객들을 선동하며 혀를 찼다.

“여기 총지배인이 재경가 3세라며. 그러니까 재경 그룹 외아들이랑 살면서 뒤로는 다른 남자랑 불미스러운 짓을 저지른 거네요?”

“실망이야 강주임.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우리 당장 컨시어지 교체해줘요. 불결해서 원.”

사모들이 일제히 가시 돋친 말을 퍼부었다.

“고객님. 원하시면 컨시어지 교체는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정이 말을 잇던 찰나였다. 흰머리가 지긋한 부 총지배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좌송합니다, 고객님. 바로 담당자 교체해드리겠습니다.”

부총이 치켜뜬 눈으로 나정을 돌아봤다.

“강 주임. 여긴 다른 직원한테 맡기고 그만 들어가 봐요.”

“네? 하지만,”

“안 들리나? 사람들 눈에 띄지 말란 말이야.”

부총이 어금니를 물며 말했다. 나정은 순간 반박할 말을 잃었다. 내게 반박할 자격이 있나. 그 기사는 모두 사실인데, 이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고개를 들어도 되나.

“……총지배인님은 어디 계신가요.”

“중역 회의실에 계십니다. 강 주임 대신 그 저질스러운 가십을 해명하느라 진을 빼고 계실 겁니다.”

부총의 시선은 싸늘했다. 주변에 모인 직원들, 최 여사와 다른 사모들까지. 전부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것 같았다. 나정의 눈이 연하게 떨렸다.

더러워.

바람피워 헤어져 놓고 이제 와 뻔뻔하게 재결합이라도 하려는 거야?

간도 크지. 어떻게 남편 친구랑 붙어먹어?

그 재력에, 그 용모에. 우 총은 뭐가 아쉬워서 저런 거지 같은 여잘 받아줬대? 약점이라도 잡혔나?

나정은 왠지 숨이 가빠졌다. 유니폼이 몸을 죄는 갑옷처럼 느껴졌다.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결국, 바닥에 무릎을 접고 앉았다. 동시에 수군대는 소리가 거세졌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일어나자.”

그때였다. 누군가 주저앉은 나정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고개를 든 나정이 눈앞의 별관 고객과 빤히 시선을 섞었다.

***

“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고객님.”

현오가 묵는 별관 객실은 총 여섯 개의 방과 두 개의 응접실, 세 개의 욕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정은 그중 두 번째 응접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나 지금 너 호출한 거야. 그러니까 넌 고객인 나를 컨시어지 중인 거지.”

“그럼 뭐라도 시키시든가요.”

나정은 아까부터 소파에 멀거니 앉아있기만 했다. 몸은 편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생각 중이야. 널 어떻게 부려먹을지.”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 현오는 다시 손에 든 시나리오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일단 앉아있어. 생각나면 시킬게.”

“고객님.”

“응 주임님.”

“혹시 제가 걱정돼서 이러시는 거면…… 괜찮으니까 내버려 두세요. 저 여기 앉아서 여유 부릴 시간 없어요. 가서 기사 막아야 해요. 포털 일면에 난 그 기사들. 전부 사실이거든요.”

현오의 고개가 다시 올라섰다. 연갈색 눈동자가 나정의 얼굴을 미끄러지듯 훑었다.

“나 너 걱정한 적 없는데.”

“…….”

“그냥 앉아있어. 혼자 대본 읽기 심심해서 그래.”

그가 손에 쥔 시나리오를 팔락팔락 흔들었다. 나정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차현오 씨.”

입술 새로 고객님 대신, 다른 호칭이 불거졌다. 현오는 살짝 동요했다.

곧이어 나정의 입이 열렸다.

“혹시 나한테 친구 이상의 뭔가를 바라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말아 주세요.”

“…….”

“저 차현오 씨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 그리고……,”

“알아.”

담담한 음성이 나정의 말을 잘랐다.

“친구 이상의 뭔가를 바란 적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고.”

“…….”

“저스트 프렌드십. 그게 다라고 했잖아.”

현오가 태연히 웃었다. 나정은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고객님. 그만 가볼게요. ”

이윽고 나정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긴 복도를 내딛는 구두 소리가 점차 작아지더니 멀리서 객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났다.

“프렌드십 같은 소리 하네.”

묘한 자괴감에 휩싸인 현오가 시나리오로 제 얼굴을 덮었다.

***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나정이 눈앞의 직원 숙소를 올려다봤다.

종일 밀려드는 고객의 컴플레인과 동료들의 수군거림 속에서 나정은 완전히 기진맥진했다. 모르는 번호로 쏟아지는 전화가 감당이 안 돼 핸드폰은 아예 꺼버렸다.

“우태주…….”

나정은 애틋한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태주가 보고 싶었다. 오늘 종일 그와 만날 수 없었다.

지금쯤 태주는 기사를 막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삼 년 전 일을 해명하느라 진이 빠졌을 것이다.

어쩌면 날 선택한 걸 후회하고 있진 않을까.

나쁜 생각은 하면 할수록 싱크홀처럼 범위를 넓혀갔다. 다른 생각까지 모조리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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