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편이 부임했다 46화.
“적어도 이 호텔에 다니는 동안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일했습니다.”
“압니다. CSI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셨더군요. VIP 고객 유치 능력도 우수하고 근태관리도 철저하고요.”
강주훈 과장이 인사평가 자료를 뒤적였다. 나정은 잠자코 다시 운을 뗐다.
“절 해고하신다면 군말 없이 처분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만약 제게 선택권을 주신다면, 전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가 나가면 그 사람 혼자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될 테니까요.”
목소리에 자연히 힘이 실렸다.
“제 자리에서, 제 몫의 책임을 지겠습니다. 기회를 주십시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노력하겠습니다.”
나정이 가슴을 펴고 자세를 바로 했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강주훈 과장과 대치했다.
***
퇴근 후, 직원 숙소로 향하는 길이 왠지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인사 면담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무거웠다.
나정이 꺼진 핸드폰을 켰다. 모르는 번호로 쏟아진 부재중 전화, 그 틈에서 대석의 이름이 보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 잘 있어.]
짧은 답장을 한 후 다시 핸드폰 전원을 껐다. 그러곤 걸음을 내딛는데. 문득 정차돼 있던 마세라티 한 대가 시야에 들어왔다.
탁. 차 문을 열고 태주가 내려섰다. 나정이 그와 몇 초간 애틋한 시선을 섞었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보조석에 앉은 나정이 창밖에 시선을 던졌다. 직원 숙소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쳤다. 태주는 삼십 분째 말없이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지잉. 차창이 내려갔다. 나정은 잠시 눈을 감고 밤바람을 들이켰다. 하루 종일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핸들을 잡은 태주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거머쥐었다. 그리곤 마사지하듯 적당한 힘으로 주물렀다. 손길은 야릇하기보다 자상했다. 걱정하지 말고 한숨 자. 나정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차가 멈춘 곳은 애월의 어느 바다 앞이었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모래사장은 인적 없이 고요했다. 멀리서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나정은 흠칫하며 등받이에 늘어져 있던 몸을 떼어냈다.
재빨리 확인한 시간은 10시 30분. 한 시간이 넘게 졸았나 보다. 그 말은 태주가 운전석에서 아주 오랫동안 제 잠든 얼굴을 관찰했다는 소리였다.
핸들을 끌어안은 채 저를 주시하던 태주와 눈이 마주치자, 나정은 왠지 민망해졌다. 손등으로 뺨을 누르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 집.”
“우리 집……?”
나정의 눈빛에 당혹감이 감돌았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멀리 2층짜리 독채가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네 집이야. 너한테 주려고 샀으니까.”
태주가 태연히 뇌까렸다. 별로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했다. 나정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제주도에 집이 있었어요?”
다시 고개를 돌려 독채를 바라봤다.
“마당에 자작나무랑 팽나무를 심었어. 네가 좋아하는 라일락도.”
태주는 잠자코 덧붙였다. 봄이 되면 라일락 향기가 온 집안을 감돌 거라고.
나정은 소리 없이 입을 어물대다가 이내 고개를 떨어뜨렸다. 왠지 내년 봄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내년에도, 그다음 해에도,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네가 가지고 있던 결혼반지.”
그때, 불쑥 태주의 입이 열렸다.
“바다에 던진 뒤로 줄곧 후회했어.”
“…….”
나정은 머릿속으로 그날 일을 떠올렸다. 장막처럼 검게 출렁이던 바다, 제게서 빼앗은 결혼반지를 망설임 없이 바다에 내던지던 태주의 모습…….
“다신 그럴 일 없을 거야.”
뭐? 나정이 눈을 키웠다. 태주가 손에 든 벨벳 케이스에서 화이트 골드 링을 꺼냈다.
정 가운데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나정의 눈앞에서 은은한 빛을 발했다.
“결혼하자. 한 번 더.”
“…….”
나정은 이번에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코가 매워지며 눈가가 젖어 들었다.
“나랑 결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요?”
감정이 목을 타고 북받쳤다.
“사람들이 태주 씨 미련하다고 욕할 거예요.”
“상관없어.”
“계속 우릴 손가락질할지도 몰라요. 나 때문에 하루하루가 악몽일 거예요. 고재영…… 그 이름이 매일 태주 씰 따라다닐 거야.”
멈칫, 태주의 움직임이 멎었다. 아슬한 공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나정은 고개를 떨궜다. 태주에게서 무슨 말이 돌아온대도 다 감수할 수 있었다. 결혼 얘긴 못들은 걸로 해. 설사 그렇게 말한대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태주가 자신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넌 편하게 자. 악몽은 내가 꿀게.”
담담한 한마디와 함께 태주가 입을 맞춰왔다. 나정의 눈에서 빠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가 태주의 진득한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날, 두 사람이 밤을 보내기 위해 찾은 곳은 직원 숙소가 아니었다.
애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짜리 독채는 오랫동안 비워져 있어 공기가 썰렁했다.
그곳에서 뜨거운 건 오직 태주와 자신, 둘뿐이었다.
“여기 온 손님은 네가 처음이야.”
태주가 현관에서부터 나정을 몰아붙이며 말했다. 그의 오른손이 나정의 스커트 자락 속으로 들어갔다.
“내가 손님이에요?”
“아니.”
이젠 네가 이 집 주인이야.
태주가 나정을 번쩍 안아 들고 입술을 포갰다. 격렬한 호흡을 나누며 복도를 지나친 그들은 응접실 소파에 몸을 떨어뜨렸다. 침실까지 갈 여유가 없었다.
옷가지가 허물처럼 벗겨져 소파 아래를 뒹굴었다. 나정은 제 앞에서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끌러 내리는 태주를 멀거니 바라봤다. 기다랗고 섬세한 손길이 지나갈 때마다 그의 셔츠 앞섶이 조금씩 벌어지더니, 이내 탄탄한 상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태주는 능숙하게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러곤 나정에게 몸을 밀착했다.
읏. 목에 와닿는 촉촉한 열기에 나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태주 씨, 조, 금만, 살, 살……,”
아릿한 호소가 입술 새로 터져 나왔다. 태주는 그녀의 뒷목을 끌어당겼다. 그러곤 이앓이를 하는 짐승처럼 나정의 목을 잘근 씹었다.
커다란 손아귀에 사로잡힌 나정은 찌릿찌릿한 전류를 느꼈다. 태주가 움직일 때마다 온몸의 감각이 물로켓처럼 훅 치솟았다 땅으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쾌감과 고통이 교차하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기도 했다.
“나정아.”
얼마쯤 격렬한 행위가 이어졌을까.
“……침대로 가자.”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보다.
다리의 힘이 풀린 나정을 번쩍 안아 든 태주가 곧장 침대로 직행했다.
다른 건 다 잊고 나한테만 집중해.
그가 잔머리칼을 쓸어주며 귓전에 속삭였다. 그러곤 다시 나정과 몸을 겹쳤다. 딴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정신을 빼놓았다.
나정은 그런 태주가 사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사악함마저 사랑스러웠다.
“사랑해요.”
본능처럼 튀어나온 말에 태주는 더욱 거세게 저를 몰아붙였다. 나정은 까무러지듯 그에게 몸을 내맡겼다. 끌어안은 태주의 등허리가 땀에 젖어 축축했다.
새벽 내도록 이어진 행위에 모든 체력을 소진한 두 사람은 어느덧 서로를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 임신이래. 8주.’
나정은 꿈속에서 어떤 남자와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었다.
초음파 사진을 건네자, 남자는 말 없이 사진을 받아 들었다. 그리곤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이야? 정말이지?’
남자는. 아니…… 재영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번쩍. 나정이 눈을 떴다.
또 그 꿈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꿈.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번엔 꿈속 남자의 얼굴이 정확히 시야에 잡혔다는 거였다.
고재영……. 나정이 그 이름을 읊조리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옆에 누워 잠든 태주를 내려다보았다. 태주는 잠결에도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태주 씨…… 사랑해요.”
사랑해. 나정이 불안하다는 말을 그렇게 대신했다. 가느다란 손으로 태주를 연신 쓰다듬었다.
***
다음 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뜬 두 사람은 간단한 과일과 씨리얼로 아침을 때웠다.
으읏. 간밤의 여파로 허벅지 안쪽이 욱신거렸다. 나정은 오늘이 휴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옷을 입었다.
몇 시간 후, 두 사람이 찾아간 곳은 나정의 본가였다.
연락이 되지 않는 딸을 오매불망 걱정하던 대석은 결혼 허락을 받기 위해 찾아온 두 사람을 보고 얼이 빠져 눈만 꿈벅거렸다.
“두 사람……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정말 다시 합칠 생각이냐?”
“허락해주십시오.”
태주가 대석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석은 태주 곁에 나란히 앉은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나정은 연하게 웃어 보였다. 아빠. 나 정말 괜찮아. 태주 씨랑 같이 살고 싶어요.
대석은 마른 침을 삼켰다. 티 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가슴이 아렸다.
“……너희가 괜찮다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어. 잘 버텨내 봐, 어디.”
농장 일로 거칠어진 대석의 손이 태주의 손을 감쌌다. 우리 딸 좀 잘 부탁한다. 두 남자 사이에 말 대신 어떤 감정들이 오갔다. 나정은 가만히 고개를 수그렸다. 눈가의 이슬을 아버지 몰래 얼른 닦아냈다.
이제는 하 회장을 만나러 갈 차례였다.
태주는 극구 함께 가겠다는 나정을 본가에 남겨둔 채 홀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정인 같이 안 왔니?”
재경 그룹 회장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처음 시야에 잡힌 건 백발의 머리를 포마드로 넘긴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집무 책상에 앉은 하 회장은 조금도 놀란 기색 없이 아들을 맞았다.
“오늘쯤 네가 날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