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45화.
감정이 목까지 북받친 나정이 잠시 자리에 멈춰 섰을 때였다.
“강나정.”
낮은 억양의 목소리가 귀에 감겼다. 슈트 위에 발마칸 코트를 걸친 태주였다. 그의 입 새로 차가운 입김이 담배 연기처럼 퍼져나갔다.
“…….”
나정은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곧이어 태주의 두 팔이 벌어졌다. 이리 와.
나정은 그대로 달려가 태주의 품에 안겼다. 허리를 꼭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기댔다. 코트 자락에서 옅은 화이트 머스크 향이 났다.
“고생했어.”
커다란 손바닥이 나정의 뒤통수를 쓸었다. 한결 풀어진 목소리는 나정에게 깊은 안정감을 주었다.
“미안해요, 오늘. 나 때문에 태주 씨까지.”
나정은 말끝을 흐렸다. 얼굴 반쪽을 갖다 댄 태주의 가슴에선 쿵. 쿵. 일정한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나정을 좀 더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회의실이 떠나가라 열을 내던 박한성 상무의 얼굴이 눈앞을 지나갔다.
‘가십도 가십 나름이지. 그렇게 문란한 과거가 있는 여자를 계속 우리 호텔에 다니게 놔둘 겁니까?’
평소 태주를 견제하던 박한성 상무는, 호텔의 명예를 실추시킨 대가로 나정과 태주,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며 핏대를 세웠다. 아마 지금도 두 사람을 파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시 호텔 들어가 봐야 돼.”
태주가 품에서 나정을 떼어냈다. 양어깨를 짚은 손에 적당한 힘이 실려있었다.
“응. 가요.”
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주에게 미안했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기사에 맞설 명분조차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때, 돌아섰던 태주가 다시 제게 다가왔다. 입술이 진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쉬어.”
잠시 후, 태주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차에 올라탔다.
“장 변호사님. 접니다.”
-안 그래도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기사는 대부분 블라인드 처리했습니다. 나머지도 내일이면 내려갈 겁니다. 최대한 강나정 씨 이름 거론되지 않게……,
“그걸론 부족합니다.”
태주가 말을 잘랐다.
“관심을 돌릴만한 더 큰 이슈가 필요합니다. 지체할 것 없이 우리 쪽에서 먼저 터뜨리죠.”
-예?
“폭탄 돌리기를 하자는 말입니다.”
***
“강나정 쟤도 보통은 아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출근할 생각을 하지?”
“저 정도 멘탈은 되야 재경 그룹 외동아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건가?”
이른 아침, 호텔로 들어서는 나정을 보며 직원들이 입을 모아 수군댔다.
어제 각종 포털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정과 태주의 지라시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라커룸에서도, 뾰족한 시선들이 나정을 따라다녔다.
“외도 상대가 우 총 친구였다며?”
“우 총은 다 알면서 재결합을 하겠다고 한 거야? 생긴 거랑 다르게 순정파네. ”
“순정은 무슨, 그냥 호구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한번 들이대 보는 건데~”
유니폼을 입고 라커룸을 나서는데 뒤에서 동료들의 비아냥이 들렸다. 걸음을 세운 나정이 다시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우태주 총지배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뭐? 너 웃긴다. 우리한테 뭐랄 게 아니라 애초에 네가 행실을 똑바로 했어야지. 너 때문에 총지배인님까지 같은 급으로 싸잡혀서 매도당하고 있는 거잖아?”
“네 말대로 급 떨어지는 짓을 한 건 나니까. 날 욕해. 괜히 엄한 사람 도마 위에 올리지 말고.”
받아치는 나정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잡아당긴 낚싯줄처럼 순식간에 라커룸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대박! 나정아! 기사 봤어?”
왈칵 문이 열리더니 보나가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섰다.
“이것 봐봐! 이 기사!”
이제 기사라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나정은 보나가 내민 패드에 신경을 집중했다.
“노여진 걔 말이야! J그룹 공주님 맞지?”
통쾌해 죽겠다는 듯 보나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지금 J그룹 완전히 터졌어. 대통령 게이트! 국정농단! 인터넷에서 다 그 얘기뿐이야!”
***
노성훈 대표의 한남동 자택에서 서슬 퍼런 고성이 잇따라 들려왔다.
“내가 건드리지 말라 그랬지!”
격분한 노성훈 대표가 골프채로 협탁 위의 분재를 내리쳤다. 쨍강! 파열음과 함께 튄 유리 조각이 여진의 뺨을 스쳤다.
“여보, 고정하세요. 여진이가 무슨 죄가 있어요!”
“비켜.”
노성훈 대표가 손에 든 골프채 끝머리로 여진의 면전을 겨냥했다.
“너 이 새끼…….”
오늘 아침 회사를 뒤흔든 헤드라인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노성훈 회장 정관계 로비 의혹.
유례없는 대통령 게이트.
류용재 대통령 500억대 뇌물 수수. 배후는 J그룹?
대선 개표 조작 가담 의혹까지!
“당장 가서 태주 앞에 무릎 꿇고 빌어.”
아뜩한 한마디가 여진의 숨통을 졸랐다.
“정말 태주 씨가 그랬어요? 그 기사, 태주 씨가……,”
“몰라서 물어!?”
노성훈 대표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애초에 네가 자초한 일이야! 하 회장 뒤를 캔 것도 모자라서 태주와 강나정 지라시까지 네 손으로 퍼뜨렸어! 정말 재경 쪽에서 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네 머리가 그것밖에 안 돼!?”
여진은 부들부들 떨었다. 왠지 웃음이 솟았다. 다물린 잇새로 바람 빠진 실소가 비집고 나왔다.
“대통령 게이트니 뭐니…… 실컷 떠들라 그래.”
“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란히 자폭하죠, 뭐.”
“노여진!”
노성훈 대표의 입에서 사자후 같은 고성이 튀어 나갔다. 이영은 여사는 남편이 혈압으로 쓰러질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노 대표의 혈압을 모니터링하는 손목 밴드에서 아까부터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댔다.
“여진아, 일단 가서 태주한테 빌어. 태주 마음을 돌려야 하 회장님께서도 널 용서해주실 거ㅇ…….”
“내가 왜 빌어야 하는데?”
여진이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난 절대 후회 안 해. 적어도 세상에 강나정의 실체를 알렸으니.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나정일 손가락질해요. 꽃뱀이다, 더러운 불륜녀다, 어떻게 남편 친구랑 몸을 섞을 수 있냐. 온갖 낭설에 원색적인 추측까지 더해져서, 걔 이제 정말 회생 불가에요.”
그런 나정일 지켜보는 제 기분이 얼마나 날아갈 것 같은지 아세요, 아버지……?
“나가.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
노성훈 대표가 여진을 떠밀었다.
“안 그래도 태주 씨한테 가봐야 해요. 본식 때 입을 예복은 꼭 내 손으로 골라주고 싶거든요. 김 비서님?”
“네.”
“차 대기시켜요. 바로 공항으로 갈 거니까.”
여진이 기함하는 노성훈 대표를 비웃기라도 하듯, 홀연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
끼이익!
태주가 제 앞을 가로막는 포르쉐를 보고 반사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해안 도로 위에 아찔한 스키드마크를 남기며 그의 차가 멈춰 섰다.
탁! 포르쉐 문이 열리며 여진이 내려섰다.
“…….”
태주는 운전석에 지그시 등을 기댔다. 여진에게 고정된 성마른 눈동자가 미세하게 번득였다.
미리 섭외한 장소에 대기 중이던 기자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나정에 관한 지라시를 전부 내리고, 대중의 관심을 J그룹으로 완전히 돌리기 위해 태주가 먼저 응한 자리였다.
“잠깐 내려.”
그런데, 갑자기 여진의 차가 제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차창을 두드리는 여진이 가증스러워, 태주는 미간을 좁혔다. 이내 지잉. 창이 내려갔다.
“내리라니까.”
“얘기해.”
차창을 내려준 것만도 고마워 하라는 듯, 태주는 오만했다.
그의 오만함조차 미치도록 좋아서 여진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태주 씨가 이렇게 비겁하게 나올 줄은 몰랐어.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내 아버지 회살 건드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더한 짓도 해. 난.”
태주의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아? 태주 씨 기억. 나정이에 대한 그 기억! 할 수만 있다면 전부 다시 도려내 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태주가 차창을 올렸다. 그때, 의미심장한 말이 귓전을 울렸다.
“아니다. 차라리 나정이 기억을 지우는 편이 낫겠어. 걔 머릿속의 기억회로를 뒤죽박죽 헝클여 놓으면 태주 씨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 아냐? 그럼 두 사람 다시 엮일 일도 없겠지.”
생기가 꺼진 여진의 눈동자가 표독한 빛을 발했다.
“정말 그렇게 만들어 줄까, 태주 씨? 내가 나정이한테 그런 짓을 하길 바라?”
태주가 대답 대신 핸들을 쥐었다. 곧 차에 시동이 걸렸다.
“궁금하군. 네 바닥이 어딜지. 결국 어디까지 추해질지.”
이윽고 가속을 낸 태주의 차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하. 남겨진 여진은 딸꾹질을 하듯 간헐적으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강나정 씨.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습니다.”
같은 시각, 나정은 인사팀과의 면담에서 강주훈 과장을 만났다. 그는 깐깐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인사팀의 마스코트였다.
“강나정 씨와 우태주 총지배인의 가십으로 현재 호텔 측 입장이 상당히 난처한 상황입니다. 그 지라시의 내용이 전부 사실입니까?”
“네. 사실입니다.”
나정에게서 너무도 순순한 대답이 돌아오자, 강주훈 과장은 의외라는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지라시가 사실이라고 해도, 호텔에 재직하기 전 발생한 일이고 이미 당사자들끼리 원만한 합의를 거쳤다면, 이제 와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인사팀에서 강나정 씨를 자의로 내쫓을 수는 없다는 얘깁니다.”
나정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경 너머의 매서운 눈이 자신을 관찰하듯 훑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진해서 호텔을 나가주시기를 바랍니다.”
곧이어 강주훈 과장의 입이 열렸다. 결국 호텔이 제시한 카드는 권고사직이었다.
나정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모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침묵을 지키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