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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편이 부임했다-47화 (47/60)

전남편이 부임했다 47화.

“그래. 나정이랑 같이 살기라도 할 생각이니?”

“결혼할 겁니다.”

태주의 입에서 즉답이 떨어졌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직구였다.

“오자마자 고작 한다는 소리가…….”

하 회장이 츳츳 혀를 찼다. 온기 없는 눈동자엔 가벼운 경멸이 묻어났다.

“연애만 해. 나정이랑 다시 만나는 것까진 뭐라고 안 한다. 하지만 결혼은 안 돼.”

하 회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여론 좀 잠잠해지고 나면 정식으로 네 혼사부터 잡을 거다. 금영 그룹 둘째 딸. 너도 잘 알겠지만……,”

“뭔가 착각하신 모양입니다.”

태주가 어머니의 말을 잘랐다.

“전 결혼 승낙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하 회장이 첨예한 시선으로 아들의 낯빛을 훑었다.

“……그렇구나. 표정을 보니 알겠다. 허락이 아니라, 결혼을 통보하러 온 거구나. 기어이 나정이를 선택하겠다고 말이야.”

미련한 자식. 하 회장의 낯빛이 어그러졌다.

“삼 년 전에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나정이를 몰라. 송 비서!”

“네. 회장님.”

“사진 가져와.”

하 회장의 수행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네 손으로 직접 열어보렴. 그 안에 너랑 나정이가 절대 결혼할 수 없는 이유가 들어있으니까.”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태주가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안에는 산부인과 진료기록과 태아를 주수 별로 찍은 초음파 사진 서너 장이 들어있었다.

“나정이 삼 년 전 산부인과 기록이다.”

하 회장이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태주를 향해 말했다.

“그때 나정이 임신했었다.”

사진을 쥔 손에 설핏 힘이 들어갔다. 태주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정이가 임신한 시기와 고재영을 만난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지더구나.”

“…….”

“강나정은 네 앤지, 고재영의 앤지 모를 아이를 임신한 거야. 그러다 고재영과 떠났던 밀월여행에서 사고를 당해 배 속 아이를 유산했고, 끝끝내 네겐 입도 뻥긋하지 않았지.”

“…….”

“어쩌면 그 아이는 태주 네 아이일 수도 있었다. 너 정말 나정일 용서할 수 있겠니……?”

하 회장의 말이 태주의 심장을 관통했다.

“고재영과 강나정은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사이였을 거야. 결국 두 사람은, 마지막까지 널 농락하고 유린한 거다.”

***

“왔어요? 회장님이랑 얘긴 잘했어요?”

썰렁한 독채에서 홀로 태주를 기다리던 나정은 밖에서 들리는 차 소리에 곧장 문을 열고 나갔다.

운전석에서 내린 태주의 낯빛은 어딘가 창백했다.

“회장님한테 야단 많이 맞았어요? 역시 같이 갈걸 그랬나…….”

태주는 대답 없이 나정을 빤히 응시했다. 적요한 눈빛이 한참 동안 그녀에게 머물렀다.

“왜 그렇게 봐요?”

“아냐.”

그가 나정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 저녁 같이 먹으려고 찌개 끓였는데.”

그냥 있는 재료로 한 거라 맛은 없을 거예요. 나정은 멋쩍게 웃었다.

“들어가자.”

이내 태주의 손가락이 나정의 손 사이를 빠듯하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집안으로 들어섰다.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은 후, 둘은 함께 설거지를 했다. 태주는 어쩐지 내내 말이 없었다.

“태주 씨. 불멍이라고 알아요?”

설거지를 마치고 나정은 응접실 벽난로 앞에 앉아있었다.

“타닥타닥 타는 불을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걸 불멍이라고 한대요. 지금 우리처럼…….”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태주가 뒤에서 나정을 끌어안고는 하얀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태주 씨?”

그가 당황한 나정을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사실 아까부터 나정의 얘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했다. 밥을 먹을 때도. 지금도. 머릿속엔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강나정. 솔직히 말해줘.”

입을 맞출 듯 고개를 내린 태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왜 그래요? 회장님 만나고 온 뒤로 태주 씨 좀 이상해.”

나정이 손을 올려 태주의 콧날을 쓸었다.

“듣고 싶어.”

“응……?”

“삼 년 전, 너랑 고재영 사이에 있었던 일.”

태주의 입에서 아슬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나정은 살짝 동요하는가 싶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태주를 말없이 들여다봤다.

“왜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어요? 예전에 이미 다 말했잖아요.”

둘 사이에 묘한 정적이 일었다. 벽난로에서 타닥. 타닥. 불씨가 튀었다.

“그 무렵 태주 씬. 매일같이 일에 치여 살았어요.”

한참 만에 먼저 운을 뗀 건 나정이었다.

“늘 바빴고, 날 돌아봐 줄 여유가 없었어요. 그날도 출장 때문에 집을 비운 상태였어요. 마침 재영 씨가 당신을 만나러 왔었고…… 그날, 같이 와인을 마시다 충동적으로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었어요.”

나정의 눈동자가 불온하게 흔들렸다.

“그 후로 태주 씨 몰래 종종 재영 씰 만났어요, 단둘이 밥도 먹고, 영화도 봤어요. 그러다 단둘이 별장으로 여행을 갔고…… 돌아오는 길에, 알다시피 사고가 있었어요.”

끔찍한 전복사고였다. 파손된 재영의 차량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날 이후 재영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고, 자책감에 시달리던 나정은 결국 태주에게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먼저 이혼을 요구했다.

“……정말 그게 다야?”

잠자코 있던 태주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나정은 왈칵 차오르는 감정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예요. 만약 못 믿겠으면……,”

“믿어.”

믿지 못해서 물어본 게 아니었다. 다만,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태주가 가늘게 떨고 있는 나정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날 밤. 나정을 재운 후 태주는 홀로 서재에 있었다. 한 손엔 하 회장에게 건네받은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가 봉투에서 나정의 진료기록을 꺼냈다. 아이를 임신하고, 사고로 유산한 흔적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무리 나정이 미워도 하 회장은 절대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즉 이 진료기록이 조작됐을 가능성은 제로였다.

그런데 왜일까. 기록의 당사자인 나정은 정작 자신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태주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설을 세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나정이 직접 들려준 삼 년 전 이야기에서 임신, 아기, 유산이라는 단어는 완전히 빠져있었다. 태주를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기억에 없는 것 같았다.

기억?

태주는 무심코 여진을 떠올렸다.

‘아니다. 차라리 나정이 기억을 지우는 편이 낫겠어. 걔 머릿속의 기억회로를 뒤죽박죽 헝클어 버리면 태주 씨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 아냐? 그럼 두 사람 다시 엮일 일도 없겠지.’

‘정말 그렇게 만들어 줄까, 태주 씨? 내가 나정이한테 그런 짓을 하길 바라?’

태주는 깊어진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기분 나쁜 상상이 등을 타고 엄습했다.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기우였다.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 없어야 했다. 여진이 나정의 과거와 얽혀있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됐다.

***

“그러니까…… 그 다이아 반지를 우 총이 선물했다고? 너 프러포즈 받은 거야?!”

독채에서 태주와 주말을 보낸 후 다시 직원 숙소로 돌아온 나정은 현관에서부터 보나의 검문에 딱 걸렸다.

“지난 며칠간 너와 우 총 사이에 있었던 러브스토리를 내게 상세하고 장황하게 찌그려봐. 물론 19금으로.”

“그전에 송준 팀장님이 왜 네 침대에 누워있는 건지 설명 좀 해줄래?”

“어, 어? 어떻게 알았어……?”

“하하. 나정 씨, 하이…….”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려 있던 송준이 멋쩍게 짜잔, 하고 나타났다.

“실은 어젯밤에 똥준 씨가 술이 과해서, 집을 잘못 찾아왔지 뭐야…… 그걸 또 야박하게 내쫓을 수도 없고…….”

보나가 우왕좌왕 변명을 잇다가, 다시 표정을 바꾸고 나정을 채근했다.

“암튼! 그건 그거고. 너 정말 프러포즈 받은 거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나정은 팔을 붙잡고 늘어지는 보나에게 태주와 있었던 일을 대강 설명해주고 나서야 검문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정말이야? 정말 한 번 더 결혼하자고 말했어? 우 총 은근 박력 있네! 꺄!”

“그러게요! 짜식 다 컸네요!”

보나와 똥준이 꺅꺅거리며 손을 마주 잡았다.

“안 되겠어, 재결합 기념 축하 파티라도 해야지. 가서 풍선 좀 사와요, 똥준 씨!”

“풍선 성애자예요, 보나 씨?”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나정은 살짝 어지러운 머리를 받쳐 들었다.

그때 현관 밖에서 누군가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쎄요?!”

“혹시 송준 팀장 여기 있습니까?”

헉 우 총이다! 멋들어진 프러포즈의 당사자! 주인공! 보나와 송준이 동시에 눈을 빛냈다.

“들어오세요!”

우렁찬 인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환영합니다, 총지배인님!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아닙니다.”

들뜬 보나의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태주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매서운 눈초리가 보나와 송준, 나정을 차례로 훑었다.

여자들 숙소에 들어와 있어서는 안 될 덩어리 하나가 떡하니 끼어있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기에 설마 했는데.

“……너.”

네가 왜 여기 와 있는 거냐고, 태주는 말 대신 눈으로 물었다.

경계태세를 발동한 그를 보고 송준은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아. 나 나정 씨 보러 온 거 아냐. 울 뽀나 씨 때문에 와 있는 거지.”

“뽀나가 뭐지?”

태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추궁했다. 나정은 왠지 진지한 그 모습이 귀여워 살짝 고개를 내리고 웃었다.

“뽀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어도러블한 생명체야. 나정 씨는 비교가 안 되지.”

“어머. 똥준 씨 정말.”

보나가 송준의 어깨에 찰싹 매달렸다. 마치 달달한 바퀴벌레 한 쌍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투샷을 예민한 시선으로 내리훑던 태주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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